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훈의 ‘체질적 불온함’] 너, 나, 우리의 희망을 위하여
[이시훈의 ‘체질적 불온함’] 너, 나, 우리의 희망을 위하여
  • 이시훈(정치외교학 박사 1기)
  • 승인 2014.12.04 21: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997년의 IMF 외환위기는 한국사회의 근간을 뒤흔드는 새로운 ‘사건’이었다. ‘사건’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노동 전반에 충격을 주었듯이 대학사회 역시 ‘사건’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미 1996년 8월 연세대에서 있었던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과 김영삼 정부의 충돌로 대학사회는 큰 상처를 입었던 터였고, 경제위기로 인해 당장의 생계는 물론 일자리 문제가 들이닥치자 대학사회는 끝없는 붕괴를 맞이한다. 과거 전대협, 한총련, 한 대련으로 이어지는 전통적인 의미의 학생운동은 더 이상 대학사회에 영향력을 끼치지 못한 채 소멸했지만 학생운동의 빈자리를 메울 어떤 대학생과 청년들의 결집된 활동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개인의 경제적 조건이 위협받고, 신자유주의가 고도화 되며 학생운동마저 소멸한 대학에서 이전시기와 같은 집단적 열정을 찾기란 불가능했다. 오히려 이 공간은 각자도생과 서로에 대한 불신과 경쟁의식, 그리고 그것들이 만든 고요함만이 가득하다.

 대학사회의 쇠락이 낳은 효과는 아주 긴 시간에 걸쳐서 나타난다. 특히 대학생들이 한국 사회에 끼치는 영향력이란 측면에서 1997년을 전후한 몇 년 사이에 과거의 영향력 대부분을 상실했다. 물론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의 당선에 청년층의 강한 지지가 있었다고 하지만 이 청년들의 정체성은 대학생이 아니라 청년 네티즌의 정체성에 더 가까웠다. 그 결과 청년, 대학생이 처한 현실 개선의 요구가 제도 정치의 공간에서 소외되고 투영되지 않게 되었다. 예컨대 2001년 본교 문과대 등록금은 180만원을 다소 상회했다. 그러나 이것이 100만원이 오르는데 걸린 시간은 불과 6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 살인적인 등록금 문제를 국가와 정치권이 먼저 인지하고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였던가? 아니다. 가파르던 등록금 인상곡선이 둔화된 가장 큰 이유는 노무현 정부 말기부터 본격화된 대학생들의 조직화된 등록금 인상 반대 운동이었다.

 현재의 20대들은 노인세대와 더불어 한국사회에서 가장 불행한 삶의 조건을 지닌 세대다. 그들은 그 어느 세대보다 높은 교육비용을 감수했고, 대학을 졸업한다 해도 그들이 안정적으로 노동시장에 진출한다는 보장은 없다. 절대 다수의 경우 더 안정적인 일자리, 요컨대 공무원이나 대기업 정규직을 위해 과거 입시 준비보다 더 가혹한 경쟁과 출혈을 감내해야한다. 설사 그렇게 노동시장에 들어선다 하더라도 직장의 지속성과 노동강도는 여전히 그들에게 안온한 삶을 멀게만 느끼게 하고 있으며, 기형적인 부동산 시장은 그들에게 따뜻한 집 한 채 마련의 꿈을 일생일대의 목표가 되게 만들었다.

 우리는 이런 20대, 대학생, 청년들의 일반적 문제를 그동안 철저히 개인의 문제로 여겨왔다. 일반적으로 함께 공유하는 문제를 공통의 문제로 풀어갈 수 있는 대학사회의 부재가 절실한 지점이다. 물론 대학사회의 쇠락을 ‘문제의 개인화’의 전적인 원인이라고 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사실 ‘문제의 개인화’에는 자기계발서와 기성언론이 유포한 허위적인 이데올로기와 기성세대가 지닌 낡은 사고의 책임이 크다. 하지만 만약 대학사회가 조금 더 온존했다면 ‘문제의 개인화’라는 경향을 넘어 ‘문제’가 지닌 구조적 성격, 공통적 성격을 더 충분히 규명하고 문제 해결을 위한 목소리가 가능하지 않았을까? 만약 문제가 공통적이고 구조적이라면 그 문제의 해결은 당사자들이 집단적으로 뭉칠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는 것을 우린 이미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연대는 약자들이 강자에게 자신들의 이해와 요구를 관철하는 가장 강한 무기이다. 그리고 좋은 사회를 구성하는 가장 기초적인 원리이기도 하다. 하지만 대학사회의 현실에서 유감스럽게 이 자명한 명제는 힘을 얻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린 이 연대의 가능성, 사회의 가능성을 포기할 수 없다. 우리가 공통적으로 처해있는 구조적 문제에 대해 그것이 온전히 나만의 문제, 나만의 고통이 아님을, 나와 다르지 않은 내 옆 사람들 역시 같은 문제와 고통에 직면함을 깨닫고 연대할때만이 대학사회의 복원이 가능하며, 대학사회가 내적으로 공론의 장으로, 외적으론 강한 정치력이 발산되는 공간으로 작동 할 수 있다. 만약 연대와 대학사회의 복원이 이뤄지지 않은 채 ‘문제의 개인화’가 지속적으로 견지되고 그 개인들 사이에서 문제 해결을 위한 답 없는 치킨게임이 이어질 때 한국사회 미래 세대에게 희망이란 것은 요원한 일이 될 것이다.

 2014년 2학기 총 6차례의 칼럼 기고를 이번 원고를 통해 마무리한다. 그간 6번의 기고 중 대학의 이념, 대학의 문화, 대학 언론에 이어 대학 사회까지 가장 많은 지면을 대학의 문제에 할애했다. 신자유주의 아래에서 대학은 더 이상 ‘좋은 국가’, ‘훌륭한 시민’을 만드는 기능을 잃고 기업의 인적 육성 기관으로 전락해버렸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대학은 한국 사회에서 사회적 계층 상승의 수단으로 욕망되고 있기도 하다. 어떻게 보면 현재 한국의 대학은 이 사회가 처한 여러 모순이 가장 분명히 드러나는 장일지 모른다. 그렇지만 아직 대학이 지닌 본래적 의미, 본래의 역할이 유효성을 지닌다면‘좋은 대학’을 모색하는 일은 비단 고답적이고 낡은 일은 아닐 것이다. ‘좋은 대학’을 고민하는 이들의 응답을 바라본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