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문학로드, 역사의 현장을 녹여내다
대구 문학로드, 역사의 현장을 녹여내다
  • 조규민 기자 하지은 기자 구예은 준기자 최준혁 준기
  • 승인 2016.10.10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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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근대문학의 꽃, 그 시작을 찾아서]

 대구 중구의 근대문화골목, 김광석 다시 그리기길 등 골목투어는 대구 문화관광의 상징이 됐다. 대구의 골목투어 프로그램은 투어를 하는 사람들에게 시공간을 넘어, 역사적인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대구문학로드는 근대문학의 우수성과 역사성을 직접 체감할 수 있는 문학관광프로그램이다. 최근에는 대구 문학인들의 자취를 느껴볼 수 있는 대구문학로드가 만들어져 새로운 관심을 받고 있다.


골목, 친숙함이라는 매력에 대하여

 대구문학로드를 알아보기 전에 주목해야 할 점은 대구 문학의 우수성을 전달하기 위한 소재로 왜 골목을 선택했는가 하는 것이다. 골목은 공간과 사람을 연결해 주는 매개체로, 사람들은 골목을 떠올리며 옛 추억과 향수를 느낀다. 최근에는 사람들의 골목에 대한 이해도 높아지고 있다. 박승희 교수(국어국문학과)는 “골목은 처마와 처마 사이의 가장 정겨운 공간이다. 골목이 갖고 있는 정겨움이라는 요소가 대중들의 관심을 끄는 이유이다”라고 했다. 

 
대구문학로드, 그 시작을 묻다
 대구문학로드는 대구에 거주했던 문화예술인들이 즐겨 찾던 다방, 작품 활동을 했던 출판소 등의 장소를 방문한다. 이때 전문해설사도 동행하기 때문에 근대문학에 대한 스토리텔링 형식의 설명을 들을 수 있다. 이는 기존에 있는 공간들을 재구성해 대구지역 관광 활성화와 지역 문학의 매력을 강화시키기 위함이다.

 대구문학로드 기획 배경에 대해 심재찬 대구문화재단 대표는 “대구문학로드는 근대 문인들의 흔적을 찾아가며 문학에 한층 더 가까워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고자 시작한 프로그램이다”라고 설명한다. 한국 근대 문화의 산실인 대구는 많은 문학작품의 배경이 된 곳이다. 장소에 대한 소개와 함께 그곳에 담긴 문화예술인들의 에피소드도 들을 수 있다는 것이 대구문학로드 투어만의 특색이라 할 수 있다. 앞으로 이곳은 지역문학의 대중화와 역사성에 대한 의미를 공간스토리로 표현해 더 큰 가치를 만들 것으로 기대된다. 대구문학로드는 문학과 골목의 만남을 통해 이차원적인 사고를 넘어서 다각도로 문학에 접근해 가기 위한 첫발을 내딛고 있다. 지금부터 대구 문학계의 역사와 위상을 증명할 수 있는 대구문학로드를 시작해 보자.

문학로드 지도

[대구 문학예술인들의 발자취를 따라 걷다]

 대구에서 70년을 넘게 살아온 박명호 해설사와 함께 본지의 기자가 문학로드 투어를 직접 다녀왔다. 박명호 해설사는 “젊은 시절, 향촌동 일대의 대포집에서 문학을 논하고 토론하던 추억이 있었는데, 어느 날 이것이 도시개발로 사라져 안타까웠다”고 전했다. 때문에 그 시절의 발자취를 후배들에게 알리고자 이 일을 시작했다고 한다. 이에 그와 함께 근대 문학의 꽃을 피운 대구 근대문인들의 꽃씨를 찾아 떠나봤다. 본지의 기자들은 A코스와 B코스 중, 전쟁기 문인들의 흔적과 교류를 찾아 볼 수 있는 B코스를 찾아갔다.
 

그들의 대구를 기억하는 곳

 대구문학로드 B코스는 ‘전쟁기 문학과 예술의 교류’를 주제로 대구 문학관에서 시작한다. 2014년 개관한 이곳에서는 대구 근대골목을 한 번에 볼 수 있었다. 무엇보다 대나무 죽순 모양의 구조물이 장관이다. 죽순은 3층부터 4층까지 이어진 꽤나 큰 크기였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최초의 시집 『죽순』과 문학인들의 문학작품들도 함께 볼 수 있었다. 대구 문학인들의 혼을 기리며 대구 문학의 역사를 증명, 기억하고 있는 이곳은 이젠 문인들의 문화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한참 문학관을 둘러보고, 문인들의 글을 보니 왜 이곳이 문학로드의 첫 코스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문인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려면, 문인들의 발자국을 알아야하기 때문이다.
 

문인들이 즐겨 찾던 서점,
문성당 출판사

 문학관에서 얼마쯤 걸었을까. 모자를 쓴 황소가 야구공을 던지고 있는 모습의 모자이크 벽화가 새겨져 있는 낡은 건물이 보였다. 이 낡은 건물은 1950년대 출판업이 활황이던 시절, 문성당 출판사와 합진 인쇄소가 있던 곳이다. 당시 이곳은 교과서부터 잡지, 문학 서적 등 전문 서적들을 출판했다. 주인용 사장이 운영했으며, 그의 장인 이설주가 공장장으로 있었다. 훗날 주인용 사장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수산업에 뛰어들어 현재의 사조참치 회사를 만들기도 한다.

 해설사에 따르면 무엇보다 이곳은 많은 문인들과 지식인들이 교류를 하고 즐겨 찾던 서점이었다고 한다. 이곳을 들락거리면서 그들이 교류를 했던 과거를 상상 하니 꽤 낭만적이었다.

 

시대가 새겨진 예술인의 옛거리

북성로와 향촌동 일대에는 1920년대부터 많은 문화예술인들이 사상을 교류하던 장소가 남아 있다. 예술인의 옛거리는 1950년대 6.25전쟁이 발발하던 시기에 피란 온 문학인과 예술인들이 모여 그들만의 문화를 탄생시키기도 했던 곳이다.

 ▲외화를 상영하던 송죽극장 ▲대구에 모인 문인들이 어려운 가운데 문인극을 열었 던 자유극장 ▲우리나라 최초의 성악가인 권태우 성악가가 자주 방문하던 송림식당 ▲벽면에 이중섭이 그려준 구상 시인의 시 출판기념 포스터가 붙여져 있던 꽃자리 다방 ▲이중섭 화백이 은지화를 자주 그리던 백록다방 ▲구상 시인이 '영남일보' 문화부장으로 있던 시절에 많은 문인들에게 술을 사준 대지바 등 곳곳에 역사의 흔적이 배어있었다.

 그리고 그 골목 끝에 다다를 때쯤에는 ‘르네상스 다방’이란 곳이 위치해 있었다. 과거 이곳은 벽면이 전부 레코드판으로 장식돼 있었다고 한다. 다방에선 항상 서양음악 소리가 흘러 나왔는데, 어느 날은 바흐의 무반주 첼로 소리가 들려 한 외신기자가 발걸음을 멈추기도 했다고 한다. 전쟁시대에 음악이 흘러나오던 골목. 나그네의 발걸음을 멈추기엔 부족함이 없었을 것이다.

 현재 이 장소에 위치한 골목들은 그저 낡고 볼품없어 보이지만, 당시에는 문인들이 그들만의 살롱거리를 만들어 시대에 대한 아픔과 고뇌를 얘기하던 거리였다. 말 그대로 문인들의 자취가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이었다.

 당시 문인들의 삶은 궁핍했다. 아동문학가의 선구자인 마해송 문인은 매일 같은 양말 한 켤레를 신었다고 하며, 박두진 시인은 베개 속에 있는 좁쌀로 연명했다고 한다. 문인들이 근대 문화를 꽃피웠던 낭만이 느껴지는 거리였지만, 동시에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으로 인한 시대의 아픔도 고스란히 느껴졌다.

 

[대구 문학예술인들의 발자취를 따라 걷다]

1951년 모나미다방에서..한솔,이효상, 바다

명금당 시계방에서 솟아난
『죽순』
 

 비좁은 골목들 사이를 지나 큰 골목으로 나오자 해설사 선생님은 건물의 벽면 옆에 우리를 세우셨다. 맞은편에 보이는 건물은 이윤수 시인이 운영하던 ‘명금당’ 시계방이 있던 곳으로, 해방 이후 최초의 문학 동인지 『죽순』이 발간된 ‘죽순시인구락부(클럽)’가 있던 곳이다.

 『죽순』은 1946년 창간호를 시작으로 잠시 전쟁으로 인해 휴간되기 전까지 12권을 발행하며 박목월, 이영도, 이효상 등 60여 명 시인의 230여 작품을 실었다. 특히 천상병 작가를 비롯한 작가들이 등단을 하기도 한 문학인의 활로였다. 문학인들이 모일 장소가 마땅치 않았던 시대에 명금당은 대구의 문인들이 작품 활동을 하거나 정보 교환을 하던 대구 문학의 산실이었다. 전기가 부족하던 시절, 이윤수 시인은 석유램프를 밤새 발로 돌려가며 잡지를 만들었다고 한다. 시인 이정호는 이곳을 ‘보들레르의 카페’라고 불렀다. 담배 연기가 자욱하고 전화가 없어, 골목에서 예술가들은 서로의 이름을 불러 찾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론, 건물의 외벽을 바라보며 그 모든 것을 상상하려니 조금 허망하기도 했다. 

 『죽순』은 월간지로 나오다 전쟁과 더불어 문을 닫게 됐고, 현재는 일 년에 한 번씩 발행되고 있다. 그 탄생지를 가보니, 『죽순』을 통해 등단한 여류 시조시인 이영도의 시조 「석류」가 생각났다. 다스려도 다스려도/ 못 여밀 가슴 속을// 알 알 익은 고독/ 기어이 터지는 추정// 한 자락/ 가던 구름도/ 추녀 끝에 머문다.

서문로 명금당 시절의 이윤수
죽순 창간호(1946.5)

 
  한국의 모스크바, 무영당 

 

 투어에 참여한 장미양 씨는 “평소엔 큰 길로만 다녀서 골목에 올 일이 없었는데, 해설가의 설명을 들으며 옛 자취를 찾아가니 그때 그 시절이 상상되고 공감된다”고 했다. 코스를 따라 움직이기 바쁘긴 했지만, 골목의 언저리마다 잠시 멈춰서서 평소엔 가늠조차 할 수 없는 과거의 것들을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걷다보니 건물의 문양이 특이한 무영당에 도착하게 됐다. 무영당은 개성 출신의 상인 이근무가 순수 조선 민족 자본으로만 만든 백화점으로, 고급 백화점처럼 직원들의 교육을 잘 시켜 서비스가 좋았다고 한다. 피아노가 있어 음악회가 열리고 주기적으로 미술 전시회도 열렸다. 이근무는 대구 문화예술인들과도 친분이 두터워, 아동문학가 윤복진, 작곡가 박태준, 이상화 시인 등 많은 문화예술인들이 이곳에서 시대와 예술에 대해 논했다고 한다. 그야말로 예술인 교류의 장이 됐던 것이다. 당시 이곳에서는 예술인들이 이데올로기를 논하고 저항적인 시를 자주 써서 ‘한국의 모스크바’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낡은 건물을 바라보며 과거의 빛나던 순간들을 그저 상상만 해 볼 뿐이었다.

1930년 무영당에서..이근무, 박태준, 윤복진

  

전쟁의 폐허에서 시대를 기록하다

 전쟁 후 전국의 피란지에서 예술인들은 대구, 부산으로 내려왔다. 그러나 불안한 시대에도 문인들은 예술의 끈을 놓지 않았다. 향촌동 일대의 문인들은 종군 문인단을 결성했다. 이호상 시인이 대장이었던 문총구국대는 (구)영남일보사에 사무실을 두고 활동했다. 우리는 바로 그 영남일보사의 옛터가 있는 곳에 멈춰 섰다. 그 시절, 종군 기자들이 회의를 하고 근처의 감나무집 식당에서 술을 걸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흔적은 찾아볼 수도 없이 빈 터만 있다. 장은지 씨(유아교육1)는 “개발된 건물과 다른 용도로 사용되는 건물이 많아서 역사적인 자취가 많이 남지 않은 것 같아 아쉽다”고 했다.

 투어를 마무리하고 다시 대구문학관으로 돌아가 지하의 음악감상실 ‘녹향’에 갔다. 그곳엔 할아버지 한 분이 계셨다. 어두운 가운데, 조명이 은은히 비치는 이곳엔 ‘네순도르마’가 울려 퍼졌다. 공연 실황이 보이는 모니터에 눈을 떼지 못하던 할아버지의 그 시절들을 추억해봤다. 논리가 논리로 작용하고 낭만이 낭만으로만 존재하던 그 날들을-

 

1925년경의 영남일보사 전경

 

[대구문학로드에 오늘의 ‘나’를 비춰 보다]

 대구는 근대 문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갖고 있다. 이 지역은 동인지 활동이 활성화돼 있고, 출판사와 인쇄소의 성장으로 근대 출판매체가 성행했던 곳이다. 이러한 흔적을 찾을 수 있는 대구문학로드가 아직 시작 단계에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서, 본지의 기자가 투어 과정에서 느꼈던 아쉬운 점과 궁금증에 대해 박승희 교수(국어국문학과)와 함께 이야기해봤다.

 무엇보다 문학로드는 일반인들이 공감할 수 있는 콘텐츠와 내용이 부족해 아쉬웠다. 문학로드투어에 참여한 우리 대학교 외국인 유학생 담락묘 씨(경영3)는 “문학을 통해 한국의 역사에 대해 알게 돼 좋았다”고 말하는 한편, “문학로드라는 이름과 달리 문학작품에 대한 설명은 부족했던 것 같다”고 했다. 이처럼 문학로드의 주요 설명 주체가 되는 문학인의 작품에 대한 설명도 필요해 보였다.

 또 골목 곳곳에는 대구 문인들의 이야기는 있었지만 그 흔적을 전문 해설사의 설명 없이 일반인이 찾기는 어려웠다. 도시재생과정에서 밝혀진 문학적 가치를 공간으로 재구성하는 것은 의미가 있지만 아직은 그 흔적들을 찾는 단계에 머물러 있는 듯했다. 박승희 교수는 “공간콘텐츠 복원 작업을 해야 한다”며 “그 과정에서 대구문학을 어떻게 보여줄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했다. 특히 오랜 전통을 갖고 있는 동인지 『죽순』과 같은 문학 콘텐츠에 대해, 단순한 사실 확인의 차원이 아니라 그 시작과 역사를 찾는 식의 관점과 목적의 재구성이 필요하다는 사실도 역설했다.

 한편 대구 문학로드를 따라 가다 보니, 다방에서 음악가, 문학가, 미술가 등 여러 분야의 예술인들이 자유롭게 교류했다는 이야기도 듣게 됐다. 오히려 지금은 예술의 경계가 더 뚜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에 대해 박승희 교수는 현대의 문화 분파주의를 지적하며 “장르 중심 문화적 인식에서 확장돼야 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대구의 문인들은 이상화나 이장희처럼 부유한 집안의 사람이 많았다. 가만히 있어도 잘 먹고 잘 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시대를 논하고 아파했다. 당시 문인들은 왜 끊임없이 질문하고, 이야기하고 글을 썼을까? 박승희 교수는 “그 당시 근대 지식인들은 문명 인식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열어보겠다는 자기 과제를 갖고 있던 사람들이었다”고 했다. 현재는 과거보다 먹을 것이 더 넘쳐나지만, 지금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과연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문학로드의 골목에 우리 자신을 비춰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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