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주 교수의 따뜻한 시 읽기] 질투는 나의 힘
[김문주 교수의 따뜻한 시 읽기] 질투는 나의 힘
  • 김문주 교수(국어국문학과)
  • 승인 2016.11.28 21: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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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 기형도,「질투는 나의 힘
(『입 속의 검은 잎』, 1989)

 

 기형도(1960∼1989)는 서른의 나이로 요절한 시인입니다. 이 작품이 수록된 그의 유고 시집은 이 땅의 많은 문청(文靑, 문학청년)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시집 중의 하나입니다. 이 시집의 무엇이 문청들을 사로잡은 것일까. 기형도는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는 매우 사교적이고 활달했지만, 실상은 깊은 우수(憂愁)에 침윤된 영혼이었습니다. 아마도 가난하고 외로운 성장기를 겪으면서 그의 마음에 우울의 정념이 자리 잡은 듯합니다. 그의 시편들에는 청년기의 격정과 낭만의 감정들이 담겨 있지만, 다른 한편에는 생을 다 산 자의 쓸쓸함과 회한도 내장되어 있습니다. 한 영화감독에게 영감을 주어 동명의 영화제목이 있을 정도로 이 시는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는데, 그것은 生의 전체를 산 자의 시선, 그 시선에 포착된 서늘한 진실이 이 시를 가로지르고 있기 때문이지요. 이 작품에는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린”, 오로지 ‘질투’만을 동력으로 하여 추동된 삶을 돌아보는 깊은 회한이 가득합니다. “너무나 많은 공장”이 가동되어 늘 분주했던 마음, 그 生을 돌렸던 연료가 ‘질투’였다니!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 고백은 비단 기형도의 것만은 아니겠지요. 내 삶을 가동시키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라는 고백을 生의 후반부, 生의 끝에 하게 된다면 그때 생은 참으로 참담하겠지요. 이 시의 화자는 이미 늙어버린 자입니다. 서른이 되지 않은 기형도 안에 이미 생을 탕진한 자가 살고 있는 셈입니다. 한 학기가 마무리되는 시점에서 우리가 살아온 날들을, 그래서 다시 살아갈 날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 시의 서늘한 고백,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라는 저 충격적인 탄식이 마음을 텅텅 울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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