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뎌진다는 것은 퇴보한다는 것
무뎌진다는 것은 퇴보한다는 것
  • 이은혜(영어영문4)
  • 승인 2015.11.16 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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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부인과처럼 다 벌려’. 이 입에 담기 꺼림칙한 문장은 힙합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출연한 송민호가 직접 쓴 랩 가사다. 방송 후 이것이 여성 혐오라는 거센 비난이 이어졌고, 그는 결국 공식적으로 사과하게 되었다.

 여성 혐오는 어떤 사람들이 자행하는 것일까? ‘페미니스트가 싫다’며 IS에 합류한 김 군과 같은 소수의 이야기일까? 물론 그런 경우도 있지만, 대다수의 평범한 시민들에게도 이는 너무나 깊이 각인되어 있다. 과거 방송에서 어머니께 뽀뽀를 하고 쑥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이던 송민호도 그런 사람 중 하나다. 자신의 가사가 방송에 나가면 문제가 될 것이라고 예상하지도 못했다는 것은, 여성 혐오가 일종의 유희 거리가 되어버린 지금의 현실을 반영하는 듯하다. SNS에서 많은 추천을 받은 게시물에는 으레 ‘김치녀’라는 키워드가 붙어있고, 인기 있는 남자 아이돌 그룹의 노래에도 ‘명품백을 쥐기보다는 내 손을 잡아주는…그런 너’라는 가사가 떡하니 보인다.

 어릴 적부터 이런 혐오를 자연스레 습득한 사람들은 범죄를 보고도 웃게 된다. 오래전 여자 연예인들의 ‘사적인 생활을 담은’ 동영상이 그녀들의 자의와 상관없이 인터넷에 유포된 적이 몇 번 있었는데,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그것을 다운로드 받아 보고 즐기기 바빴다. 동영상 유포의 ‘피해자’들이 오히려 기자회견에 나와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다’고 눈물로 사죄해야 했다. 동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들의 소식을 담은 기사가 포털사이트에 게시되면, 아직도 누군가는 당시의 사건을 언급하며 조롱하는 댓글을 단다. 자명한 폭력임에도 불구하고, 댓글의 추천 수는 조용히 올라간다.

 이는 유명 연예인들에게만 해당하는 사례가 아니다. 갈수록 다양해지는 몰래카메라 촬영 수법으로 인해 그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닌 현재, 여성들의 사생활이 장소를 가리지 않고 찍혀 인터넷에 유포되고 있다. 그것을 보고 즐기는 이들은 ‘그러게 네 몸은 네가 조심했어야지’라고 말하며 일말의 죄책감마저 깨끗이 씻어낸다. 미국의 영화배우 제니퍼 로렌스는 자신의 나체 사진이 유출되었을 때 ‘이것은 끔찍한 성폭력이다. 내가 사과할 이유가 없다’고 밝혀 주목을 받았다. 그녀의 발언이 당연한 것이라고 사람들이 생각했다면, 화제가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어떤 교육도,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는 목소리를 들을 기회도 없었기에 많은 여성들은 자신의 권리를 인식하지 못한다. 여성들이 어릴 적부터 부모에게, 어른들에게 들었던 말은 ‘조신하게 행동해라’가 전부였다. 그 약한 기반 위로 폭력과 혐오는 파도처럼 덮쳐왔고, 자존감은 쉽게 무너져 내렸다. 여성들은 자신을 ‘명품 가방에 환장한 부류’로 만든 일반화의 오류를 수긍하게 되고, 혼전순결을 지키지 못하면 문란한 여자, 혼전순결을 지키면 별난 여자라는 잣대마저 참아 낸다. 오히려 남성들의 여성 혐오에 동조하며 함께 웃기도 한다.

 이런 시대 속을 살아가는 내게 여성이라는 성별은 핸디캡이자, 내세울 수 없는 스펙이 되어버렸다. 범죄나 악행이 아닌 재미이자 상식으로 인식되는 여성 혐오가 너무나 무섭다. 우리는 언제까지 이런 일들을 당연하게 여겨야 할까? 무뎌지고, 침묵하는 사이 인간이 그간 쌓아올린 인권과 평등의 탑은 허물어져 가고 있다. 이 칼럼을 마무리 짓는 지금도 누리꾼들은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리며 운전에 미숙한 어떤 ‘김여사’를 조롱하고 있다. 그 혐오와 차별이 모두에게 어떤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지도 모른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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