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칼럼리스트] 부끄러워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나도 칼럼리스트] 부끄러워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 김현정 박사과정(국어국문학과)
  • 승인 2016.02.29 14: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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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쉽게 씌어진 시(1942.6)」부분

 최근 개봉한 영화 <동주>에는 윤동주와 정지용의 짧은 일화가 등장한다. 시인을 꿈꾸던 청년 윤동주는 고대하던 정지용과의 만남에서 고개를 숙이며 말한다. “부끄럽습니다.” 그러자 정지용은 이렇게 답한다. “부끄러운 줄 아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다. 부끄러운 줄 모르는 게 부끄러운 거지.” 실제로 당대의 거목이었던 정지용은 자신을 찾아온 수많은 문청(文靑) 가운데 하나인 이 숫기 없는 청년과의 만남을 기억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몇 년 후, 청년의 유고집이자 정식으로 출간된 단 한 권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의 서문에서 이렇게 쓴다. “무명(無名) 윤동주가 부끄럽지 않고, 슬프고 아름답기 한이 없는 시를 남기지 않았나?(1947.12)”

 스물다섯 살의 윤동주가 일본 유학에 필요한 도항증을 얻기 위해 더는 창씨개명을 피할 수 없었을 때, 그는 「참회록(1941)」을 쓴다. 그러나 이미 습작을 시작한 때부터 십여 년에 불과한 창작 기간 쓰인 시들은 대부분이 참회록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윤동주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서시」, 1941)”를 바랄 때 그는 자신이 기억하는 모든 부끄러움을 떠올리느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앞의 시)” 괴로웠을 것이다. 시를 발표할 지면조차 얻지 못했던 작가 지망생에 불과했던 그가, 남의 나라에 얻은 좁은 방안에서 동료도 독자도 없이 써내려간 고백은 불안한 영혼의 떨림을 간직하고 있으며, 읽는 이의 마음을 순정하게 만든다. 거대한 악과 야만의 시대 한가운데서 그가 부끄럽게 여기는 자신의 죄목은 시(詩)를 쓰고 있다는 사실이다. 일찍이 시를 쓰기 좋은 시절이나 자리가 마련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며, 앞으로도 오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시는 언제나 하찮고 쓸모없을 것이며, 시인도 그러할 것이다.

 다시 영화 <동주> 속 송몽규의 말을 빌려 묻는다. 세상을 바꾸지 못하는 문학이라면 그것을 쓰는 일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일찍이 평론가 김현은 문학의 역할을 자문하며 이렇게 대답한다. 문학은 배고픈 거지를 구하지 못하지만, 거지가 있다는 것을 추문으로 만들고 그리하여 인간을 억압하는 것들을 고발한다고. 동시에 그 무용함으로 인해 아무것도 억압하지 않는 유일한 것이라고 말이다. 윤동주의 시가 오늘날에도 여전한 감동을 주는 것은 순수하고 투명한 그의 성정이나 불행한 죽음 때문이 아니라, 세상의 거대한 야만성 한가운데서 잘못이라 할 수 없는 죄까지도 고백하려 했던 낯선 자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가 부끄러움 때문에 고개를 들 수 없다고 말할 때, 괴로움의 이유를 모른다고 고백할 때, 나는 어쩔 수 없이 제 부끄러움을 들춰내고 싶어진다. 내가 기억하는 나의 첫 도둑질은 이웃집에서 또래 언니의 플라스틱 팔지를 내 손목에 끼워온 것이었는데, 아직도 그 조악한 색감과 차가운 물성을 잊을 수가 없다. 그때의 불안함과 수치심마저도 전혀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 이후에 나는 그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의 크고 많은 잘못을 저질렀을 것이고, 쉽게 잊었을 것이다. 부끄러움은 자신을 속이지 않는 순간에만 오기 때문이다. 자신의 추문을 들춰내는 하찮고 쓸모없는 시간만이 나 자신마저도 나를 억압하지 않는 유일한 순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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