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
풍경이 풍경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곰팡이 곰팡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여름이 여름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속도가 속도를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졸렬과 수치가 그들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바람은 딴 데에서 오고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오고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한 학기를 마무리 할 때가 왔습니다. 낮 기온이 벌써 30도를 웃돌고 있습니다. 더위가 정점에 오르는 여름-한낮의 세계는 종종 정물(靜物)의 풍경을 보여주지요. 움직임이 정지되는 여름-낮은 어떤 의지나 동력(動力)도 소멸시키는, 무력과 권태가 지배하는 세계입니다. 김수영이 이 작품을 쓴 때는 4·19 혁명이 실패로 끝났음을 분명히 안 뒤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벅찬 기대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전혀 바뀌지 않았습니다.
유사한 문형이 다섯 차례 반복되는 이 시의 전반부는 말도 안 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풍경이 풍경을, 곰팡이 곰팡-자신을 반성하는 일이 가능한가요? 여름이 여름-자신을 반성하면 여름이 덥지 않겠지요. 속도가 속도 자체를 반성한다면 속도를 낼 수 없을 테구요. 어처구니없는 내용을 반복한 이유는 바로 5행 때문입니다. 그것은 졸렬(좀스럽고 보잘것없음)과 수치(창피와 부끄러움)가 결코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는 진리를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졸렬과 수치가 스스로를 반성하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저 역시 시인의 진단에 동의합니다. 졸렬하고 수치를 모르는 자들이 그 자신을 진심으로 반성하는 것을 저는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럼 현실이 나아질 가능성은 전혀 없는 것일까요? 시인은 그 구원의 가능성을 “딴 데”서 찾습니다. 변화를 가져올 어떤 “바람”이 “예기치 않은” “딴 데”서 온다는 것이지요. 단, 전제는 저 풍경, 곰팡, 여름, 속도, 그리고 졸렬과 수치처럼 ‘절망도 자신을 반성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절망이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는 것은 절망의 열도를 고스란히 유지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절망’의 반대말은 ‘희망’이 아니라, ‘체념’이나 ‘자포자기’입니다. 절망은 비판과 비탄, 그리고 분노의 에너지가 살아 있는 열렬한 상태입니다. 비판과 슬픔이 생생하게 살아있을 때에만 비로소 이 지리멸렬한 무능의 세계로부터 우리를 ‘구원할 바람’이 불어올 수 있다는 것이지요.
여러분 개인에게, 그리고 우리를 둘러싼 작고 큰 사회에도 시원한 바람이 불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여름방학 건강하게 보내고 시원한 가을 교정에서 만납시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절망을 반성하지 마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