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년 전, 그곳에서는 무슨 일이?
31년 전, 그곳에서는 무슨 일이?
  • 박준범 기자
  • 승인 2011.05.18 16: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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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 5월은 다른 달과 달리 휴일이 많다. 특히 대학교 캠퍼스의 5월은‘축제의 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연예인을 초청해 공연도 하고, 대학생들이 직접 행사에 참여한다. 하지만 5월에는 기억해야 할 날이 또 있다. 5월 18일은 광주에서‘5·18민주화운동’이 일어난 날이다. 5·18은 우리나라 민주주의가 진전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고 있지만 많은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잊혀져 가고 있다. 따라서 31주년을 맞는 5·18을 다시 되돌아보고 그 의미를 새길 필요가 있다.

 

5월 14일 신문사 마감을 마치고 피곤함을 가득 안은 채 동대구고속버스터미널에서 7시 20분 버스를 타고 광주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버스로 3시간 30분정도를 달리고 난 후 광주종합터미널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도착해 시내로 나가자 나도 모르게 마음이 엄숙해졌다. 엄숙한 마음을 가지고 첫 번째 사적지로 향했다.
첫 번째 장소는 505보안부대 옛터 사적지였다. 버스에서 하차한 뒤 100m쯤 걸어‘상무대로 956번길’ 방향으로 조금 걷자 사적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사적지는 아주 한적한 주택가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어 그 지역의 지리를 모르는 사람은 쉽사리 찾을 수 없을 만큼 어려운 곳에 위치했다. 사적지를 안내하는 표지판이 필요해 보였다. 505보안부대옛터는 5·18 당시 지도부 및 시민군을 체포해 지하에 가두고 고문수사를 진행했던 곳이다. 또한 시위를 진압하고, 5·18의 진실을 은폐하고 조작하며 실질적으로 군의 지휘를 담당했던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사적지의 뒤편에는 국군 소유의 토지가 위치해 담과 철망이 쳐져있어 당시 시민군이 겪었을 고초를 느낄 수 있었다.
두 번째 장소는 양동시장 사적지였다. 지하철 양동시장 역에 내려 복개상가 쪽 출구로 나가자 바로 시장이 보였다. 이른 시간이었지만 물건을 사려는 사람과 팔려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으며, 상인들의 인상과 푸짐하게 진열된 음식들을 보니 그들의 정이 느껴졌다. 사적지는 빈틈없이 나열돼 있는 상점 사이에 위치하고 있어 찾기에 상당히 애로사항이 있었지만 친절한 상인들의 도움으로 찾을 수 있었다.
양동시장은 5·18 당시 시민군에게 주먹밥과 생필품을 제공해 광주시민이 하나가 되어 무지비한 진압을 하는 계엄군에 대항할 수 있도록 해준 곳이다.
다음으로 도청과 민주광장 사적지로 향했다. 도청은 운동 초기 시민들의 항의와 분노를 표출하던 곳이었다. 또한 5·18 시민군의 본부가 있었던 곳으로 시민군이 계엄군과 최후의 항전을 벌인 곳이기도 하다. 지하철 문화전당 역에 내려 도보로 5분정도 가자 옛 도청의 모습이 보였다. 도청 근처에 다다르자 5·18관련 행사로 교통을 통제하고 있었으며, 그 뒤쪽에서는 행사의 준비가 한창이었다. 옛 도청의 모습은 31년과 비교했을 때 달라진 점은 거의 없어, 당시의 사진과 영상을 접했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금방이라도 시민들이 도청으로 나와‘계엄군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며 나올 것만 같았다. 김정원(광주 북구)씨는 “당시에 광주는 모두 하나였다. 공수부대에 대항하기 위해서 무조건 서로서로 도왔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5·18의 상징‘금남로’=다음은 금남로로 향했다. 금남로는 5·18기간 동안 매일 시위가 벌어졌던 곳으로 학생뿐 아니라, 택시 기사와 버스 기사까지 참여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던 곳이다. 지하철 금남로4가 역에서 내려 도청 방향으로 가자 가톨릭센터 앞에 금남로 사적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 당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던 곳이었지만, 다른 곳보다 차량과시민들이 다니지 않아 이곳에서 그러한 시위가 벌여졌다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이에 익명을 요구한 임 모씨는“5·18 당시 어머니가 공수부대에게 둔기로 머리를 맞아 치료를 받았다. 그 이후로도 후유증으로 수술을 몇차례나 했다. 어머니가 얘기하시는 걸 꺼려 어떠한 조치도 받지 못하셨다”고 밝혔다.
다음은 광주YWCA 옛터와 녹두서점 옛터였다. 광주YWCA 옛터는 도청에서 전남여자고등학교(전남여고)로 이어지는 길에 한 카페 앞에 위치하고 있었다. 당시 이곳에서는 소식을 알리기 위한 회보를 제작하고 그에 대해 회의하는 장소였으며, 민주인사들이 모여 시위의 방향에 대해 회의를 했던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은 음식점, 카페, 학원 그리고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거리 가운데 있어 이곳에서 회의가 열렸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다.
사적지를 보고 전남여교로 향하는 길을 따라가면 녹두서점 옛터가 자리하고 있었다. 녹두서점 옛터는 당시 학생들이 필요한 격문과 현수막을 제작하고, 민주화를 촉구하는 궐기대회를 준비하고, 대책에 대해 논의했던 장소로 전해진다. 고등학교 근처라 교복을 입은 많은 학생들이 한가롭게 도로를 다니고 있어 당시의 상황을 상상할 수 없었다. 다만 사적지에 쓰여진 글귀만이 당시의 상황을 전하고 있어 아쉬움을 더했다.
아쉬움을 뒤로한 채 광주역 사적지로 향했다. 광주역은 당시 계엄군과 시민들 사이에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던 곳이다. 특히 이곳은 계엄군이 무장하지 않은 시민들을 향해 발포해 많은 사상자를 발생시킨 곳이기도 하다. 광주역 광장은 다른 역 보다 넓어 많은 사람들이 시위를 전개한다면 효율적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곳도 역시 다른 사적지와 마찬가지로 한적한 곳에 위치해 31년 전에 그렇게 치열하게 시위가 발생했는지에 대한 의문도 들게 했다.

◆5·18의 발단‘전남대학교’=마지막으로 전남대학교(전남대) 사적지를 방문했다. 버스에서 내리자 정말 많은 사람들이 학교로 향했다. 전남대 후문에서 정문으로 가면서 본 전남대는 여느 대학교 캠퍼스와 다름없었다. 학교내 곳곳에 있는 벤치에 앉아 주말의 여유를 느끼고 있었으며, 잔디밭에서는 체육대회가 펼쳐지고 있어 웃음이 떠나지 않고 있었다. 또한 가족들이 돗자리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31주년 기념, 추모행사를 알리는 플랜카드만이 당시 상황을 나타내고 있는 듯했다. 전남대는 5·18이 시작된 곳이다.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면서 학생들의 학교 출입을 막는 계엄군에게 항의하면서 최초의 충돌이 발생했고, 이에 광주역과 금남로로 진출해 활발한 시위를 벌인 계기를 제공했다. 이에 노국현(전남대 경제학부2)씨는“광주에서의 많은 희생은 잊지 않고 있으며, 당시의 희생이 오늘날 대한민국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요즘 학생들은 예전처럼 5·18을 추모하고 기념하고 있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5·18이 일어난 지도 벌써 31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다. 그동안에 이 운동에 대한 많은 기사와 사진 그리고 영상물들이 쏟아져 나왔으며, 운동에 참여했던 많은 분들의 경험담이 밝혀지고 있다. 이렇게 하나씩 5·18에 대해 몰랐던 사실들을 발견해 가면서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진전을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은 사실들이 많이 있다. 최초 발포 명령을 한 사람이 누군지, 미군과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지, 계엄군이 시신을 묻은 장소는 어디인지 등.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이 민주화운동이 벌어졌던 당시 군대에서 지휘했던 사람들이 아직까지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은 채 대한민국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언제쯤 5·18에 대한 의문점이 풀릴지, 관련자들에 대한 진실규명이 이뤄질지는 미지수다. 어쩌면 영원히 풀리지 않을 대한민국의 숙제로 남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가 5·18을 되돌아보고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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