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 다시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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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편집국
  • 승인 2007.05.18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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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민주운동 직후의 신생활운동
4·19민주운동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한국 현대 민주·민족운동의 시발점이었고, 미완성의 혁명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4·19민주운동시기 학생층은 자치학생회 건립운동, 어용교사 축출과 부패재단 정화운동, 교원노조 동조 및 지지 활동 등의 학원민주화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정치개혁 차원에서 4대 국회 해산 요구, 반민주세력 및 부패세력 척결운동도 전개하였다. 그리고 한미경제협정 반대와 이대악법 반대 운동 등의 자주 및 민주운동을 펼쳤고, 통일운동도 강렬하게 전개하였다. 이렇듯 4·19민주운동시기 학생층은 다양한 개혁을 역동적으로 주도해 나갔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4·19민주운동 직후 전개한 신생활운동이다. 이 운동은 서울대에 국민계몽대 신생활운동반이 결성되면서 본격화되었는데, 자립경제 확립, 외제 상품 및 향락 배격 등을 주요 활동 방침으로 설정했다. 이는 경제의 자립을 위해 국산품 사용을 강조하며, 건전한 일상생활문화를 강조하는 것이었다. 이 운동은 당시 경제난이 심각해 취업률이 많이 낮았던 한국사회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대학가를 중심으로 급속도로 확산되어 나갔다.
대구에서도 대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생활계몽대, 신생활계몽대 등의 명칭을 가진 단체를 결성하여 신생활운동을 전개하였다. 학생들은 ‘양담배를 배격하자’, ‘정치혁명과 함께 생활을 개선하자’, ‘국산품을 애용하자’ 등의 구호를 외치며 가두 선전활동을 벌였다. 또한 당시 크게 유행하던 빠, 카바레, 다방의 문을 닫게 하자거나 일본 가요를 일소하여 민족정기를 회복하자는 등의 향락문화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취했다. 뿐만 아니라 미국의 잉여농산물로 인한 한국농민의 극심한 피해 양상을 지적하고, 미제 상품의 사용 억제를 주장하며, 휘발유 절약 등의 경제활동 방침을 설정해 국민들을 대상으로 계몽활동을 전개하였다.
실제 대구에서는 신생활계몽대의 학생들이 거리에서 일본 음반을 수거해 불태우는가 하면 무허가 카바레를 급습해 사진을 찍어 전시하는 등의 활동을 벌였다. 이런 학생층의 활동은 기층세대의 일상생활에 일대 충격을 가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신생활운동은 지역의 언론에서도 큰 관심을 끌게 되었을 뿐 아니라, 전국적으로도 주요 이슈로 부각되었다. 당시 지역의 언론사들은 사설을 통해 생활계몽을 위한 학생들의 활동에 기대감을 표시하는 등 지지를 보내기도 했다. 전국적으로는 학생들의 신생활운동을 둘러싼 지지와 비판이라는 논쟁이 일어날 정도로 주요 이슈가 되었다. 주로 잡지 ‘사상계’를 통해 신생활운동의 요강과 실제 활동의 결과들이 소개되었고, 동시에 논쟁의 주요 주장들도 게재되었다.
이렇듯 학생층은 민주·민족운동이라는 거대한 구조의 변동을 일으켜 내었을 뿐 아니라, 일상생활의 개선이라는 미시한 부분까지 개혁의 대상으로 설정하여, 한국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던 것이다. 그러한 학생들의 사회적 역할은 실천적이었던 점에서 높이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일상생활 체계의 건강성은 누구에게나 강조되어야 할 주요 덕목이 아닐까.
김일수(민족문화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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