[천마논단] 금사빠도 좋다!
[천마논단] 금사빠도 좋다!
  • 최재목 교수(철학과)
  • 승인 2017.09.11 19:3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수업 시간에 처음 ‘금사빠’라는 말을 들었다. 물어보니, ‘금방 사랑에 빠졌다’는 말을 줄인 거란다. 수업을 마치고 길을 걸으며 생각했다. ‘참 오랜만에 이런 싱싱한, 낯선 언어에 접했다’고. 그런데 나는 지금, 무언가에, 누군가에, 금방 사랑에 빠질 수가 있을 수는 있을까. 대답은 “노”. 자연스런 감정이 고장이 났거나 고물이 되었다는 말이다. 서글프고, 억울하고 서러워 할 일인가. 아니다. 갈수록 재미없어 지는 대학생활. 잡무에 지쳐서, 그냥 하던 일에 붙들려서 비틀대다가, 가끔 정신을 차려서 ‘낙(樂)’이 있을만한 구석을 찾아 나서곤 하지만, 별 뾰족한 수도 없다. 떠날 날들을 위해 스스로를 정리해가면서, 정든 것들과 결별하는 연습을 자주 해야 하는 시점. 아주 별 볼 일 없는 것들과 친해지고, 잘 사귀어야 한다. 내가 ‘금사빠’를 할 것은 바로 ‘내 인생’이어야 하지 않을까. 저 무욕의 들판, 언덕이여야 하지 않을까. 걷지 못했던 들길이거나…. 말로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 중얼중얼.

 한편 금사빠가 있다면 ‘금방 증오에 빠졌다’는 ‘금증빠’도 있지 않을까. 사랑과 증오는 같은 뿌리이니, 사랑은 금방 증오를 불러온다. 물 속 깊이는 알아도 사람 속은 모른다 했다. 멀쩡한 얼굴 밑에 숨은 수심(獸心)을 누가 알 것이며, 찔찔 우는 얼굴이 숨긴 기쁨을 또 누가 눈치 채랴. ‘헤어지면 그리웁고 만나보면 시들하고 몹쓸 것이 내 심사’라는 옛 가요처럼, 금방 마음은 변한다. 수시로 변하는 순간을 그림으로 담아내고자 했던 화가 마네, 시시각각 변하는 바다 모습을 음악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작곡가 드뷔시. 모두 ‘순간’을 ‘공간’ 속에다 ‘흔적’으로 붙들어 두고자 했던 사람들이다.

 사랑도 ‘휙’ 지나가는 감정의 순간, 그런 순간적 진실을 붙들어내려는 것이다. 사랑은 허공, 허무 속에서 징표-표식을 남기고 싶어 한다. 선물을 주기도 하고, 사진을 찍기도 하고, 여행도 가고, 더 진행되면 결혼도 하고 가정도 이루며 자식도 낳는다. 번개처럼 곧 지나가버릴, 그럴수록 썸 타는 것. 퇴락하고 추락하기에, 더 생생하고 달아오르는 것. 싱싱하게 꽃핀 그런 절정일 때, 슬슬 갈아타는 연습도 해야 한다. 박수칠 때 떠나는 지혜를 알아야 한다. 객관화시키는 안목이다. 내면의 성찰, 자기 자신 속으로 향하는 ‘눈’을 갖는 것 말이다. 물장즉노(物壯則老). 사물의 기세가 왕성해지면 쇠퇴하기 마련. ‘낄 때 끼고 빠질 때 빠진다’는 말을 줄여서 ‘낄끼빠빠’라는 말도 어디선가 들었다. 문맥을 균형 있게 판단하고 결단하는 것은 좋다.

 그런데 왠지 나는 금사빠에서 ‘금(=금방)’이란 말이 자꾸 마음에 걸린다. 금방이라는 점을 수도 없이 찍어서 연결하면 아름다운 인생이 될까? 과연 그럴 수는 있을까?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좀 어려운 대목이나, 여하튼 청춘은 시대의 안테나이니만큼, 늘 사조와 물결의 선단, 첨단에 서 있어야 한다. 금방이란 ‘타이밍’, 바로 지금-여기이다. 청춘의 한 시절. 자신이 시대의 중심에 서서. 사랑하고 고뇌해 볼만하다.

 사람은 잃어버릴(혹은 잃어버린) 시간을 기록하고 기억하고자 한다. 역사는 기록하고, 사랑은 기억한다. 사람의 기억은 추억으로 유지된다. 이 추억도 소멸해간다. 그래서 아프다. 몸은 ‘아홉 개의 구멍이 난 상처’라고 했지 않은가. 이 찔찔대는 상처들을 데리고 서로 사랑하면서 잘 살아남아야 한다. 일단 금사빠도 좋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