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丁仁)
흙을 고르고 곡식을 모으고
밥 지은 아궁이 가장 구석에 모인
재도 싹싹 긁어모아 또다시 흙을 고르라고
부서지지 말라고 튼튼한 자루까지 칭칭 감아
그렇게 한평생을 살아남으라고
우리 아버지는 언니의 이름을 정인이라고 지었다
아들로 태어나라고 그렇게 빌고 빌었는데도
딸 다음에 딸 그리고 딸 다음에 딸
지치지도 않고 또 딸들이 태어나서
딸 중에 셋은 없고 둘은 어찌어찌 살아남았다
그래도 일단 살아야지
내가 미안한 건 부모를 선택할 권리를 빼앗은 거
그거 하나다 그러니 일단 저녁을 먹자
씨앗을 심고 싹을 틔우고
겉겨를 벗겨내고 밥을 짓자
애호박과 얇게 썬 무
마른 멸치와 고추
소금 한 꼬집과 누런 된장도 두 숟갈 넣고
저녁 상다리 아래로 발가락을 맞대자
금빛을 마시고 다시 계절을 시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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