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e善] 예민의 미학
[see善] 예민의 미학
  • 황유빈 대학사회부장
  • 승인 2024.03.04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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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은영의 금쪽 상담소'에서 한 탤런트는 자신이 예민해서 상처를 받는 것 같다는 고민을 털어놓았다. 해당 탤런트는 오은영 박사에게 자신이 왜 예민하다고 생각하는지를 털어놓는다. 그 사연을 본 많은 사람들은 '우리 사회는 말하는 사람의 무례함을 듣는 사람의 예민함으로 덮으려는 경향이 심하다'고 말했다. 이러한 논의에서 첫 번째 See善이 시작됐다. 예민함의 미학이란 무엇일까? 예민함은 어디까지 정당화될 수 있을까?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상대가 ‘무례하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다. 말을 험하게 해서, 거짓말을 해서... 무례한 인상은 다양한 이유에서 비롯되지만, 무례한 이들의 대답 중 하나는 대개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네가 너무 예민한 거 아니야? 난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자연스럽게 던져지는 무례함은 대개 받아들이는 ‘나’의 예민함으로 종결돼 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험한 말을 한 사람은 자신의 말이 그런 의미로 건네진 것은 아니라며 일축한다. 거짓말을 한 사람은 자신의 거짓말이 그 정도로 기분 나빠할 거짓말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어떤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도 그 사람이 무례하다는 것을 확신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내가 예민한 건가?’라고 생각하며 상대의 무례함과 나의 예민함의 혼동 속에 스트레스를 받곤 한다. 이런 상황에서 ‘나’들은 본인을 피해자로 생각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한편 반대의 경우도 있다. 예민함을 핑계로 상대가 내게 건네는 위로를, 칭찬을 왜곡해 듣는 경우다. 이때 예민한 ‘나’들은 가해자가 된다. 상대방의 선의가 ‘나’의 예민함으로 인해 악의로 뒤바뀌게 되니 말이다. 예민한 사람들이 스트레스를 받는 지점이 바로 여기라고 생각한다. 예민은 가해자도 피해자도 될 수 있다. 회색 지대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회색 지대에 놓인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선악, 흑백처럼 둘로 확실히 나뉘는 것을 좋아한다. 나 역시 그렇기에, 그리고 좋은 쪽으로 예민을 생각하고 싶었기에 ‘예민의 미학’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됐다.

 이러한 생각을 통해 나는 예민의 미학을 두 가지로 정의했다. 하나는 ‘예민이 나의 눈을 가리지 않을 때’이다. 나의 무례함을 남의 예민함으로 덮지 않고, 나의 예민함으로 타인의 친절을 가리지 않을 때 예민은 미학이 될 수 있다.

 두 번째 미학은 ‘내가 나의 예민함을 지지할 때’이다. 나 스스로의 지지가 없다면 예민은 고집이 된다. 그러나 내가 나의 예민함을 지지할 수 있다면, 타인은 예민을 본인에 대한 성찰의 기회로 삼거나 하다못해 자신의 행동을 내 앞에서만큼은 절제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즉, 예민을 드러내고 싶을 때 내가 왜 예민한가에 대한 근거를 마련한다면 예민이 미학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우리 사회는 예민한 사람이 살기에는 어려운 사회라고 생각한다. 예민함이 미덕으로 비춰지는 경우는 흔치 않고, 오히려 예민한 사람을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경향도 있다. 그러나 예민한 ‘나’들이 일찌감치 포기할 필요는 없다. 나는 예민의 미학을 지킨다면 예민도 결국은 하나의 성향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기대를 품고 있다. 이러한 기대감과 함께 첫 번째 See善을 마무리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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