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주 교수의 따뜻한 시 읽기] 푸른 곰팡이
[김문주 교수의 따뜻한 시 읽기] 푸른 곰팡이
  • 김문주 교수(국어국문)
  • 승인 2015.11.16 21: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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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산책은 우체국에 있었습니다
나에게서 그대에게로 편지는
사나흘을 혼자서 걸어가곤 했지요
그건 발효의 시간이었댔습니다
가는 편지와 받아볼 편지는
우리들 사이에 푸른 강을 흐르게 했고요
그대가 가고 난 뒤
나는, 우리가 잃어버린 소중한 것 가운데
하나가 우체국이었음을 알았습니다
우체통을 굳이 빨간색으로 칠한 까닭도
그때 알았습니다, 사람들에게
경고를 하기 위한 것이겠지요

-이문재, 「푸른 곰팡이
(『산책시편』, 2007) 전문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주세요∼”이렇게 시작하는 노래가 있지요. 편지지에 직접 글을 쓰고 우표를 붙인 편지를 보낸 지가 얼마나 되었나요? 편지를 쓰고 받는 일이 지난 시대의 유물처럼 아득한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수도 없이 울려대는 ‘까,톡,까,톡’이 편지를 대신하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말이 떠오르면 별 생각 없이 SNS에 바로바로 올리고 그것이 실시간으로 전달되는 즉시응답의 시대를 살고 있지요. 그리 멀지 않은 편지를 쓰던 시절, 사람들은 오래 생각하면서 글을 지웠다 썼다 하며 편지를 썼지요. 쓰는 일만이겠어요. 편지가 도착하는 2∼3일, 그리고 상대가 편지를 읽고 답장이 돌아오는 3∼4일 동안, 적어도 일주일을 ‘그대’를 생각하며 보냈지요. 그렇게 궁싯거리는 시간이 사람들 사이를 저 푸른 강물처럼 출렁이게 했지요. 그건 시인의 말대로 사람 사이를, 그리고 우리네 삶을 풍성하고 깊이 있게 만든 발효의 시간이었습니다. 곰팡이가 발효의 주역이고 그 발효 과정이 음식을 그윽하게 만드는 것이라면, 사람들 사이에도 ‘발효의 시간’이 필요하겠지요. 얼마 남지 않은 가을, 당신도 썼다 지웠다 하며 마무리한 편지를 그 누군가에게 써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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