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기행]한평생 조국과 민족을 사랑했던 이상화
[문학기행]한평생 조국과 민족을 사랑했던 이상화
  • 문화부
  • 승인 2007.04.11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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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발자취를 따라서

 

평창에는 이효석 문학관이 있고, 안동에는 이육사 문학관, 가까운 왜관에는 구상 문학관이 있어 문학관으로서의 기능 뿐 아니라 지역의 특색 있는 관광지로도 손꼽히고 있다.
 이런 지역향토작가들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 또한 끊이질 않는다. 대구에도 우리 지역 출신의 많은 문인들이 있지만 아직까지도 지역민들의 관심과 문인들에 대한 기념사업은 턱없이 부족한 게 사실이다.


 지금은 남의 땅-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눈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중 략)
 그러나 지금은-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학창시절 교과서에 빠지지 않고 나오는 이 시는 이상화 시인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한 구절이다.
 그러나 ‘나의 침실로’, ‘역천(逆天)’ 등의 훌륭한 작품을 남기며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자리매김한 이상화 시인이 대구 태생임을 알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대구 수성구청에서는 올해부터 이상화 시인을 기념하는 ‘제 1회 상화문학제’를 개최했다.
 그리고 시비 제작과 함께 이 일대를 중구 계산동의 상화 고택과 달성공원의 상화시비, 달서구의 상화로 등을 연계한 문학관광벨트로 개발하는 등의 각종 기념사업을 전개할 계획이라 한다.
 이제는 이상화 시인과 같은 향토문인에 대한 지역민들의 보다 많은 관심이 필요한 시점에서 우리는 대구 곳곳에서 그의 흔적을 살펴볼 수 있었다.

나의 사랑 ‘마돈나’
달성공원에 세워진 이상화 시비
당시 10세의 상화 막내아들이 새긴 글
첫 번째 목적지는 상화의 시비가 세워진 달성공원이었다. 가을바람이라 하기에는 유난히 차가웠던 날, 금요일 오후라 한적한 공원에는 산책하러 나오신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많이 보였다. 드넓은 공원에서 시비를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설왕설래하는 사이, 저 멀리 자리 잡은 시비가 눈에 들어왔다.
 상화의 시비는 1948년 대구 달성공원에 세워진 것으로 국내 최초의 시비라는 큰 의미가 있다. 시비 앞면에는 <나의 침실로> 12연 중 11연이 새겨져 있다. 어째 글씨가 약간 삐뚤삐뚤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알고 보니 이는 당시 10세였던 상화의 막내아들 태희가 직접 썼다는 일화가 있다고 하는데, 그래도 어린애가 쓴 글씨치고는 꽤나 잘 쓴 글씨다.
 1920년대 상화의 초기 시들은 주로 감상과 낭만, 퇴폐와 병적 관능이 보이는데, 특히 <나의 침실로>에서는 오지 않는 애인 ‘마돈나’를 혼자 기다리는 마음을 여러 상징들을 동원해 신비롭고 관능적으로 표현하였다. 마돈나의 실제 모델이라 일컬어지는 인물은 이상화가 동경에서 유학할 당시 만났던 함흥 태생의 미녀 유보화이다. 그러나 그녀를 만난 지 2년도 채 되지 않아 유보화는 폐병으로 결국 상화의 무릎에 피를 토하며 눈을 감고 말았다.
 시의 한 구절 한 구절은 그녀에 대한 그의 애틋한 사랑으로 흠뻑 젖어있었고, 오랜 시간동안 홀로 그 자리를 지키는 시비의 모습은 사랑하는 그녀를 쓸쓸히 기다리는 이상화의 모습과 꼭 빼닮았다.

조국을 절대 빼앗길 순 없어!
달성군화원읍 본리리 뒷산의 상화부부 묘지(왼쪽이상화 묘)

 그의 후기 작품 활동은 어땠을까? 시비를 뒤로 하고 후기의 대표작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가 새겨진 수성못으로 발길을 돌렸다. 시비가 세워진 수성못과 그 주변의 들안길은 예전 수성들이라 불린 곳으로 이 시의 배경이 된 곳으로 추측된다. 시비의 앞면에는 이 시가 최초로 발표된 잡지 ‘개벽 70호’(1926년 6월호)에 있는 원문을 그대로 새겼으며, 뒷면에는 시인의 주요 생애와 건립 배경들이 설명돼 있다.
상화 묘역 입구의 송림숲

 그는 초기 시에 나타났던 퇴폐적이고 감상적인 취향에서 벗어나 후기에는 민족 현실에 대한 자각을 바탕으로 긍정적이고 미래 지향적인 자세를 보여 주기 시작한다.
 상화의 동경유학시절 관동대지진의 원인이 조선인의 탓이라는 유언비어가 퍼뜨려지자, 일본에서는 조선인을 학살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 사건으로 인해 상화의 가슴속에는 반일감정과 민족의식이 싹트게 되었다. 이후 그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와 같은 우리민족의 수난을 그려 낸 저항시를 발표해 처참한 민족적 현실을 직설적으로 고발하며 민족정신을 드높였다. 국토는 잠시 빼앗겼을 뿐 우리에게 민족혼을 불러일으킬 ‘봄(조국)’은 절대 빼앗길 수 없다는 의지와 애정이 담겨있다.

교남학교에서의 생활
 1933년 강사자격증을 취득한 상화는 1937년 이후 대구 대륜 중ㆍ고등학교의 전신인 교남학교에서 교사로 취임하여 4년간 무보수로 영어와 작문을 가르쳤다. 이 때 “나라를 빼앗긴 약소민족은 주먹이라도 굵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대구 최초로 권투부를 창설했다. 이는 오늘날 대구 권투 클럽의 모체가 된다.
 또한 교남학교의 교가도 작사했는데,

 태백산이 높솟고 낙동강 내다른 곳에
 오는 세기 앞잡이들 손에 손을 잡았다
 높은 내 이상 굳은 나의 의지로 나가자 나가 아 나가자

 이것이 문제가 되어 상화는 사직하게 되었고 교가 부르기는 한 때 중단되었다. 그러나 친일세력을 맹렬히 비난하며 그들에 대해 저항하고자 하는 그의 굳은 의지가 높이 평가되어 해방 후 지금까지도 교가는 불려지고 있다.

세상과 이별하다
 1940년, 그의 나이 40세에 학교를 그만두고 독서와 연구에 몰두하며 <춘향전>을 영역하고, <국문학사>, <불란서 시 평석> 등을 기획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43세에 위암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의 유해는 가족들과 함께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 뒷산에 묻히게 되었다. 해방만을 울부짖던 그의 작품 활동도 그의 죽음과 함께 영원히 끝이 난다.

상화의 마지막 보금자리


 상화가 태어난 서문로 12번지 일대의 생가는 개발로 흔적 없이 사라졌고, 그가 말년을 보냈던 계산동 상화 고택에만 상화의 체취가 유일하게 남아 있다. 그 주위에는 커다란 빌딩과 아파트 공사 현장 때문에 고택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시내 중심부에 위치한 까닭에 초고층의 건물이 계속 들어서고 있었고, 고택 입구에는 자동차가 제멋대로 세워져있었다. 뒤늦게나마 상화의 고택으로 밝혀진 덕택에 낡은 기와지붕의 건물은 보존을 위해 비워둔 상태였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시인의 집이라 웅장하고 화려할 것이라는 생각과 달리 비교적 아담하고 소박한 모습이
대구시 중구 계산동 2가의 상화고택 외관모습
었다. 나무들은 제각기 자라고 있었고, 낙엽은 지저분하게 쌓여져있어 오랫동안 손질하지 않은 정원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래도 이전에 살고 있던 집주인이 일체의 보수를 하지 않은 덕분에 현재까지 옛 모습 그대로 간직될 수 있었으니 얼마나 고마운가. 이런 소중한 고택을 손질하기에도 빠듯한 시간이건만 도로 개설로 헐릴 위기에 처할 때도 있었다고 한다. 다행히 시민들이 보존운동을 펼쳐 상화를 기리는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하게 될 전망이라 하니 기대해볼만하다.

 그는 민족주의 일념으로 피압박 민족의 비애와 그에 대한
저항으로 살아온 일제치하 민족저항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이다. 한때는 나라를 잃은 비애를 잊어보려고 관능의 도취에 빠져들기도 했지만 시대 현실을 인식한 뒤에는 우리나라의 비극적 상황을 벗어나고자 아름다운 저항시로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기도 했다.
 그 누구보다도 조국과 민족을 사랑한 이상화, 그의 시를 통해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은 커다란 감동을 만끽해보고 우리 주위에 있는 그의 발자취를 둘러보며 상화의 숨결을 느껴보는 건 어떨까.

홍윤지 수습기자 adore60@ynu.ac.kr
황혜정 수습기자 vkwkak87@ynu.ac.kr
수성못에 세워진 이상화 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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