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주가 본 홍건적의 난, 그리고 정치의 비극
정몽주가 본 홍건적의 난, 그리고 정치의 비극
  • 김영수 교수(정치외교학과)
  • 승인 2015.09.30 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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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호에도 글을 싣게 되어 양해의 말씀을 드린다. 글을 약속한 분에게 잇달아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겼다. 이번 글은 공민왕 10년(1361) 제2차 홍건적의 난 때 있었던 비극적 사건에 관한 이야기이다.

 홍건적은 원나라 말인 1355년 봉기한 한족 농민반란군이다. 명태조 주원장도 홍건적 일파로 일어나 1367년 명을 건국했다. 홍건적은 하북성에서 봉기하여 북벌을 개시했다. 하지만 원나라 군대의 반격에 밀려 요동까지 후퇴했다가 두 차례 고려를 침략했다. 제1차 침입은 공민왕 8년(1359) 12월에 발생하여 西京(평양)까지 함락 당했지만, 이듬해 2월 홍건적을 축출하고 서경을 회복했다. 공민왕 10년 9월, 홍건적 10만여 명이 재차 침입했다. 전쟁이 시작되고 나서야 고려 정부는 자비령에 요새를 쌓았다. 하지만 자비령 요새가 함락되고 개성조차 위험해지자, 공민왕은 안동으로 피신했다. 버려진 백성들은 늙은이와 어린아이가 자빠지고 엎어졌으며, 자식과 어미가 서로 버리고 밟고 쓰러져 들에 차고, 우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고 한다.

 하지만 안동에 도착한 공민왕은 측근 정세운을 총사령관에 임명하여 일체의 지휘권을 위임했다. 공민왕 11년 1월, 정세운은 군사 20만으로 개경을 포위하여, 홍건적 10여만 명을 죽이고 나머지 10여만 명을 축출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하지만 더 큰 비극은 전쟁 뒤에 왔다. 대승을 거둔 나흘 뒤, 안우, 김득배, 이방실이 총병관 정세운을 죽였다. 그들은 왕의 명령서에 따랐을 뿐이었고, 명령서는 왕의 측근 김용(金鏞)이 조작한 것이었다. 김용은, “평소에 정세운과 은총을 다투었는데, 또 안우, 김득배, 이방실 등이 큰 공을 세워 임금의 중하게 여기게 될까 염려하여, 안우 등에게 정세운을 죽이게 하고, 이것을 빌미로 다 죽이고자 하여, 이에 거짓 왕명으로 글을 만들”었다고 한다. 김용은 정세운에 앞서 총병관이 되었으나 개경을 방어하지 못했다. 정세운이 그를 대신하여 대전공을 세우자, 김용은 패전 책임에 대한 추궁을 염려했던 것이다.

 김용은 조카 김임을 시켜 비밀리 안우에게 왕의 거짓 명령을 전했다. 또 “정세운이 평소에 그대를 시기하였으니, 적을 파한 뒤에는 반드시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 어찌 먼저 도모하지 않겠는가”라는 자신의 말을 전하였다. 서신을 읽은 안우는 “지금 정세운이 적을 겁내어 나아가지 않고, 김용의 글도 이와 같으니, 좇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안우의 말에서 주목되는 점은 첫째, 정세운이 적을 겁내 나아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정세운은 개성 공격시 지금의 파주인 도솔원(兜率院)에 주둔하여 공격에 참가하지 않았다. 개경 수복에 참여했던 장군들에게 이는 비겁한 행동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이런 점이 야전지휘관들, 특히 안우의 심사를 불편하게 한 듯하다. 김용은 그런 분열의 요소를 자극했다. 두 번째 점은 안우가 김용의 충고에 동조했다는 것이다. 정세운을 죽이는 일은 왕명에 대한 복종이자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서도 불가결한 일이라고 본 것이다. 장군 이방실은 이에 동의했다. 그러나 김득배는 이에 반대하고, 부득이하면 정세운을 체포하여 왕에게 보내 처리하자고 주장했다. 그것은 가장 훌륭한 방안이었지만, 안우의 강요에 끝까지 저항하지는 못했다.

 정세운이 죽은 4일 뒤 장군 목충이 정세운의 죽음을 알렸다. 왕명이 아니라면 이것은 반란을 뜻했다. 정세운은 왕을 대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군대는 여전히 장군들의 손에 있었다. 공민왕은 반란을 우려하여 사면령을 발표하고 모든 장군들에게 행재소로 오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안우 등은 한 달여 동안 행재소에 출두하지 않았다. 공민왕의 뜻을 확신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정세운을 죽이라는 명령이 왕명이 아님을 이미 알고 있었을까?

 2월이 되자 왕은 기다리지 않고 안동을 출발해 상경하기 시작했다. 안우 등이 반란을 생각했다면, 좋은 공격 기회였다. 그러나 왕이 군사적 공격을 시도하지 않으리라는 것이 확실해졌기 때문에 안우 등은 안심했다. 안우는 마침내 왕을 알현하기 위해 행재소로 갔다. 그는 반란 대신 왕에 대한 호소를 택했던 것이다. 그러나 中門에 이르자 문지기가 그를 죽였다. 그는 죽기 전 세 번이나 주머니를 들어, “조금만 늦추어 주시오. 원컨대 임금 앞에 나아가 주머니 속의 글을 드리고 죽겠소”라고 소리쳤다. 주머니 속에는 김용의 서신이 들어 있었다. 그런데 이방실과 김득배는 함께 오지 않았다. 그들은 왕을 믿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이방실은 용궁현에서, 김득배는 상주에서 사로잡혀 처형당했다. 김용은 김임을 죽여 증인을 없앴다. 김용은 전혀 처벌되지 않았다.

 그런데 정세운이 죽었을 때, 문하시중 홍언박은 “摠兵(정세운)이 출군할 때에 말과 용모가 심히 거만하였으니 그 화를 당함이 마땅하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정세운은 김용의 음모로 죽은 것이 아니라, 고려정부의 합의사항이었던 것일까? 사실 정세운의 승전보고서는 공민왕의 위대함을 찬양하면서도, 자신의 공로에 대한 자부심 역시 지나칠 정도로 강조되어 있다. 그는 “천하가 제압하지 못한 것을 제압하고, 一世에 능히 죽이지 못한 것을 죽였다”고 스스로의 전공을 찬양하고, 자신을 제갈공명과 중국의 전설적인 명장들에 비유하고 있다. 더구나 그는 도당을 호령했었다. 요컨대 정세운의 처형은 김용 개인의 음모만이 아니라 정부의 공감대 위에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렇다면 안우, 이방실, 김득배의 처형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왕과 정부대신들은 그들의 무고함을 몰랐던 것인가? 안우는 왕에게 보낸 서신에서 충분히 자기를 변명했다. 왕과 대신들 역시 그 상황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더구나 안우 등은 파국적인 전쟁으로부터 국가를 구한 애국자들이었다. 그러나 정부대신들 중 누구도 이들의 처형을 저지하려고 하지도 않았고, 애도하지도 않았으며, 김용을 탄핵하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그들의 죽음은 정치적 필요성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안우를 처형한 후, 김용은 홍언박, 유탁, 염제신 등과 함께 왕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이는 안우의 처형이 김용 개인의 음모가 아니라 고려정부의 공식적 합의에 의한 것임을 의미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어떠한 정치적 필요성으로부터 이 비극적이고 부도덕한 일이 발생하게 되었는가? 안우를 죽인 뒤 김용은, “안우 등이 함부로 主將을 죽였으니 이는 전하를 생각에 두지 않은 것이다. 죄를 가히 용서하지 못할 것”이라고 왕에게 말했다. “전하를 생각에 두지 않았다”는 이 어구야말로, 이 사건의 모든 배후를 설명해주는 키워드였다. 그것은 당시 공민왕의 가장 깊숙한 심중을 꿰뚫은 말이었다. 전쟁으로 인해, 특히 개경을 포기함으로써 왕은 정치적 정통성과 위신에 중대한 손상을 입었다. 守侍中 이암은 “임금과 신하가 서울을 떠나니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고 삼한의 수치가 되었”다고 말했다. 또한 判密直事 宋卿 역시 “주상께서 도망하여 천하의 웃음을 샀”다고 말했다. 왕 또한 정치적 책임을 통감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왕의 위신이 가장 떨어진 시점에 모든 군대의 지휘권은 장군들의 손에 있었다. 왕이 깊은 위기의식을 느꼈을 것이다. 안우, 김득배, 이방실을 처형하고 내린 교서의 핵심 사항은 그들이 왕을 무시했다는 것이었다. “적을 격파한 공은 한 때 혹 있을 수 있는 바이지만, 임금을 무시한 죄는 만세에 용납되지 못할 바이다.”

 이 사건의 본질은 권력 문제였다. 공민왕은 왕권을 지키기 위해 정세운 등을 죽였다. 그러나 처형 명분이 없었던 공민왕은 김용과 정세운의 분열을 이용했던 것이다. 김용 또한 왕명을 이용하여 자신의 라이벌을 제거했다. 그러나 김용은 공공연히 왕명을 참칭할 수 없었으므로, 이 사건을 마치 정세운과 나머지 장군들의 내분처럼 위장시켜 일시에 제거하고자 했다. 그도 정세운과 안우 사이의 분열을 이용했던 것이다. 그리고 정세운을 경계했던 정부 대신들은 이 사건을 관망하고 묵인했다.

 이처럼 장군들의 군사적 승리는 정치적 위협이 되지 않는 한도 내에서만 찬양 받는다. 그것이 정치이다. 홍언박 등 당대의 유수한 정치가들은 장군들의 살해를 불가피한 일로, 혹은 자연스런 일로 받아들였다. 공민왕 역시 그랬다. 하지만 백성들 이들의 죽음을 슬퍼했다. 10여세 남짓한 이방실과 안우의 아들이 거리에서 놀자, 백성들이 음식을 먹이면서 “이제 우리들이 편하게 먹고 잘 수 있는 것은 모두 元帥의 공”이라 하고 눈물을 흘렸다. 정도전은 정세운이 개성 동문밖에 심은 버드나무를 보면서, 이런 시를 썼다. “성을 나와 남쪽 바라보니 갈 길은 멀고 먼데, 동풍 불어 때는 바로 이월 초순. 뉘라서 도성문에 버들을 심었느냐, 해마다 버들솜 날아 사람의 슬픔을 더해주네.”(「出城」)

 이 사건을 역사의 보편적 문제와 결부시켜 이해했던 사람은 정몽주였다. 김득배와 정몽주는 ‘좌주-문생’ 관계였다. 김득배는 원래 과거에 급제한 문신으로, 공민왕 9년에 과거시험관이 되어 정몽주를 뽑았다. 당시 습속에 ‘좌주-문생’ 관계는 부자처럼 인식되었고, 평생 유지되는 중요한 정치적‧윤리적 관계였다. 김득배가 죽자 直翰林 정몽주는 왕에게 청하여, 시체를 거두고 글을 지어 제사를 지냈다. 제문은 이렇다: “아아 황천이여! 나의 죄가 무엇이며, 아아 황천이여! 이 사람은 누구입니까? 대개 듣건대 선인에게 복을 주고 악인에게 화를 내림은 하늘이요, 선인을 상주고 악인을 벌함은 사람이라 하였습니다. 하늘과 사람이 비록 다르다 하나 그 이치는 하나인즉, 옛 사람이 말하기를 하늘이 정하면 사람을 이기고, 사람이 많으면 하늘을 이긴다 하였으나, 하늘이 정하면 사람을 이김은 과연 무슨 이치며, 사람이 많으면 하늘을 이긴다 함은 또한 무슨 이치입니까? 지난날 홍건적이 침입하여 임금이 서울을 떠나시니, 국가의 운명이 한 가닥 실 끝에 달린 것처럼 위태롭거늘, 오직 공이 먼저 大義를 선창하자 원근이 향응하였고, 몸소 만 번 죽을 계책을 내어 능히 삼한의 대업을 회복하였으니, 무릇 이제 사람이 이 땅에서 먹고 이 땅에서 잠자는 것이 그 누구의 공입니까? 비록 그 죄가 있더라도 공으로써 덮는 것이 옳을 것이요, 죄가 공보다 무겁더라도 반드시 그 죄를 자복시킨 뒤에 베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말의 땀이 마르지 않고 개선하는 노래가 끝나지 않았는데, 어떻게 태산같은 공을 오히려 칼날의 피가 되게 하는 것입니까? 이것이 내가 피눈물로써 하늘에 묻는 바입니다. 나는 그 忠魂과 壯魄이 천추만세에 반드시 九泉의 아래서 울음을 머금을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아, 命이로구나! 어찌하리오, 어찌하리오!”󰡔高麗史󰡕 列傳 26, 安祐傳)

 이 글에는 단순한 슬픔 이상으로 당대 고려의 정신이 직면한 분열과 위기가 격렬하게 표현되어 있다. 정몽주는 하늘과 인간의 관계를 묻고 있다. 하늘은 인간과 만물을 낳았으니, 인간과 하늘은 하나가 아닌가? 그런데 역사의 이 비극들은 어찌된 것인가? 과연 하늘은 존재하는가? 정몽주는 그 혼란을 ‘命’으로 해소하려고 한다. 그것은 알 수 없고 어쩔 수 없는 운명이란 뜻이다. 우리는 이 모든 역사의 불합리에 대해, 그리고 이 혼란에 대해 체념해야 한다. 우리는 단지 이 역사를 묵묵히 견디며 살아갈 뿐이다. 하늘은 세계를 선하게 창조하였지만, 다만 하나의 가능성으로만 남겨두었다. 이 세계에서 인간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는, 이 분열의 크레바스이다. 정몽주의 제문은 그 점에 대한 비통한 고백이다.

 정몽주의 절규는 동시에 ‘정치’에 대한 절망을 담고 있다. 제문은 정치적 도덕성에 대한 근본적이고 격렬한 항의였다. 그러나 그는 이런 정치적 비극에 대해 답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는 공민왕이 느꼈을 정치의 비극적 의미를 깨닫고 있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공민왕의 입장에 따른다면, 장군들의 죽음은 국가의 안전을 위한 불가피한 요청이었다. 그것은 비록 홍건적의 침입과 같은 전쟁은 아니었지만, 장군들의 반란 또한 또 하나의 전쟁이다. 내전 역시 동일한 참극을 초래한다. 그런데 정몽주는 외부에 대한 전쟁과 내부의 평화라는 두 개의 정치세계를 상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 관습적인 경계를 고려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정치를 본다면, 정치는 어느 곳에서나 평화와 전쟁의 경계에 놓여 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장군들의 애국적인 위업과 반역이 동시에 나타났기 때문에, 그 통렬한 분열로 인해 정몽주처럼 인간성과 역사의 정의에 민감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좌절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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