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빨간 방울토마토를 입에 넣어 잘근잘근 씹었다. 씨앗이 톡톡 터지며 새콤하고 달짝지근한 즙이 입안에 감돌았다. 토마토는 데쳐 먹는 것이 더 영양가 있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아무렴. 창문을 열어놓은 틈 사이로 옅은 바람이 머리칼을 헤집었다. 잘 가요. 앉은뱅이 방울토마토 씨, 중얼거리다가 문득 내 속에 소화되는 중인데 그와 작별을 고할 수 있는가에 대해 고민했다.
카페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게 된 것은 단순히 돈이 부족해서였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글을 쓰는 것밖엔 없는 문창과 졸업생이었으므로. 아르바이트 구직 앱에서 아무 아르바이트나 지원했다.
[직원 구함/월~토/오전 9시~오후 6시까지]
최저 시급(2024년 기준): 9,860원
수습 기간 없음. 휴식 시간 1시간.
만 25세 이상부터.
모든 것이 딱 들어맞는 알바였다. 막 스물여섯, 생일을 넘긴 참이었고 근처에 회사도 없었으며 근방에 학교도 위치하지 않은 터라 어린 자녀를 데리고 오는 학부모도 없을 것이라 여겼다. 카페 주인에게서 곧바로 연락이 왔고 면접 날짜가 잡혔다. 나는 되는대로 빠르게 일하고 싶다는 의사를 남겼지만, 카페 사장은 우선 얼굴부터 보자는 식으로 답했다.
카페는 15평 남짓한 크기로 테이블이 다섯 개였다. 주문하는 카운터 옆 벽면에 창고라고 적힌 문이 있었고 그 뒤로 가려져 있던 일인 석 하나가 놓여 있었다. 아, 테이블이 총 여섯 개였구나. 카페 구석구석 이름을 알 수 없는 식물이 이파리를 길게 늘어트린 채로 자라 있었고 카페 사장이 정성스레 관리하는 것인지 푸릇한 색감이 이목을 끌었다. 저것들에게 모두 물을 주어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낮은 목소리가 생각을 깼다.
-어떤 이유로 카페에 지원하셨나요?
-돈이 부족해서요.
-그게 다인가요?
그것 말고 더 필요한 것이 있나요? 사장의 말에 반문했다. 아니죠. 딱히 뭐가 더 필요하진 않죠. 까슬까슬한 턱수염을 기른 사장은 하늘색 셔츠와 검은 슬랙스를 입고 있었다. 어디 하나 흐트러진 모습이 없어 내 앞에 건네준 커피를 소리 나지 않게 천천히 머금었다.
-좋아요. 일해봅시다.
-네?
-보건증 있다고 하셨죠?
-네…. 그렇긴 한데요.
-내일 그래도 일은 배우셔야 하니까 한 시간 일찍 나와주세요.
얼떨떨하게 카페 문을 열고 나왔다. 이렇게 속전속결로 누군가의 승낙을 받아본 경험이 있었던가. 카페 문에 달려 있던 도어벨이 잠잠해질 때까지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원두 그라인더에 먼저 포터 필터를 끼운 뒤 원두가 잘 갈린 거 확인해요. 그다음에 커피 추출기에 끼워 넣고 에스프레소 버튼 누르면 돼요. 쉽죠? 사장은 그렇게 이야기하더니 겉옷을 챙겨 입었다. 나머지는 저기 레시피북에서 비율 맞추면 됩니다. 저울 영점 맞추는 것도 잊지 마시고요. 사장인 ‘커피콩’은 내게 전적으로 맡긴다는 듯 홀연히 가게를 나섰다. 막막한 생각이 들기도 전에 딸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첫 손님이 들어왔다.
빈티지한 색감의 갈색 가죽 재킷을 걸쳐 입은 그는 색바랜 청바지를 워커 안에 구겨 넣어 코디를 완성했다. 외진 비탈길 골목에 있는 개인 카페와 잘 어울리는 스타일리쉬한 사람이라고 느껴졌다. 그는 콜드브루 한 잔을 시킨 뒤, 카운터 벽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 구석으로 가 앉았다. 콜드브루 원액을 정해진 용량에 따라 플라스틱 컵에 옮겨 담았다. 물을 따르고 나서 얼음을 넣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얼음을 조심히 쏟아 넣었지만, 커피가 튀는 걸 막을 순 없었다.
손님, 주문하신 콜드브루 한 잔 나왔습니다. 소설을 쓰겠다고 무작정 들어간 커피숍에서 듣던 안내 음성을 내가 따라 하려니 어딘가 목이 막혔다. 그는 가볍게 목례를 한 뒤 자리로 돌아갔다. 아침부터 커피숍에 오는 건 할 짓 없는 사람이나 가능한 일일 텐데. 나는 그를 ‘담쟁이넝쿨’이라고 이름 지었다. 흘린 커피를 행주로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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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작정 소설을 쓰겠다고 아침부터 자리 잡은 커피숍에서 얻은 것이라곤 긴 밤을 뜬눈으로 지새울 수 있는 카페인과 창 너머로 보이는 덩굴장미처럼 굽은 허리와 목뿐이었다. 무언가를 쓰고 싶다는 생각은 가득한데 어떤 문장도 써지지 않았다. 그저 깜빡거리는 입력창만 뚫어지게 노려봤다. 사색에 잠겨있으면 가끔 핸드폰에 알림이 울렸다. 구직 정보. 월급 250……. 혜주, 여기 어떠니? 엄마-나는 그녀를 ‘완벽한 타인’이라고 이름 지었다-가 보낸 문자였다. 나는 손가락을 들어 올려 알림을 꾹 눌렀다. 읽을지 말지 고민하다가 쓱 밀어 지웠다. 구석에 자리 잡은 남자도 나 같은 생각을 했을까. 취직하라는 연락을 받지 않았을까. 잡생각이 무성하게 자라날 때쯤 다시 도어벨이 울렸다.
테이크아웃을 해가는 손님이 종종 들리던 오전과 다르게 오후가 되자 매장 안이 북적이기 시작했다. 이곳저곳에서 각자의 이야기가 피어올랐다. 그들의 이야기가 시끄럽게 갈리는 원두 그라인더를 뚫고 내 귓속으로 들어왔다. 주된 이야기는 직장이나 대인관계에 대한 말들이었다. 서로 존댓말을 하며 힘드시겠어요, 하는 말이 오고 갔다. 저런 속앓이를 과연 존칭을 써가며 대하는 사람에게 이야기할 수 있는지 의문스러웠다.
어머 괜찮아요? 컵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커피숍이 웅성거렸다. 작은 가계에 요란스러운 이목이 한곳으로 집중됐다. 나는 곧장 창고로 들어가 대걸레를 손에 쥐었다. 나뒹굴고 있는 얼음을 손으로 줍고 컵에 담았다. 죄송해요, 연신 사과하는 손님에게 아, 괜찮습니다. 가볍게 목례하고 마저 정리했다. 나뒹구는 얼음을 다시 컵에 담을 때 손님을 ‘흙먼지’라고 생각했다. 커피를 쏟지 않은 맞은편 이는 괜찮아요? 물으며 빨대를 입술에 가져다 댔다. 그녀는 ‘빨간 구두’라고 이름 붙였다. 나는 발을 동동 구르는 ‘흙먼지’에게 새 커피를 내어주고 싶어 괜히 커피 추출기를 바라봤다. 하지만 이곳은 내 카페가 아니었다. 주인은 따로 있었다.
소란스러운 와중에도 일인 석 자리를 차지한 그 남자, ‘담쟁이넝쿨’은 유유히 사람들을 관찰하고 있는 듯했다. 다리를 꼬고 앉아 한 손엔 커피를 들고 사람들이 유심히 지켜봤다. 나와 눈이 마주쳐도 시선을 피하지 않아 결국 내가 고개를 돌렸다. 창고 한편에 있는 개수대에서 걸레를 빨고 나왔다. 가만, 지금 시간이 몇 시인데 저 사람은 아직도 이곳에 있는 걸까. 지금이면 배가 고파서라도 돌아갈 텐데. 의뭉스러울 때 그가 카운터 앞에 섰다. 베이글 샌드위치 하나요. 카드를 내민 그의 손이 뚫어져라 바라봤다.
사장이 필요할 때 참고하라는 레시피북을 펼쳐 베이글 샌드위치 조리법을 찾았다. 빵을 반으로 가르고 햄과 양상추 치즈를 넣으면 얼추 완성되는 듯했다. 오븐에 넣어 데워지기만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사람들의 목소리는 매서웠다.
-글쎄, 그이가 돌연, 귀농을 하고 싶대요.
창가 쪽 이인석에 앉은 여자가 말을 꺼냈다. 단발 정도 기장에 굵은 파마 했고 알이 작은 진주 귀걸이가 눈에 들어왔다. 딱히 결혼반지로 보이는 걸 끼지 않았지만, 손에도 굵고 얇은 반지가 가득했다. 액세서리가 화려한 대신 옷은 검정 셋업으로 포멀한 것처럼 보였다. 도시와 딱 들어맞는 여자와 다르게 이곳은 온갖 이름 모를 풀로 장식되어 있었다. 여러 방향으로 제멋대로 뻗어나간 푸른 이파리들이 자꾸만 여자의 뒤통수를 건드렸다. 여자는 앞으로 의자를 당겨도 봤지만 곧게 뻗은 그 식물은 집요하게 여자를 괴롭혔다.
-잘만 다니는 회사를 때려치우면 어쩌자는 건지……. 애들 다 키웠다고 나 몰라라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덜컥 시골집을 계약할 거라고 선전포고하더라고요.
-농사하는 것 어렵지 않아요? 많이 찾아보고 가야 할 텐데…….
-농사는 뭐……. 그런데 거긴 벌레가 많잖아요.
여자를 마주 보고 앉은 또 다른 여자는 확실히 검소했다. 그녀는 ‘살충제’의 비위를 애써 맞추고 있는 듯했다. 둘은 대화하고 있었지만, 분명히 상하관계가 있었다. ‘살충제’의 컵이 거의 바닥을 드러나고 있을 때 그녀의 앞에 앉은 ‘개미’의 컵은 반절 이상 남아있었다. 이제 자리에서 일어나죠. ‘살충제’가 이야기를 꺼냈을 때 오븐이 띵 소리를 냈다.
‘담쟁이넝쿨’이 오븐이 울린 소리에 맞춰 카운터 앞에 마주 섰다. 가져가면 될까요? 나는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카운터 앞에 놓인 냅킨 더미에서 몇 장을 꺼내더니 다시 구석으로 사라졌다. 그때 사장이 당부한 것이 떠올랐다. 그에게서 나는 은은한 향기 때문에 ‘커피콩’이라고 이름 붙인 이유와 더불어 그가 남긴 당부도 한몫했다.
-퇴근하기 한 시간 전쯤 모아둔 커피 찌꺼기를 화분에 먹여주세요.
먹여주세요. 딱 그렇게 표현했다. 땅거미가 져 식물이 만든 그림자가 길게 뻗었다. 그림자가 이리저리 뻗는 걸 보니 마치 식물이 움직일 수 있다고 믿게 만드는 느낌이었다. 언젠가 숏폼에서 걸어 다니는 나무에 대해 본 적이 있었다. 다만 너무 빠르게 지나친 것이라 이름도 서식지도 아무것도 기억에 남지 않았다. 화분 위에 커피 찌꺼기를 뿌리고 그 위에 물을 뿌렸다. 이 좁은 공간에 크고 작은 화분이 열댓 개 정도 되는 것 같았다. 물이 화분에서 천천히 자취를 감추는 것을 보니 나도 목이 말라왔다.
-커피 찌꺼기를 꾹꾹 눌러야 식물들도 좋아해요.
나는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당황했다. 아까 콜드부르와 베이글을 시켰던 그 남자였다.
-아, 감사합니다.
-제가 이곳 단골이거든요.
-그렇군요…….
-어쩌다가 일하게 되셨어요?
-그냥, 뭐……. 공고 보고…….
나는 괜히 말끝을 흐렸다. 그도 더 이상 말이 없는 듯했다.
-이곳은 참 편안한 곳이에요.
-편안하다고요?
-불편한가요?
-조금 불편하던데요.
너무 많은 것을 이야기한 것 아닌지 아차 싶었다.
-그래도 남들의 이야기를 공짜로 들을 수 있다는 건 좋은 일이죠.
나는 서둘러 그의 자리를 정리했다.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남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게 대체 무엇이 좋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려운 점은 없으셨어요?
카페 테이블을 정리하고 바닥을 대걸레로 닦고 있을 때 ‘커피콩’이 짤랑거리는 도어벨과 함께 들어왔다.
-어려운 점은 없었어요.
-힘든 점은요?
-그것도 없었어요.
-잘 맞았나 보네요.
여기서 무슨 말을 더 이어야 할지 몰라 대걸레 빨고 올게요, 하곤 ‘커피콩’을 비켜 지나갔다. 카운터로 들어가기 전 ‘담쟁이넝쿨’이 아직 자리에 앉아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몇 입 남긴 베이글 샌드위치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다음으론 마치 의자와 하나가 된 듯 흐물거리는 그의 상체와 다리를 꼰 채로 가게 전반을 노려보는 시선이 나를 강렬히 자극했다. 누군가를 엿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아직 마감까진 4시간이나 더 남았고 내가 지금 해야 할 일은 대걸레를 빠는 일이었으므로 창고로 발걸음을 옮겼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가게를 나섰다. 가만 생각해 보니 일은 한 건 나이지 않나 싶었다. 이미 말을 해버렸고 돌이킬 수 없었다. 이런 자잘한 말실수에 대해 상대는 깊은 생각을 할까, ‘커피콩’은 생각을 많이 하는 사람일까, 알 순 없었지만, 집으로 가는 내내 내가 말한 ‘수고하셨습니다’를 끝내 잘라내지 못했다.
-
아파트에서 투룸으로. 투룸에서 원룸으로. 베란다가 있는 원룸에서 창이 큰 원룸으로. 그러다 코딱지만 한 창이 나 있는 원룸으로. 집이라고 불린다고 해서, 누울 곳이 있다고 해서, 모든 곳이 집인 건 아니었다. 정말 쉴 수 있는 곳이 맞나. 내가 집과 마음을 맞대었는가. 가장 중요한 것은 창밖 풍경과 햇볕이 길고 오래 방 안을 내리쬐는가. 나는 점점 음침하고 음울한 공간으로 쫓겨나고 밀려났다. 침대에서 눈을 뜨면 누렇게 뜬 벽지가 씻으러 들어간 화장실에 피어오른 곰팡이가 시야에 가득 찼다. 얼룩이 벽을 타며 짙어져 이 집을 집어삼키게 된다면 집주인이 과연 누가 될까. 실상 세입자이지만 지금 이 집에 어떤 부분은 내 권리를 요구할 수 있지 않나. 집주인에게 곰팡이가 피었어요, 벽지가 누렇게 떴어요, 물론 그렇게 이야기할 배짱은 없다. 꿉꿉한 냄새를 떨치기 위해 룸 스프레이를 뿌렸다. 싸구려인 탓에 향은 금방 날아갔다.
-일찍 오셨네요.
-집이 근처라서……
문을 열자 딸랑이는 도어벨 소리와 함께 ‘커피콩’의 인사말이 들렸다. 나 또한 반갑게 받아치고 싶었으나 말을 끝까지 잇지 않았다. 이곳에 있는 빌라는 대부분 시설이 좋지 못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피곤하시진 않겠어요. 오늘은 커피 찌꺼기는 됐고 그냥 물만 주시면 돼요.
‘커피콩’은 화분을 가리키며 이야기하고는 가계를 떠났다. 아침에는 손님이 적었다. 가게를 청소나 할지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어디선가 무, 무, 하고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의 근원지를 생각해 보니 창고 쪽이었다. ‘담쟁이넝쿨’이라면 아직도 그 자리에 있을 것 같다는 막연한 상상이 뇌리를 사로잡았다. 고작 열 발짝이면 도착할 거리를 천천히 멀리 돌아갔다. 내가 본 것은 의자에 꼭 붙은 ‘담쟁이넝쿨이었다.’
-제게 물을 주시겠어요?
‘담쟁이넝쿨’은 화분에 발을 넣은 채로 점점 졸아들고 있었다.
-‘커피콩’이 화분을 주신 건가요?
-‘커피콩’이요?
-아, 사장님이요…….
-네, ‘커피콩’님께서 남는 화분을 선물로 주셨어요. 저랑 어울리나요?
-네. 어울리는 것 같아요.
그가 한 때 발이자 지금은 뿌리가 된 것을 담은 화분은 빈티지한 감성을 풍겼다. 원색이 사용되어 강렬하게 시선을 사로잡았고 그의 이미지와 꽤 어울린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담쟁이넝쿨’이 입가에 미소를 짓자 줄기로 번해 가고 있는 듯한 그의 팔이 조금씩 흔들렸다. 하반신은 어느덧 녹색이 되어 옷이 벗겨져 있었고 상체만 의자에 간신히 의지하는 중이었다. 어쨌거나 별명을 지어주는 습관을 ‘담쟁이넝쿨’에게 들킨 것만 같아 말을 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아프진 않나요?
-아프진 않아요.
매장에서 쓰는 유리컵에 물을 담는 도중 어제 쓰다 남은 커피 찌꺼기가 생각났다. 커피 찌꺼기를 챙겨 그의 발이자 뿌리 부분이 보이지 않도록 꾹꾹 눌러 담았다.
향긋해서 좋네요. 그의 연약한 몸-몸이라고 해야 할지 줄기라고 해야 할지 알 수 없다-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런가요? 그는 내 물음에 저는 커피 향을 좋아하거든요, 하고 답했다. 사장님한테서 커피 냄새가 자주 나서 ‘커피콩’인 건가요? 네, 그래서 ‘커피콩’이에요. 그럼 전 뭔가요?
나는 그의 질문에 대답을 해주어야 할지 잠시 고민하다 ‘담쟁이넝쿨’, 하고 뱉어버렸다.
-‘담쟁이넝쿨’이요?
-네. ‘담쟁이넝쿨’
-왜요?
-그냥 저랑 비슷한 백수일 것 같았어요.
-그럼, 본인의 별명도 있나요?
-전 없는데요?
-그럼, 불공평하지 않나요.
-한번 만들어 볼게요.
그는 좋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다리 부분은 어느덧 하나로 합쳐져 갔다. 하반신은 어느덧 연녹색으로 변해 살구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전, 이곳이……. ‘담쟁이넝쿨’은 이제 말을 길게 잇는 것이 힘들어 보였다. 그럼에도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곳에선, 사람들을, 지켜볼, 수 있어, 좋아요. 그렇게 이야기하며 발밑에 뿌린 물이 시원한지 손이자 이파리가 살살 흔들렸다. 사람들을 지켜보는 것을 좋아하나요? 내가 그에게 묻자, 그는 또 입을 열었다. 재미, 있잖아요, 제가 모르는, 다른 이의, 삶이. 내가 살아가는 것, 그 이상으로 많은, 사람들이, 함께, 저마다의 이야기를, 떠들고, 듣고, 웃고, 울고, 갖가지, 감정을, 가진다는 게. 카페는, 이야기, 듣기, 참, 좋은 곳, 이에요.
-인간으로 사는 삶이 끝난다는 게 두렵지 않나요?
불쑥 이 문장이 내 입에서 튀어나왔다. 고개를 바닥으로 떨구고 그의 몸을 불편하지 않게 손으로 받혔다. 식물이 되어가는 중이라 그런 건지는 몰라도 전혀 무겁지 않았다. 그는 조금 생각하더니 이파리를 흔들며 말을 꺼냈다.
-두려워야, 하나요? 저는, 좋아요, 자라나서, 열매를, 맺으면, 누군가에게, 먹히고, 좋은데요. 꼭, 이야기만으로, 삶을, 전하지 않아도, 되니까, 얼마나, 다행이에요. 삶이, 유쾌, 하지, 않잖아요. 열매는, 맛이, 있으니까. 삶이, 재밌어지는, 것, 아닐까요.
-만약 독이 있는 열매가 열린다면요? 어떤 식물인지 모르잖아요.
-그럼……, 보기에, 아름답겠죠. 그것, 만으로도, 기분이, 좋은데요.
그의 부피는 점점 줄어들었다. 까딱거리던 손가락은 각각 다섯 가지의 이파리로 변했다. 눈에 보이는 부분이 식물로 변해가자, 그가 정말 식물이 되어가는 중인 것만 같았고 보이지 않는 땅속에서 아마 그의 발가락들이 잔뿌리가 되어 흙을 단단히 움켜쥐고 있을 거란 상상을 하니 소름이 돋았다. 나는 그가 불편하지 않게 플라스틱 빨대 하나를 꽂아 그를 지탱하게 했다. 그리곤 빵끈으로 묶어 더는 휘청거리지 않게 고정했다.
-고마워요. 혹시, 나를, 키워, 줄, 래요?
‘담쟁이넝쿨’은 그 말을 끝으로 완전한 식물이 되었다. 어쩌지 싶다가 딸랑거리는 도어벨 소리에 그를 품에 안고 카운터로 돌아왔다. 나는 한때 ‘담쟁이넝쿨’이었던 ‘식물’과 함께 손님을 맞았다. 카페에선 여러 인생이 무분별적으로 쏟아졌다. 내가 고르고 골라 듣고 싶은 이야기가 들려오는 것이 아닌 그들이 말해서 어쩔 수 없이 들어오는 말들에 흠뻑 젖어 있다 보면 어느덧 식물에서 물을 주어야 하는 시간이 다가왔다. 물뿌리개를 들고 뿌리려다가 괜히 시원해? 하고 물었다. 어딘가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다가 그에게 이름을 물어볼걸, 하고 후회했다.
-그 화분은 뭔가요?
‘커피콩’이 다시 짤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돌아왔다.
-제게 자신을 키워달라고 하셔서요.
-아 그 손님이시군요.
-네.
-그럼 이걸 가져가세요.
‘커피콩’은 커피 찌꺼기가 담긴 봉투를 내게 건넸다. 감사합니다. 도어벨이 딸랑거렸다. 생각해 보니 그도 이곳을 떠나야 할 것 같아 문을 한 번 더 살짝 흔들었다.
-‘담쟁이넝쿨’ 아니, ‘식물’ 씨. 그냥 반말해도 괜찮겠죠?
미동이 없는 그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이곳에서 햇볕을 받기는 어렵겠네. 집을 옮겨야 하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집구석에는 ‘식물’을 둘만한 공간이 부재했다. 널브러진 옷가지를 세탁기에 넣고 방바닥을 닦았다. 옷더미에 깔려 있던 탁자 위에 ‘식물’을 두었다.
곧, 이사를 해야 해. 여기보다 햇볕이 더 잘 드는 곳으로 찾아볼게. 나랑 비슷한 류라고 생각했는데 아닌 것 같아. ‘담쟁이넝쿨’이라고 지었던 이유는 꾸역꾸역 담벼락을 넘어가고 싶은 오기가 있을 것 같아서였어. 생각해 보니 난 그런 오기가 없네.
카페 일에 적응한 후에는 손님이 없을 때, 종종 노트북을 켜 소설을 적었다. 내가 ‘식물’에게 오늘은 어떤 일이 카페에서 있었는지 말해주는 소설이었다. ‘식물’은 이야기와 인간의 모습이던 삶에서 좋아하던 커피 찌꺼기를 먹으며 무럭무럭 자랐다. 연초록색이던 잎은 짙은 녹색으로 변했다. 도톰해진 잎과 줄기, 몇 번이고 분갈이해 남은 화분에 작은 식물도 심었다. 여름이 다가오자 노랗고 작은 꽃이 ‘식물’의 몸에서 피어났다.
-식물은 잘 자라고 있나요?
-네. 근데…….
-그런데요?
-무슨 종인지 모르겠어요.
‘커피콩’은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꽃을 한 번 검색해 보세요. 꽃이야말로 구별하기 가장 쉬운 방법 중 하나이니까요.
‘커피콩’의 말을 듣고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무어라 검색해야 할지 모르겠을 때, 또 도어벨이 울렸다. 어서 오세요, 잡생각을 멈추고 커피 원액을 내렸다.
작고 노란 꽃을 피우는 열매. 인터넷에 찾아보니 방울토마토 사진이 떴다. 아마 크기로 따지면 ‘식물’은 앉은뱅이 방울토마토로 보였다. 키가 작은 앉은뱅이 방울토마토는 집에서도 자주 키우는 식물인 듯했다. ‘식물’아, 너는 방울토마토였어. 다행이야.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겠구나. 네 삶을 기억해 줄 수 있겠구나. 방울토마토는 인공 수정을 해주어야 했다. 꽃을 만진 손으로 다른 꽃을 만지고 곁순을 잘라냈다. 작고 노란 꽃이 초록색의 열매를 맺고 빨갛게 무르익기를 기다렸다. 그러다가도 문득문득 ‘식물’이 방울토마토가 아니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도 찾아왔다.
붉은 태양이 오랜 시간 하늘에 머무르는 여름철이 돼서야 이사 준비가 끝이 났다. 소설도 투고했고 카페 아르바이트는 여전히 하는 중이었다. 혜주, 잘 지내니. 엄마의 문자메시지였다. 손가락으로 화면을 가볍게 눌러 문자를 노려봤다. 무어라 보내야 좋을까. 잘 지내요. 다시 뒤로 돌아간다. 건강은 괜찮으세요? 다시 뒤로. 요즘 앉은뱅이 방울토마토를 키워요. 열매가 열리면 먹으러 오세요. 엄마에게 메시지를 보낸 뒤 멈췄던 설거지를 이어 했다. 딸랑, 어서 오세요. 밝게 웃으며 가게로 들어온 손님에게 인사했다.
-곧 열매를 먹을 수 있겠어.
-기분이 어때?
-내게 인생을 곧 공유하게 될 텐데. 준비는 됐어?
네가 햇빛을 잘 봤으면 좋을 것 같아서 통창이 있는 곳으로 왔어. 소설도 투고했어. 내 별명은…… 아직 생각 못 했어. 미안. 네가 열매를 맺으면 또 다른 너를 만들 생각이야. 화분이랑 상토도 사놨어.
나는 ‘앉은뱅이 방울토마토’ 씨의 발치에 커피 찌꺼기를 꾹꾹 눌러 담았다. 그냥 내 별명도 ‘담쟁이넝쿨’로 할까 봐. 나도 너처럼 되고 싶어.
끝끝내 빨갛고 작은 열매를 맺었다. 토마토 한 개를 똑 따서 옷에 문질렀다. 물렁물렁한 촉감이 마음에 들었다. 씻지 않고 입 안에 넣자 새콤한 즙이 톡톡 튀었다. ‘앉은뱅이 방울토마토’ 씨, 토마토는 원래 데쳐 먹어야 영양가가 좋대. 근데 그건 상관없겠지? 고생 많았어. 창문을 열었다. 커다란 창 사이로 바람이 넘어 들어왔다. 앉은뱅이 방울토마토 씨의 팔이자 줄기, 손이자 이파리 부분이 살살 흔들렸다.
-꼭 우리가 처음 만난 날이 생각나네. ‘앉은뱅이 방울토마토’로 처음 만난 날 말이야.
나는 작은 그릇을 가져와 잘 익은 몇 놈을 엄선해 씻었다. 미지근한 감도가 도리어 좋게 느껴졌다. 냉장고에 넣어두면 그의 이야기가 변색할까 두려워 그냥 모조리 입에 집어넣기로 결심했다. 방울토마토는 크기도, 맛도, 색깔도 모두 제각각이었다. 감정을 공유한다는 건 많은 품이 들지 않는구나 싶었다. 처음 시도할 땐 어렵지만 다 자라고 나면, 말을 뱉고 나면 어렵지 않겠구나와 같은 생각이 터져댔다. 얇은 커튼이 바람에 맞추어 이리저리 흔들렸다. ‘앉은뱅이 방울토마토’ 씨도 이리저리 흔들렸다. 나도 바람에 몸을 맡긴 채로 이리저리 흔들리기로 했다.
-여러 가지의 감정이 느껴지네요. 달고, 시고, 새콤하고, 조금 씁쓸하기도 한데 시원한 것 같으면서 미지근한 것 같기도 하고. 흙 내음도 조금 있어요.
그리고 한참 구름이 지나가는 경로에 시선을 머물다 깊은숨을 뱉어냈다. 이 숨이 바람을 타고 멀리 퍼졌으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잘 가요. ‘앉은뱅이 방울토마토’ 씨.
그와 나는 하나가 되어가는 중인데, 작별이 가능할까. 가능한 ‘앉은뱅이 방울토마토’ 씨가 내 몸에 눌어붙어 소화되지 않기를 바랐다. 내 몸, 어느 한구석, 근육이 되어, 살이 되어, 가능한, 빠지지 않고, 길고, 오래, 남아있기를. ‘앉은뱅이 방울토마토’ 씨처럼 말을 길게 늘인 채로 뚝뚝 끊어 소원을 빌었다. 그때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