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위해 쓰는 기사인가에 대해
누구를 위해 쓰는 기사인가에 대해
  • 이형선 편집국장
  • 승인 2014.07.05 20:4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시간은 쏜살과 같다고 했던가. 한 학기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캠퍼스를 수놓던 벚꽃들은 어느새 다시 한 번 돌아볼 기회조차 주지 않은 채로 피고 졌다. 편집국장의 자리에 앉은 지난 3개월 동안 이제 겨우 4번의 신문을 발행했을 뿐이지만, 데스크에 있다 보면 참 많은 것들을 느끼게 된다.
얼마 전, 본지의 기자가 지금의 총학생회에 불만을 품고 있는 취재원 중 한 명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고 한다.

 “영대신문은 ‘친 학생회’적인 신문이니까, 제대로 된 비판을 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워”
해당 기자로부터 이 말을 전해들은 필자는 굉장히 당황스러웠다. 영대신문에 실린 기사들 중 어떤 내용이 그 학생에게 이른바  ‘친 학생회’스러운 느낌이 들게 했을까. 항상 중립을 지켜야 하는 언론기관으로서 치욕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이후의 일이다. 최근까지 총학생회에 몸담고 있던 취재원 한 명이 역시 본지의 기자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영대신문이 왜 나를 싫어하는지 모르겠다”
 앞서 들었던 이야기가 필자를 당황시켰다면, 위와 같은 발언은 나를 황당하게 만들었다. 위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신문을 읽은 것은 아닐 텐데, 같은 신문을 읽고도 이렇듯 상반된  입장을 보이니 말이다. 우리는 교내 어떤 조직과도 사사로이 친해서는 안 되며 더군다나 악감정을 가진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이는 단순히 경계해야할 일인 것을 넘어 기자로서의 기본 자질에 대한 문제다.

 가끔은 이 같은 사실이 서글플 때도 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고 또한 마땅히 그래야만 하는 일이겠지만, 때로는 정말 ‘우리 편’인 사람들은 그 어디에도 없어 보인다. 정작 우리는 누군가를 좋아하거나 미워한 적이 없는데, 마치 ‘누가 누구를 좋아 한다더라’하는 식의 짝사랑과 관련된 오해를 받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래도 교내 언론으로서 최소한의 책무는 수행하고 있구나”라고 느끼기도 한다.  ‘우리 편’이 없다는 것은 영대신문이 교내 조직에 대한 견제와 감시의 역할을 어느 정도 수행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본다.

 흔히 “좋은 기자가 되려면 가족, 친구, 건강 셋만 버리면 된다”고 한다. 이는 기자라는 직업이 갖는 엄청난 양의 직무에 대해 풍자적으로 표현한 것이지만, 나는 이 말이 기자이기 때문에 직면하는 ‘외로움’이라는 감정에 대한 표현으로서 와 닿았다. 가장 가깝고 의지가 돼야 할 사람들조차 진정으로 가까울 수 없는 기자의 슬픈 운명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누구를 위해 기사를 쓰는가”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단순하고도 본질적인 물음이지만 학생 기자로서 많은 고민을 하게 했다. 2년이 넘게 기자 활동을 하면서도 깊게 고민해 본 적이 없었던 질문이다. 우리는 누구를 위해 기사를 쓰는가? 교직원을 위해, 일부 학생회를 위해, 또는 나 스스로를 위해서는 결코 아니다.

 스스로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그 누군가를 위해 기사를 쓰지 않는다. 다만 그 누군가를 포함한 모두를 위해 기사를 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