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칼럼니스트] 출구가 어디예요?
[나도 칼럼니스트] 출구가 어디예요?
  • 이우진(미디어커뮤니케이션4)
  • 승인 2023.10.04 17: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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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은 예술 그 자체만큼 해석에도 열광한다. 문학 작품의 해설을 읽고 몰랐던 의미를 발견하고, 평론가의 영화 분석을 보며 고개를 끄덕거리는 사람이 나 하나는 아닐 것이다. 그런데 그런 ’해석‘이 정답인지는 잘 모르겠다. 애당초 여기에 ‘정답’이란 것이 존재할까? 이에 나는 예술의 ‘정답 없음’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하이데거의 표현을 슬쩍 가져와 본다. 예술은 의미의 집이다. 이때의 집이 통상의 집과 조금 다른 점을 꼽자면 입구도, 출구도 없다. 어쩌면 숨겨져 있을 수도 있다. 의미의 집에서는 출입구를 찾아내거나 아예 만들어내는 것이 수용자인 우리의 몫이다. 우리는 우연한 계기로 예술에 들어가는 입구 앞에 선다. 그 의미의 집으로 들어서면, 다음은 혼란스러운 방황과 헤맴의 연속이다. 이는 출구를 찾기 위한 여정이라고 할 수 있다. 평론가나 작가의 도움을 얻어 비교적 정형화된 출구를 찾아 나설 수도 있고, 나만의 문을 열어젖힐 수도 있다. 그중 가짜나 오답인 것은 없다. 그저 서로 다른 여러 개의 출구일 뿐이다. 즉, ‘정해진 답’은 없다.

 예술의 ‘정답 없음’이자 ‘출구 없음’에 대해 계속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예술 작품은 그 자체로 하나의 잠재태, 즉 무궁한 가능성을 가진 잠재적인 무언가다. 작가의 의도는 분명 존재하겠지만, 그 또한 의미의 집을 나서기 위한 하나의 출구에 불과하다. 길은 사람이 걷는 방향으로 생기기 때문에 나가는 길은 다양하다. 우리가 어느 한 방향을 고르고 그쪽으로 걸어나갈 때, 예술은 또 하나의 새로운 현실이 된다. 이처럼 ‘각자의 몫으로 남겨진 해석’을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말을 빌려 표현해보자면 ‘작품이 잉태하고 있는 것을 끌어내’는 ‘일종의 창조’라고 할 수 있다.

 이제는 너무 식상한 이야기가 돼버렸을지도 모르지만, 하나의 문학 작품을 백 명이 읽는다면, 백 개의 서로 다른 해석이 나와야 한다는 소설가 김영하의 지론 또한 이로부터 멀지 않다. 물론 정해진 정답이 있다고 믿고, 주류의 시각에 편승하여 작품을 즐기는 것 또한 하나의 감상법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여러 군데로 출구가 나뉘어 있는 대형 상가 건물처럼 의미가 몰려 있는 예술 작품에 다양한 해석이 가미되면 나쁘지 않겠다는 막연한 기대가 있다. 또한 이는 어렵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 해석의 영역은-적어도 내게는- 그저 마라탕을 먹으러 가서 중국당면을 추가할지 분모자를 얹을지 재 보는 것, 그리고 후식으로 커피를 마실지 카페인 없는 음료를 마실지 고민하는 것, 그 정도에 머물러 있으니까. 여기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심오한 의미도, 밀려드는 감동도 아니다. 맛, 취향, 그리고 소소한 행복. 그것이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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