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주 교수의 따뜻한 시 읽기] 악기점
[김문주 교수의 따뜻한 시 읽기] 악기점
  • 김문주 교수(국어국문)
  • 승인 2015.10.12 17: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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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은, 차마 그곳에 있을 수 없어
아득히 먼 곳으로 떠났다

나무는, 차마 아득히 먼 곳으로
떠날 수 없어서 그 자리에 붙박였다
배한봉, 「大悲
(『악기점』, 2004) 전문


 가을이 깊어지면 산은 자기 품 안의 물을 밖으로 내놓는다고 하지요. 그래서 가을 골짜기에는 물이 많습니다. 겨울을 나기 위한 고육지책(苦肉之策)이겠지요. 이 물을 추수(秋水)라고 합니다. 몸 바깥으로 물을 밀어내놓고 바짝바짝 말라가는 산의 만감(萬感)이, 가을 산이 펼쳐 보이는 단풍의 풍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추운 겨울에 몸에 물을 간직하고 있으면 쉽게 동상(凍傷)이 들겠지요. 우리 대학 교정의 나무들도 이제, 서서히 제 안의 물들과 이별을 시작할 것입니다. 아, 저 나무와 물들의 이별, 그 이별의 풍경 앞에 놓인 저 “차마”라는 말, 눈부시게 푸른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고, 떨어지지 않는 마음의 발에 고개를 주억거리며, 글썽거리는 눈에 연인의 모습을 한가득 담는, 저 물끄러미의 광경. 가을은 참으로 ‘차마’의 계절입니다. 이제 우리 눈앞에 펼쳐질 단풍은, 저 가을 나무들이 치르는 큰 슬픔[大悲]의 제의입니다. ‘차마’에 담긴 수많은 말들, 형언할 수 없는 만감(萬感)이, 슬픔의 성찬(盛饌)으로, 찬란한 풍경으로 우리 앞에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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