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회 천마문화상 평론부문 가작
제41회 천마문화상 평론부문 가작
  • 편집국
  • 승인 2010.12.03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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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날개」, 백가흠의 「귀뚜라미가 온다」에 드러나는 카니발 세계 - 키치적 호기심을 중심으로 - 양시내

 

 

 

서론

 

 

 

인간은 사유하는 주체인가, 욕망하는 주체인가.

인간은 인간의 행동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있을까. 우리가 무심코 하는 행동들 모두 우리의 심리상태나 과거의 경험들에 의해 필연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인간이 인간에 대해 궁금증을 품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렇기 때문에 오랜 세월 각종 문학작품이 영화, 그림 등에서 인간은 자신들의 다양한 군상을 표현하고자 했다. 우리가 소설을 읽거나 영화를 보며 그 속에 나와 있는 주인공들에 대해 공감하는 것은 우리 내부에도 그러한 심리와 경험들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학 작품도 마찬가지이다.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불수의적 기억들, 표현할 수 없는 욕망들을 작품 속에 펼쳐 놓는다.

중심주의의 해체는 포스트 모던주의와 같은 데카르트식 사유의 역이행을 만들어냈다.카니발적 사고는 이런 중심주의에 대한 반발에서 시작된다. 카니발이란 사회의 구성원 전부가 일정 기간과 장소에서 사회적 제약이나 규율들을 벗어나 자유롭게 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 공간으로서 모두에게 자유와 창의가 허락되는 일종의 무질서 상태이다. 카니발의 세계는 유토피아적 사고관을 향유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이상과 백가흠이 추구하는 카니발 세계와 그들의 키치적 호기심의 영역을 해석해보고자 한다.

 

 

 

 

 

 

 

 

 

 

 

 

 

 

 

 

 

 

본론

 

 

 

이상- <날개>

 

 

 

 

 

 

1. 키치적 호기심과 카니발 세계

 

 

 

카니발의 세계관은 자유와 평등이다. 평등하지 않은 계급구조, 본능을 억누르는 이성적 담론들은 정지되어 있다. 교양이라 불리는 경건한 자세, 겸손함 등은 사치이다. 다시 말해 카니발의 세계는 종교적 혹은 정치적 질서로 이루어진 사회적 악습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해방된 제 2의 삶이다.

이상의 <날개>는 공간의 의미와 등장인물의 행동반경 그리고 주인공의 내면세계로 이루어져 있다. 작품의 전반에 깔려있는 주인공의 심리적인 경향은 무기력과 우울함이다. 그가 밖의 세계와 소통하는 방법은 아내를 통해서이다. 방 안이 그의 ‘제 1세계’가 되는 것이다. 방 안에서 그는 자신을 박제해 버린다. 자신을 박제시킴으로써, 세상에 대한 시각을 숨기면서 내보일 수 있는 것이다. 세상의 이면에 존재하는 진실을 알고 있지만 박제된 시선으로 이를 숨기고 있다. 시선의 일방통행은 그의 내면 공간에 존재하고 있는 사사로운 감정과 욕망으로부터의 도피를 허락한다. 이는 그러한 인식을 하는 내면 공간으로부터의 초월을 꿈꾸는 그의 심리를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아내와 접촉하는 낯선 이들의 존재를 부정하고, 아내의 직업을 부정하는 행동 역시 자신을 제 1세계에 가두어버리는 행위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박제된 천재성은 키치적 호기심으로 변한다. 키치적이라는 말은 ‘누구나 손쉽게 구할 수 있는 가볍고 저속한 취향의 양식’이라는 의미이다. 즉 그가 외면하려 했었던 외부의 세계인 셈이다. 이는 ‘제 2세계’로 표상된다. 주인공은 무작정 아내가 주는 돈을 받아 길거리를 방황한다. 외부세계와의 접촉은 제 2세계로의 진입을 뜻한다. 소통의 벽을 허물기 위해 노력하는 그의 모습은 일종의 활동적 행위로 간주된다. 무기력했던 주인공이 자유의지로 무언가를 실행했다는 것은 그의 숨겨져 있던 키치적 호기심이 이성적 사고를 누르고 본능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그는 거리를 배회하며 자신의 삶에 대해 의식하기 시작한다. 지배적 이데올로기에 갇힌 현재의 가치체계를 전복시키고 보다 역동적인 변화를 중시하는 카니발적 사고관에 부합하고 있다. 걱정도 없고, 고민도 없었던 주인공이 사유를 한다는 것은 제 2세계, 즉 카니발 세계로의 회귀를 뜻한다. 진입이 아닌 회귀라는 단어를 선택한 이유는 인간의 본능적 요소가 담긴 카니발 세계는 사회적 담론이 존재하는 이성적 세계에 편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작품 속에서 정확한 분류가 힘든 공간은 바로 ‘아내의 방’이다. 금단의 공간이기도 하고, 서로의 관계를 확인하는 곳이기도 하고, 아스피린과 아달린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는 곳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아내가 매춘부 일을 행하는 장소이다. 매춘부는 성적으로 금기시되는 경향이 있다. 이를 보면 제 2세계로 정의하는 게 맞다. 하지만 이는 외부인들의 관점이지 주인공의 관점은 아니다. 주인공의 관점에서 아내의 방은 제 1세계이다. 아내의 직업을 부정하는 곳이며, 아내가 자신에게 주었던 약이 아스피린이 아닌 아달린이라는 걸 깨닫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주인공이 부정하려고 했던 현실이 보다 명확한 형태로 다가온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아내는 방 안에서 번 돈과 금고를 주인공에게 준다. 하지만 금고의 열쇠는 아내가 가지고 있다. 아내는 왜 열쇠를 주지 않았을까? '열쇠'에는 이중적 함의가 있다. 남편이 스스로 능동적 의지를 찾길 바라는 아내의 마음, 즉 긍정적인 함의와 처음부터 남편의 능동성을 배제하고 있는, 부정적인 함의가 있다. 소설이 후반부로 갈수록 아내의 이런 행동은 무능력함과 무기력함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남편이 능동적인 의지로 다시 살아나길 포기했기 때문임을 암시한다. 아내는 열쇠라는 수단이 목적의 변화를 초래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그로부터 알 수 없는 안도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아내의 관점에서도 그녀의 방은 주인공에게 제 1세계였을 뿐이다. 덧붙여 주인공이 금고를 벙어리라 이름 붙인 이유도 스스로의 능동성을 포기했음을 추측하게 한다.

작품을 역사적인 방향으로 해석한다면, 일제치하에 놓여있던 우리나라의 현실이 제 1세계이고, 일제치하에서 해방되어 그들만의 규칙 속에서 살아가는 삶이 제 2세계인 것이다. 이는 고등학교 때 가장 많이 사용되는 작품 해석이었다. 이상 역시 지식인 중 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추측도 어느 정도 일리는 있다고 본다.

키치적 호기심이 가볍고 저속한 취향의 양식이라 정의되고 있다고 해서 계급이 낮은 민중들에게만 존재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사실 사람의 본능 자체가 저급 양식이다. 오이디푸스적 성적 욕망, 죽음에 대한 열망, 잔인함과 같이 비이성적으로 보이는 요소들이 우리 모두에게 내재되어 있다는 말이다. 정리하자면, 우리가 상식적으로 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지어진 것들의 대부분이 인간의 본능이다.

 

 

 

 

 

 

2. 주인공의 자유의지, 카니발 세계로의 회귀

 

 

 

주인공의 제 2세계로 진입이 카니발 세계로의 회귀라 해석한 이유는 <날개>의 결론을 긍정적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그의 사고관이 키치적 호기심을 중점으로 하고 있다고 앞서 언급했었다. 키치란, 구체적이고 생생한 현실을 삼켜버린 후 미화되고 꾸며지고 날조된 조형적 삶으로 게워내는 능력을 가졌으며, 이러한 현상은 죽음에 대한 갈망을 연상시킨다. 왜냐하면 사비나의 ‘이중표현’처럼 은밀하고 구체적 진실을 내부에 감추고, 시공간에 따라 다른 형태로 변하는 현학적 거짓말을 표면에 내세움으로써 자기 자신의 진짜 삶은 사라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포장하고 보기 좋게 색칠된 삶은 자신의 리얼리즘을 부정하는 것이고 이는 곧 죽음으로 귀결되고 있다는 뜻이다.

프로이트는 인간은 성욕뿐만 아니라 히스테리나 열등의식을 잠재우기 위해 죽음을 지향하는 성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죽음을 나르시스적 열망으로 간주하고 있다. 보통 사람들은 극적인 상황에 처해있을 때 자멸의 충동을 느낀다. 그것이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상관없이 말이다. 알고 있지만 말할 수 없는 은밀한 진실을 은폐하고, 자신의 진짜 삶을 부정하며 자살을 택한 주인공의 선택은 그의 박제된 천재성으로부터 유리된다. 무기력한 그가 순수한 자신의 자유의지로 행한 행동은 그가 지향하는 사고관을 의미한다. 그가 행한 ‘행위’자체에 초점이 맞춰져서는 안 된다. 자살은 조형의 방패막이로 우리의 눈을 속이는 수단에 불과하다. 그가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사고해야 한다.

인간은 자신이 어떻게 세상과 관계 맺고 있는지를 사유한다. 세상에 숨겨져 있는 진실들, 환상의 틈새에 자리 잡고 있는 사실들, 그 균열과 부재 속에서 우리는 과거로의 회귀를 꿈꾼다. 생략에 의해 가려진 혹은 착오적인 풍요 속에 은폐된 그 빈 공간들로 말이다. 우리는 현실과 환상의 간극을 통해 자신의 위치를 짐작한다. 그것이 소설 속 키치의 기능이다.

 

 

 

 

 

 

백가흠<귀뚜라미가 온다>

 

 

 

 

 

 

1. 카니발 세계를 위한 동화적 상상

 

 

 

어렸을 때 회전목마란 단어는 내게 묘한 흥분을 가져다 주는 것이었다. 금색 봉에 몸을 관통 당한 백마 위에 올라타 보는 세상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황홀했다. 그리고 더없이 두렵기도 했다. 아찔했다. 어리고 불완전한 시각이 담아내는 세상은 흐릿하고 몽환적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잘 기억나지도 않는 꿈과 같았다. 회전목마에서 내리고 나면 그것은 느낌으로만 남을 뿐, 어느 것 하나 기억나지 않았다. 살인도 회전목마도 처음이 무섭고 두려울 뿐 익숙해지면 그저 그런 게 되어 버린다. 백가흠의 카니발 세계에는 ‘살인’ 이라는 잔혹한 현실이 있고, 그 속에는 어린아이가 살인을 한다면 이라는 가정법이 있다. 그의 키치적 호기심은 인간이 인간을 살해한다는 공식이 아닌 어린아이가 살인을 한다 라는 비도덕적인 가제에서 시작된다.

‘2시31분’의 사내아이가 남자를 죽인 것은 ‘직접적 살인’에 해당된다. 여기에서 잔혹한 현실은 살인 자체가 아니다. 기타 줄로 남자를 죽이고 화장실에서 남자의 몸을 토막 낸 후 그곳에서 샤워를 하고 돌아와 다시 그 기타 줄을 기타에 연결하는 아무렇지 않은 사내아이의 행동이다. 학교에서 친구들과 같이 어울리고 선생님 말씀을 잘 들어야 하는 평범한 사내아이가 다른 또래 아이들이 하지 않는 행위를 하는 게 무서운 것이다. 동심의 세계와 살인 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조합은 더욱 더 사람들을 소름 끼치게 만든다. 정상과 비정상의 바운더리를 한정할 수 있는 기준은 없다. 살다 보면, 어느 정도 공통점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들이 더 많지 않을까, 싶었는데 각자마다 기준이 너무 다르고, 내놓는 의견도 다르고, 그리하여 절대적인 해결이란 없는 문제들이 더 많다는 생각을 한다. 세상의 절대적인 답을 아는 존재가 있지 않는 한 영역을 구분하는 잣대는 명확하지 않게 된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백가흠의 카니발 세계에서는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해지는 것을 종용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세계에서는 사이코 패스도 존재한다. '핫'보다는 '쿨'이 미덕인 시대에 모두가 무감각해지려고 애쓰는 사람들 사이에서 사이코 패스들이 가진 비인간성을 숨기기란 너무나 쉬운 일처럼 보인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이코 패스적인 요소들을 숨기며 살아간다. 그것은 내재되어 있는 본능이지만 드러낼 수 없는 키치적 호기심인 것이다. 작가는 단지 그 부분을 소설로 옮겼을 뿐이다.

백가흠 소설의 내용들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완전한 공상은 아니다. 즉 리얼리즘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어쩌면 그는 오히려 각박한 현실을 들추어 순수함이 훼손되고 망가져 가는 모습을 여과 없이 묘사해 나가는 방법으로 불편한 진실을 드러내려 했을지도 모른다. 삶의 지리멸렬한 단면을, 잊고 싶은 적나라한 현실을 파헤침으로서 ‘충격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우리가 TV속 불우이웃돕기 계기판의 숫자가 올라가는 것을 보고 자본주의적 위안을 얻는 것처럼 결국 사람들은 인정하고 싶지 않은, 보고 싶지 않은 현실들을 보지 않기 위해서 매트릭스의 세계로 들어가고 있는 것 뿐이다.

그의 소설 속 카니발세계는 상징과 실제의 틈에 난 구멍과도 같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부분들, 알고 싶지 않았던 현실들을 너무나 적나라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 구멍을 통해서 우리는 현실에서 묵인되어 있었던 팩트들을 보게 된다. 그 사실을 보고 우리는 매트릭스의 환상에 머무를 것인지 아니면 상상의 껍질을 깨고 현실을 인정할 것인지를 선택하게 되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백가흠 소설 속 카니발 세계는 동화 ‘헨젤과 그레텔’ 과 비슷하다. ‘헨델과 그레텔’의 원작을 보면, 빵을 굽고 과자의 집으로 유인한 사람은 마녀가 아니라 일반 사람이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이 죽인 것은 마녀가 아닌 인간이라는 말이 된다. 또한 집으로 돌아가 자신들의 버린 계모에게 복수를 하며 아이답지 않은 행동들을 보여준다. 그만큼 동심의 파괴는 무서운 것이다. 한 마리의 개미를 죽이듯이 사람을 죽이고, 더욱 더 무서운 것은 그 행위에 대해 자책감을 느끼지 못한다는 점이다. 백가흠은 동심 이라는 익숙한 명사에 대한 낯선 해석을 제시한다.

어린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멀쩡한 잠자리를 구경하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잠자리 날개를 찢는 것을 본 적이 있다. 한 마디로 백가흠의 소설이 그렇다.

 

 

 

 

 

 

2. 카니발 세계의 포장된 죽음

 

 

 

백가흠은 죽음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보통 예술가들은 직접 보여주기 보다는 거리두기를 통해 낯설게 하기를 시도한다. 기존의 의미를 벗어나 낯설게 표현함으로써 의미를 극대화 하는 것이다. 그의 작품에도 낯설게 하기는 존재한다. 다른 방식, 다른 사유로 말이다. 그렇다면, 백가흠의 카니발 세계는 죽음일까? 흔히 죽음은 고통스러운 상황을 도피하기 위해 쓰이는 소재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카니발 세계는 단순한 도피처가 아닌 죽음을 자연적 현상으로 받아들이는 곳이다.

어린 아이가 살인을 저지르는 모습을 관찰자 시점으로 바라보며 무심하게 아이의 행동이나 살해 방식을 서술한다. 마치 관객과 주인공 사이에 유리 하나를 세워놓고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유리는 겉에서 볼 순 있지만, 유리 속의 작품은 만질 수 없다. 유리는 속 안의 물체를 지키는 곳일 뿐 아니라 그것들을 엿보게 하는 진열장이기도 하다. ‘보기’를 유도하고 또한 보장하며 유리로 밀폐된 공간은 폐쇄 공포증을 떠올리면서 그 속에 담긴 이야기를 극적으로 만든다. 무엇보다 작품을 보는 관객과 작품 사이를 왕래하면서 관음증적 충동을 마음 놓고 충족하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작품 이면에 숨겨져 있는 코드가 그가 가지고 있는 ‘키치적 호기심’이다. 죽음은 언젠간 맞이해야 할 자연적인 순리이지만, 그 속에는 숭고함과 신성함이 있다. 그는 우리를 죽음의 세계로부터 분리시켜 놓는다. 즉, 백가흠은 있는 그대로의 죽음을 표현하면서 자신의 키치적 호기심을 불어넣어 우리의 세계와 그의 세계를 차단해 죽음을 숭고하며 신성한 의식으로 만든다. 일종의 죽음에 대한 성찰인 셈이다.

소크라테스는 삶에 대한 천착을 버리라고 말했고, 하이데거는 초연히 죽음을 받아들이는 자세가 진정한 존재론적 사유라고 주장했다. 백가흠의 카니발 세계는 하이데거의 죽음론과 비슷한 면이 있다. 백가흠의 죽음이 현실세계에서 배제되어 있다면, 우리 시대의 죽음은 지나치게 과잉되어 있다.

 

 

 

 

 

 

 

 

 

 

 

 

 

 

 

 

 

 

 

 

 

 

 

 

 

 

 

 

 

 

 

 

 

 

 

 

 

 

 

 

 

 

 

 

 

 

 

 

 

 

 

 

 

 

 

 

 

 

 

 

 

 

 

 

 

 

 

 

 

결론

 

 

 

카니발이라는 말은 보통 긍정적이며 활동적인 의미로 쓰인다. 모든 축제에 카니발적 요소가 담겨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작품과 마찬가지로 축제 속 카니발의 의미 역시 제 1세계와 제 2세계로 나누어진다. 제 1세계는 공적인 영역이다. 국가에서 행하는 공적인 축제는 계층질서와 정치, 도덕적 가치 규범을 견고히 하는 수단이 된다. 군대의 퍼레이드는 대부분 국가의 위상이나 권위를 높이는 행위에 속한다. 반대로 제 2세계, 사적인 영역의 축제는 앞서 말한 절대이성의 논리와 반대되는 요소들의 집합체이다. 위계질서의 소멸, 자신의 진정성에 대한 탐색, 질서의 파괴 등이 그것이다. 축제의 제 2세계에는 키치적 즐거움이 존재한다. 색소 사탕에 열광하던 어린 시절, 도시의 화려한 네온사인을 둥글게 모아 담아 놓은 듯한 대관람차의 풍경에 넋을 잃었던 적이 있다. 몽환적이면서 왠지 모를 스산함이 담겨 있었다. 세상의 모든 물질, 물체에는 이면이라는 게 존재한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본능이기도 하다. 두 작가는 죽음에 대한 이중적 잣대를 제시한다. 이상과 백가흠, 그들의 키치적 감수성은 자신만의 카니발 세계를 만들었다.

인간의 심리는 가변적이기 때문에 어느 한 단면을 보고 해석하기는 힘들다. 서사를 통해 인간의 내면적 본능에 대해 정의 내리는 것은 기실 허상일 수도 있다. 우리가 소설에서 기대할 수 있는 영역은 공간의 분위기뿐이다. 공간이 보여주는 아우라 그 너머에 진실이 있다. (*)

 

 

 

 

 

 

 

 

 

 

 

 

 

 

 

 

 

 

 

 

 

 

 

 

 

 

 

 

 

 

 

 

 

 

 

 

 

 

 

참조

 

 

 

네이버/다음 백과사전- 카니발 세계와 키치의 정의

소설의 시·공간 연구- 이상의 <날개>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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