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대신문 역사의 산 증인들]내 지난 날의 자화상, 영대신문
[영대신문 역사의 산 증인들]내 지난 날의 자화상, 영대신문
  • 편집국
  • 승인 2007.04.16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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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기 문화부장, 한국교문사 편집장, 철학과 94학번)
후배에게 영대신문이 1500호를 맞이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감회가 남달랐다. 벌써 그렇게 되었구나! 1300호 때가 언제였지? 내가 대학교 2학년 때니까 1995년. 2000년대인 지금 이 시점에서 1990년대의 사람이 이야기를 하자니, 왠지 촌스런 추억을 헤아리는 건 아닌지 실례가 되기도 하지만. 문득 나는 내가 만들었던 그때의 영대신문을 읽어보고 싶었다.
내 이십대 초반을 통째로 바친 내 젊은 날의 추억, ‘영대신문’.
지나간 영대신문을 한 장 한 장 넘기다 보니 그때의 일들이 하나둘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영대신문의 제호가 지금의 한글제호로 바뀌었던 94년 4월, 그 달은 내가 영대에 발을 처음 디디고 열심히 발바리처럼 돌아다니던 달이다. 견습기자였던 그해 5월, 한총련 2기 출범식이 열리던 광주 조선대에서는 내 생애 처음으로 추운 강의실 시멘트 바닥에 종이상자를 깔고 신문지를 이불 삼아 숙박을 해결하는 짜릿한 경험을 하기도 했었다. 견습기자 때부터 각자의 출입처를 돌며 1면의 1단 기사를 발굴하러 다녔고, 총학 출범식이나 대동제 때면 지금도 그렇겠지만, 학내 곳곳에 숨어있는 낙수꺼리를 찾으러 발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보이는 것마다 나의 낙수꺼리요, 1단 기사 감이었다. 그때는 신문 발행이 수요일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거의 월요일부터 인간의 몰골이 아니었다. 기사를 쓰다 지치면 편집국의 넓은 책상 위에서 새우잠을 자기 위해 일찌감치 자신의 자리를 맡아두기 다반사였는데. 자료실 바닥에 야외용 매트를 펴서 눈을 부치기도 했던 우리들이 어느새 모두 어엿한 사회인으로 자신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을 보면, 한편으론 대견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가슴이 짠해온다. 그때 우리는 민족을 외치고, 평화를 외치고, 사랑을 외치는 순수한 영혼들이었다.
학내 사안을 현실적으로 꿰뚫던 대학부, 학생운동에 대한 사안은 물론이고 빈민촌 등 사회 전반에 걸친 문제를 논하던 사회부, 대중문화와 대학문화의 관련성을 다뤘던 문화부 등. 학생들에게 보다 더 많이 읽히는 신문, 친구처럼 가까이 둘 수 있는 신문으로 만들고자 기자 스스로가 직접 기획하고, 편집하고, 제작까지 도맡아왔었다.
우리가 긴박하게 준비했던 1300호 신문. 백두산 문화기행 특집기사를 위해 취재단을 꾸려 중국으로 향했을 때의 그 설렘과 북한 동포를 두만강에서 만났을 때의 그 두근거림은 아직도 내 뇌리 속에 생생한데, 벌써 1500호를 맞았다니…. 내 가슴은 주책없이 왜 이리 쿵쾅쿵쾅 방망이질 치는지 원. 함께 했던 선배들과 후배들이 너무나 자랑스러울 따름이다. 그 찬란한 역사를 함께 하였음에 감사할 따름이다.
항상 새롭게 도전하고 발전하는 영대신문, “대학인의 양심을 적극 대변하는” 발로 뛰는 적극적인 신문사 후배들을 기대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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