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회 천마문화상 - 가작(수필)] 가을 나들이
[50회 천마문화상 - 가작(수필)] 가을 나들이
  • 김철환(경희대 중국어학과3)
  • 승인 2019.11.18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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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대에서 보낸 두 해 동안, 두 번의 가족 나들이를 갔다. 가을 즈음 휴가를 받아 집에 돌아올 때마다 아파트 단지로 올라가는 언덕길엔 포플러 이파리가 융단처럼 깔려 있었다. 정문을 지나 1층 현관으로 들어가기 전 나는 집이 더러워질까봐 계단 끝자락에 전투화 밑창을 연신 치댔다. 밑창에 박힌 포플러 파편이며 작은 돌멩이들을 떨어뜨리기 위해서였다. 그러다보면 간밤에 수화기 너머로 들은 어머니의 말이 생각났다. 주말에 가족 나들이를 나갈 거라는 통보였다. , 받들어야죠, 귀찮은 나들이.

 가을 즈음이 되면 가족들은 내가 휴가 나오는 날짜에 맞춰 나들이를 계획했다. 아버지, 어머니, , 그리고 이모까지 네 명이 SUV 차량에 앞뒤로 나눠 타고 향하던 곳은 늘 집 근처 휴양림이었다. 부모님과 나만 가는 나들이였다면 나도 좋았을 것이다. 어릴 적부터 부모님은 나를 데리고 이곳저곳을 많이 여행하셨기에 지금도 부모님과는 어색하지 않다. 문제는 이모였다. 이모를 나들이에 데려 가는 것은 가을 풍경을 함께 즐기도록 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모를 혼자 집에 있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래 전 이모부를 여읜 이모는 학교 앞에 문방구를 차려 두 자식의 뒷바라지를 하셨다. 그렇게 키우던 아들과 딸이 모두 장가들고 시집간 뒤, 내가 중3이 되던 해에 이모도 새로운 사람을 만났다. 그리고 곧 재혼하여 낙향했다. 시골로 내려간 후 이모는 무슨 일 때문이었는지 한동안 친지들에게 얼굴을 보이지 않았고 전화도 받지 않았다. 엄마가 요즘 딴 사람이 된 것 같아, 라며 울먹이던 딸의 말과, 아들이 당신의 새신랑과 크게 싸웠다는 말을 간간히 어머니에게서 들었을 뿐이다.

 여러 곡절 끝에 새신랑과 이혼한 후, 다시 대전으로 올라온 이모는 예전의 이모가 아니었다. 자기 이름 하나 제대로 쓸 줄 모르는 네 살배기 아이가 돼버린 것이다. 육십 대 중반에 벌써 치매가 왔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을 때마다 이모를 지켜보던 주위 사람들은 모두 놀랐다. 새신랑과의 결혼생활이 이모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느니, 결혼생활에서 어떤 정신적인 충격이 있었느니 하는 얘기들이 많이 들려왔다. 물론 이런 소문은 치매가 시작된 지 대여섯 해는 됐을 거라는 의사의 소견과 함께 수그러들었다.

 또 다른 문제는 이모를 보살필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자식들은 모두 분가했고, 이모는 외할머니와 같이 살게 되었다. 하지만 나이 많으신 외할머니가 보살피기에는 이모의 병세가 점점 악화되고 있었다. 이모는 어릴 적 외할머니에게 서운했던 일들을 끄집어내면서 그 때 왜 그랬냐며 외할머니를 매일 괴롭게 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가족은 한 가지 결정을 내렸다. 살던 집을 팔아 대전에 내려와서 이모를 보살피는 조건으로 세() 없이 이모 집에 사는 것이었다. 당시 우리 가족의 경제상황이 안 좋던 차에 어머니께서 생각해낸 방법이다.

 

 집에서 휴양림까지는 차를 타고 30분이 조금 넘게 걸리는 거리였다. 차창 너머로 도로가에 심긴 은행나무, 메타세쿼이아, 유등천 물줄기를 발부리로 둔 산등성이가 온통 단풍이었다. 가는 길에 뒷좌석에 타신 어머니는 계속 옆자리의 이모에게 말을 건넸다.

 “단풍 예쁘지?”

 이모는 손깍지를 끼고 나직이 응, 하고 대답했다. 여기 온 적 있어? 신랑이랑 왔어. 언제 와 봤어? 신혼 때 왔어. 어머니와 이모는 그런 사소한 대화들을, 아니, 대화가 되지 못한 문답들을 계속 이어갔다.

 “이모, 우리 지금 어디로 가요?”

 내가 물어보자 이모는 입을 꼭 다물었다. 모른다는 뜻이다. 우리 장태산 가고 있는 거야, 어머니가 얘기하자 그제야 장태산하고 대답한다. 나는 질문을 바꿔 운전하고 계신 아버지를 가리키며 누구냐고 물었다. 이모는 아들, 하고 말했다. 내가 누구냐고 묻는 질문에는 작은 외삼촌의 이름을 댔고, 어머니를 가리키자 막내 이모의 이름을 댔다. 이런 식으로 대답하는데 질문은 해서 뭐해요, 나는 퉁명스레 뱉었다. 아픈 사람인데 그럴 수도 있지, 아버지의 말씀이다. 어머니는 그저 이모에게 우리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이 누구인지 차근차근 설명해 줄 뿐이었다.

 그런 와중에 차 안에서 이모는 수시로 집에 가고 싶다고 보챘다. 처음 한 두 번은 참았지만 계속 똑같은 말을 듣자 나는 다시 참지 못하고 뱉어 버렸다, 이모도 가고 싶다고 그랬잖아, 왜 이랬다저랬다 하는데. 아버지가 내게 목소리를 낮추라고 이르셨다. 그러나 어머니의 대답은 변함없이 차분했다, 휴양림 갔다가 집에 가자. 그러면 이모는 다시 조용해졌다.

 목적지에 다다랐을 때 쯤, 질문 하나를 더 했다. 지금이 무슨 계절이에요?

 “.”

 

 이모가 우리 식구가 되고 어머니는 바빠졌다, 매일 아침마다 이모의 기저귀를 갈아주고, 샤워를 도와주고, 반찬투정을 하는 이모를 달래가며 밥을 먹여주기도 했다. 나 또한 군 입대일을 기다리는 몇 달 동안 이모에 대한 조그만 책임이 주어졌다. 아침마다 어머니와 함께 이모를 모시고 산책을 나가거나, 어머니가 집을 비운 사이 이모의 식사를 챙겨주고, 이모의 잠자리를 봐 주는 일 등이었다. 어머니가 하시던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그마저도 나는 짜증을 냈다. 기억 속에 멀쩡한 모습으로 남아있는 이모와 당장 마주한 이모의 모습 사이에서 혼란스러웠을 뿐더러, 하는 일 없이 온종일 소파에 앉아 멍하니 TV만 보다가 차려주는 밥이나 먹고, 졸리면 잠이나 자는 이모를 신경 써야 하는 생활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몇 분 전에 밥을 먹었는데도 밥을 안 먹었다고 우기고, 어디론가 말도 없이 나가서 우리 가족을 가슴 졸이게 만들기도 했다. 나는 밖에 나갔다가도 외출한다는 어머니의 전화를 받고는 곧 돌아와야 했다. 어머니는 화난 나를 볼 때마다 말씀하셨다. 이모는 불쌍한 분이야, 아픈 사람이니 네가 받아들여야지. 그 뒤에 이어질 뻔한 말은 내가 먼저 얘기하곤 했다. 이모는 집주인이니까.

 

 휴양림에 도착하자마자 차에서 내린 이모는 앞을 보며 곧장 걸어갔다. 밖에서 나타나는 이모의 습관이었다. 경치 구경은 안중에도 없었다. 어느새 저만치 떨어져 있는 이모를 가서 붙잡으며 어머니는, 여기서는 천천히 걸으면서 경치 구경을 해야 한다고 타일렀다. 이모가 앞서 나가지 않도록 아버지와 내가 앞장섰고 어머니와 이모는 그 뒤에 나란히 서서 구불구불한 산책길을 걸어갔다. 어머니는 계속 앞서나가려는 이모를 붙잡느라고 애를 먹었다. 그런 이모를 보며 아버지가 말했다, 어휴, 예나 지금이나 패기가 있으시네요.

 이런 조그만 소란을 스쳐 지나가며, 팔짱을 낀 연인들과 아빠엄마 손을 잡은 아이들은 가을볕 속에서 언덕길을 천천히 올라가고 있었다. 길섶으로는 낙엽이 진 자리마다 가라앉은 나무들의 그림자가 더욱 깊어 보였다. 그것은 낙엽들 사이에서 홀로 까맣고, 멋없이 기다랗게 뻗어 있었다. 어쩌면 빛나지 못하는 대신 어디로든 나아가야 한다고 자신에게 성을 내며, 앞으로 나아가다 보면 빛깔을 찾을 거라고 위로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길을 걸으며 아버지는 내게 이모의 지금 모습을 이해하고, 이모에게 정성을 다하는 어머니를 이해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같은 피가 흐르는 언니라서 보살펴주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이모라는 개인을 놓고 봤을 때도 그간 겪은 고생이 못내 안쓰러웠던 거야, 그러니까 너도 엄마를 이해해야 돼.

 

 우리 가족이 모여 우연히 이모의 손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계산기보다 편하다며 매일 주판을 튕기던 이모의 손은 예전과 다름없이 작고 단단해 보였다. 이모는 그런 손을 내게 보여주며, 내 손 예쁘지, 하고 자랑했다. 갑작스러웠지만 또한 신기했다. 문방구를 하던 때의 이모는 자신에 대해 칭찬 한 마디도 할 줄 모르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매일 아이들에게서 받은 꼬깃꼬깃한 천 원을 백 원짜리 몇 개로 거슬러주던 비린내 나는 손, 전자레인지에 데운 오징어다리며 소시지를 꺼내려다 화상을 입어 허물이 벗겨지던 손은 오히려 안쓰러웠다. 남편이 생각나는 날이면 하루의 수고가 담긴 손으로, 옛 사진에 앉은 먼지를 닦아내면서, 나아가야 한다고, 이모는 스스로를 힘껏 떠밀어 왔을 것이다.

 가을이건 봄이건 먼 데 여행도 한번 가지 못하고 20년이 넘게 문방구를 지켜왔던 이모의 모습에는 화려함도 여유로움도 없었다. 남들처럼 빛나지는 않는 삶이었지만, 훗날 자신을 돌아보며 그간에 살아온 길을 자신만의 빛깔로 긍정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을 지, 혹은 남들 몰래 바라고 있던 빛이 있어 그 빛에 가 닿으리라고 생각했을 지, 어린아이가 된 이모에게 더 물어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해마다 가을 산길로 이모를 데려갔던 어머니는 그런 이모의 모습만으로도 하나의 빛이었음을 알고 있었다. 가을 풍경은, 비록 이모는 느낄 수 없지만, 이제는 쉬어도 좋다고 이모에게 말해주고픈 어머니의 마음인 것 같았다. 내가 이 마음을 조금 이해하기 시작했을 때 이모는 이미 모든 언어를 잃고 요양원에 들어가신 뒤였다.

 

 얼마쯤 걸어가던 나와 아버지의 등 뒤에서 언니!’ 하는 어머니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았다. 그와 동시에 이모는 아버지 옆을 휙 지나서는 두 팔을 힘차게 뻗으며 빠른 걸음으로 앞서갔다. 어머니의 힘으로는 이모의 고집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황급히 뒤따라가 이모를 붙잡으려던 나에게 어머니는 그냥 두라고 말씀하셨다.

 “가다가 맨 처음 보이는 벤치에 앉아 쉬어!”

 어머니는 크게 외쳤다. , 하고 명랑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걱정이 놓였다. 이모가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내딛을 때마다 진보랏빛 융 드레스가 풍경처럼 물결쳤다. 가지 사이로 새어 나오는 햇빛을 받으며 이모는 느린 가을 풍경 가운데를 홀로 씩씩하게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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