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칼럼리스트] 침묵하는 나에게
[나도 칼럼리스트] 침묵하는 나에게
  • 조규정 석사과정(정치외교학과)
  • 승인 2015.11.30 19: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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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쓰는 휴대폰 메신저 어플리케이션에는 고향 친구들과의 단체 채팅방이 있다. A중공업 하청업체에 다니는 친구는 월급지급일이 넘어서도 아직 돈을 받지 못하고 있다. 원청업체에서 지급을 미루니 하청업체도 달리 방법이 없는 것이다. 친구는 별다른 불만을 얘기하지는 않았다. 그저 기업의 경영악화와 경제상황을 걱정했다. 본인이 돈을 받을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상황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 듯했다. 나로서는 당연히 물어볼 수 없었고 친구는 다소 낙관적으로 보았다. 결코 누구를 비난하지는 않았다. 다른 친구들도 마찬가지이다. 회사생활의 어려움, 고생스러움을 토로하기는 하지만 무엇을 비난하거나 비판하지 않는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인간의 조건』에서 말 그대로 인간의 조건으로서 노동, 작업, 행위 세 가지를 언급하고 있다. 생존을 위한 노동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작업보다 행위-공동체에 속해 정치적 행위를 하는 것이 진정한 인간의 자유를 위한 조건이라는 것-를 강조한다. 아렌트가 보기에 내 친구들은 노동과 작업만을 할 뿐이다. 딱히 정치적 행위는 없다. 당장 친구들에게 펼쳐진 현실은 돈을 모으고 집을 구해 결혼을 하는 것이다. 쥐꼬리만한 월급에 이직을 생각하기도 한다. 요즘 여러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유행하는 ‘노오오오력’(사회에서 성공을 위해서는 노력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사람들을 비꼬는 말)이 부족한 탓일까? 친구들에게 자신들이 처한 상황의 비극은 너희 탓이 아니라 ‘신자유주의를 비롯해 여러 이유로 만들어진 구조 때문이다’라고 내가 아는 얄팍한 지식을 모두 모아 설명해야 할까? 설명할 수 있을까? 설명이 되기는 할까? 그래서 납득할 수 있을까? 아렌트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지만 나는 내 친구들에게 ‘정치적 행위를 해라’, ‘목소리를 내라’고 말할 수 없다. 그것은 훈계일 뿐이다. 그들을 어떻게 설득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현실 ‘정치’와 학문으로서의 ‘정치학’은 다르다. 이론과 현실은 다를 것이다. 나는 이론 속에 머물고 친구들은 현실 속에 살고 있다.

 나는 스스로에게 무엇을 위해 ‘정치학’을 공부하는지 묻고는 했다. 누군가 “IT가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나는 ‘정치가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 내가 누군가의 노력을 평가할 자격은 없다. 그에 관해 얘기한다는 것 자체가 우습다. 다만 우리가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그래야할 의무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IT든 정치든 요리든 그 무엇으로도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 거기에는 ‘먹고 사는 것’도 당연히 포함될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는 것이다. 더 나은 세상이 좋은 것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 그러나 자신이 생각하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행위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진흙탕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더 이상 밥벌이의 고통스러움만을 호소하지는 않을 것이다.

 결국 나는 동조하고 공감할 수는 있어도 누군가를 비판하지는 못한다. 이 글은 날이 서 있지 않다. 명확한 현실 분석도 날카로운 비판도 아니다. 개인의 바람이다. 나는 살아갈 뿐인 것에 대해, 오직 생존만을 생각하는 것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기로 했다. 최근에서야 들깨의 잎이 깻잎이라는 것을 알았다. 내 주변의 일상적인 것들을 모르고 살아왔다. 사는 데 지장은 없을 것이다. 그래도 더 이상 부끄럽지 않다. 나는 ‘염치’ 두 글자를 품을 것이다. 부끄러운 글을 썼기에 부끄러움을 알기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누구도 비판하지 않는 친구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나에 대해 언젠가 답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당신에게도 바치는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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