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보 여행과 '시간의 자국들'
도보 여행과 '시간의 자국들'
  • 편집국
  • 승인 2011.01.02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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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한 신문에서 일본의 도보 여행 코스에 관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88곳의 절을 l천2백km로 잇는 성지순례길이 있는데 힘든 순례자들에게 주민들이 선물을 나누어주는 ‘오세타이' 라는 전통에 관한 내용이었다. 여행지로서 일본이라고 하면 대개 온천 관광만 떠오르던 나에게 이 순례여행은 일본을 편견 없이 만날 수 있는 좋은 경험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일본도 그렇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언제부터인가 도보 여행이 유행이다. 제주도의 올레길이나 지리산의 둘레길 등 도보 여행에 좋은 명소들이 하나 둘씩 개발되어 소개되고 있다. 방송을 타면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명소에 몰려들기도 한다. 지자체에서는 관광수익을 목적으로 앞을 다투어 도보 여행 코스를 개발하느라 분주하다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자연을 온몸으로 체험하면서 건강도 챙기고 동행한 사람과 친교도 누리는 도보 여행이야말로 삶의 새로운 활력소가 됨에 틀림없다. 더불어 땅과 인간의 관계를 다시 인식할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도 도보 여행의 큰 미덕일 것이다.

땅이 인간의 정신 형성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는 한마디로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자연 속에 있을 때 정서와 사유가 더욱더 고양되고 촉발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것은 도시의 삶속에는 느낄 수 없는 기쁨 그 자체이다. 따라서 도보 여행은 본질적인 의미에서 하나의 문화체험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문화재를 탐방하고 맛집을 둘러보는 등 일상의 삶으로부터 탈출하여 만끽하는 자유로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문화라는 말에 깃든 자기 형성(빌둥)의 오롯한 의미를 자연 속에서 체득함을 뜻하는 것이다.

이러한 문화 체험은 영국 낭만주의 시인인 워즈워스가 자신의 자서전적 시 『서시』에서 언급한 ‘시간의 자국들’과 같은 역할을 한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시간의 자국들’온 주로 워즈워스가 어린 시절 자연 속에서 마주친 사물과 인간의 이미지가 강렬하게 남아 그 이후의 삶에 지속적인 영향력을 끼친 경험을 다루고 있다. 그 경험의 내용을 섬세하고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이 경험의 의미를 명시적으로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에 어떤 이미지들만이 그려질 뿐이다. 가령 양 갈래길 사이의 언덕바위 위 허물어진 담벼락 옆에 앉아서 성탄 휴가를 맞아 자신을 집으로 데려갈 말을 기다렸는데 그 때 오른쪽 옆에는 양 한 마리가 있었고 왼쪽 옆에는 시든 산사나무가 있었으며 날씨는 흐렸고 안개가 어떤 형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어린 워즈워스가 말을 기다리며 느꼈을 법한 조바심이 양과 산사나무 등으로 나타난 셈인데, 이 경우 워즈워스의 뇌리에 각인된 사물의 이미지는 어린 시절 경험의 깊이를 드러내준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이런 깊이 있는 정서적 체험은 한 인간의 독특한 개별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이기도 하다. 워즈워스는 이러한 ‘시간의 자국들’이 잘못된 견해와 논쟁적인 사고에 지쳐있는 우리에게 원기를 회복시켜주어 우리의 마음은 모르는 사이에 치유된다고 적고 있다. 무슨 대단한 이념이나 교리도 아닌 사소하다면 사소한 경험이 실은 우리의 정신을 형성하는 주요한 요소기 되는 것이다. 길을 밟으며 무심히 지나치는 자연의 사물과 형상들은 우리의 기억과 상념들과 어떤 식으로든지 관계를 맺는데 그러한 체험이 반복되었을 때 우리의 마음속에도 하나의 길이 생기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심신이 지쳐있다. 몸과 마음은 늘 감옥에 갇혀있다. 자유의 전당이었던 대학 캠퍼스도 학점과 취업의 감옥이 된 지 오래다. 학생들의 표정에서 현재에 대한 불만과 미래에 대한 불안이 떠나질 않는다. 상투성과 반북에 길들여진 일상은 깊이 있는 정서적 체험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럴 때일수록 일상의 삶과 거리를 두고 자신을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학생들에게 이번 방학에 도보여행을 떠나보길 권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열심히 일한 자만 떠날 자격이 있는 것은 아니다. 삶의 원기를 북돋고 진정한 나를 만나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떠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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