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칼럼리스트] 이 시대에서 철학하기
[나도 칼럼리스트] 이 시대에서 철학하기
  • 정제기(서양철학 석사과정)
  • 승인 2016.03.28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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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재란 무엇인가? 사실 이 물음은 가장 쉬우면서도 난해하고, 또한 가장 평범하면서도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다. 왜냐하면 존재라는 개념은 누구나 쉽게 사용하고 있는 개념이지만, 그 의미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사용하고 있는 개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존재하는 것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반드시 존재란 무엇인지, 자신의 존재는 과연 어떠한 것인지 물어야만 한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물음을 ‘존재물음(Seinsfrage)’이라고 부른다. 또한 오직 인간만이 스스로 존재물음을 물을 수 있는, 다시 말해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문제삼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고 말한다. 그러나 하이데거에 따르면, 이러한 물음은 너무나 무겁고 괴로운 물음이기 때문에 비본래적인 퇴락한 인간은 이 존재물음을 회피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 물음을 계속해서 놓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야말로 진정으로 본래적인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자신의 존재가 무엇인지를 묻는 작업은 인간에게 있어 가장 근본적이며 가장 의미있는 철학적 사유라고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인간은 자신의 존재 이외에 다른 존재를 문제삼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나는 이것을 철학함(Philosophieren)이라고 부르고 싶다. 이러한 철학함의 대상은 단순히 몇몇 객관적 대상에 그치는 것만이 아니라, “인간이란 무엇인가?”, “도덕50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윤리적인 문제들에서부터, “국가란 무엇인가?”, “대학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정치/사회철학적인 문제들, 또한 “물리학이란 무엇인가?”, “자본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학문적인 영역에까지 넓혀나갈 수 있다. 특이한 점은, 이러한 물음은 오직 ‘철학하는 인간(Philosophierender Mensch)’만이 물을 수 있다는 것이다. 과학은 결코 과학의 영역 안에서 과학이 무엇인지 스스로를 문제삼을 수 없다. 경제와 자본, 공학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철학하는 인간’이 각각의 대상의 존재를 문제삼기 시작할 때 비로소 각 영역이 진정한 그 진가와 가치를 발휘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현대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이 과연 우리 스스로에 대해 존재물음을 묻고 있는지, 우리가 속한 공동체가 정말 올바른 공동체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끊임없이 철학하고 있는지는 의문스럽다. 우리나라는 특히 철학하기 힘든 나라다. 그러나 이러한 철학함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알 수 있는지, 우리가 무엇을 해야만 하는지, 우리가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지에 대해서 묻지 않은 채, 단지 자본과 정치적인 힘의 논리로 모든 것을 환원시키려 한다면, 우리는 결국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인간다움’이라는 가장 본질적이고 고유한 가치들을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우리는 ‘갑질의 횡포’와 ‘비민주적인 의사소통의 부재’를 보며 불합리하다고 분노하지만, 정작 우리가 그 횡포를 부리는 갑이 되기를 희망하는 이중 잣대라는 붓을 들고서 우리의 슬픈 자화상을 그리고 있다. 우리가 슬픈 자화상이 아니라 희망을, 좀 더 인간다움을 그리고 싶다면, 퇴락한 인간이 아니라 진정으로 본래적인 삶을 살고 싶다면, 계속해서 우리의 존재를 문제삼도록 하자. 끊임없이 철학하도록 하자. 주위의 아주 작은 것들이라도 바뀌기를 희망한다면, 멈추지 말고 철학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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