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회 천마문화상-우수상(시)] 정인(丁仁)
[54회 천마문화상-우수상(시)] 정인(丁仁)
  • 최예지(영남대 경영학과)
  • 승인 2023.11.21 17: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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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丁仁)

 

흙을 고르고 곡식을 모으고

밥 지은 아궁이 가장 구석에 모인

재도 싹싹 긁어모아 또다시 흙을 고르라고

 

부서지지 말라고 튼튼한 자루까지 칭칭 감아

그렇게 한평생을 살아남으라고

우리 아버지는 언니의 이름을 정인이라고 지었다

 

아들로 태어나라고 그렇게 빌고 빌었는데도

딸 다음에 딸 그리고 딸 다음에 딸

지치지도 않고 또 딸들이 태어나서

딸 중에 셋은 없고 둘은 어찌어찌 살아남았다

 

그래도 일단 살아야지

내가 미안한 건 부모를 선택할 권리를 빼앗은 거

그거 하나다 그러니 일단 저녁을 먹자

 

씨앗을 심고 싹을 틔우고

겉겨를 벗겨내고 밥을 짓자

 

애호박과 얇게 썬 무

마른 멸치와 고추

소금 한 꼬집과 누런 된장도 두 숟갈 넣고

 

저녁 상다리 아래로 발가락을 맞대자

금빛을 마시고 다시 계절을 시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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