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오딧세이]사랑의 변주로 근대를 산 나혜석
[인물오딧세이]사랑의 변주로 근대를 산 나혜석
  • 편집국
  • 승인 2007.04.09 15:4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나혜석

근대 신여성의 1세대인 윤심덕, 김일엽 등이 그러했듯이 나혜석은 한 발은 근대에, 다른 발은 전통에 담그고 위험스런 줄타기를 하였다. 줄타기의 단적인 예는 근대의 상징인 기독교와 전통의 상징인 불교를 신앙의 뿌리로 삼은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근대와 전통이, 그리고 서구적인 것과 조선적인 것이 병존하는 이중 의식 속에서 나혜석은 삶을 부유했다.
 서구를 닮아가는 것, 그것이 나혜석의 시대에는 유행병이었지만 아무나 폼나게 근대를 살지는 않았다. 나혜석이 지금 우리 입에 회자되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조선은 아직 전통에 머물러 있었지만 그녀는 남보다 먼저 근대를 유람했다. 조선의 근대보다 먼저 근대를 살았기 때문에 그녀는 선구자였다. 그러나 ‘여성의 근대’를 산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녀는 불행했다.
 나혜석은 때로는 지나칠 정도로 전통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구미 여자는 대체에 있어서  키가 크고 코가 높고 눈이 깊으며, 그 행동은 분명하고 진취성이 많으며, 보통 상식이 풍부하여 매사에 총명하다”는 그녀의 말에는 서구보다 못한 동양/조선이 자리하고 있다. 그녀는 조선을 타자의 자리에 놓음으로써 변주된 오리엔탈리즘의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물론 서구라는 타자를 이상화함으로써 상처 받은 자존심을 보상받고 싶었겠지만, 그럴수록 그녀는 주체가 아닌 타자로서의 삶 속으로 빨려들어 갔다. “아, 자유 평등, 박애의 세상, 파리가 그리워” 라고 절규하는 그녀에게 조선은 결코 ‘스위트 홈’은 아니었다.


 전통이 하나의 규율로 자리하고 있는 근대 지향의 조선에서 나혜석의 이런 사고나 행위들은 비정상으로 치부되기 쉬웠다.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 충실히 귀를 귀울인 나혜석은 어쩔 수 없는 주체의 분열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럴 때마다 견고한 봉건의 눈길은 매서운 통제를 가하였다. 이 갈등과 분열의 시대에 나혜석을 떠받쳐준 것은 김우영과 나눈 정열적인 사랑의 힘이었다. 그가 김우영에게 결혼을 허락하면서 내건 조건은 당시로서는 파격이다.
 “일생을 두고 나를 지금과 같이 사랑해 주시오”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마시오”
 “시어머니와 전실 딸과는 별거케 하여 주시오”
 신혼여행으로 죽은 애인의 묘를 찾아, 석비까지 세워준 김우영의 사랑도 대단하지만, 그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당당히 낸 나혜석의 용기는 두려울 정도였다. 시대가 나혜석을 버렸지만, 김우영은 결코 그녀를 버리지 않았다. 어찌 생각해보면 나혜석에게 있어 근대는 사랑의 변주였다.
노상래교수 (국어국문학)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