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으로 조이스틱을 기울였다가 힘껏 위로 당긴다. 지금이야! 게임을 구경하던 태우 형이 소리친다. 나는 오른손으로 아케이드 버튼을 사정없이 누른다. 버블드래곤의 입에서 수백 개의 거품이 뿜어져 나온다. 거품에 갇힌 적들은 버둥거리다 이내 사라지고 없다. 동시에 지금이야! 라고 참견하던 태우 형도 사라진다. 뒤를 돌아 형의 모습을 찾는다. 적들을 죽이라고 해서 죽였는데 아무도 환호하지 않는다. 나는 오락실 게임기 바닥에 전원을 껐다가 다시 켠다. 화면에 Bubble Bobble – LV.1 문구와 함께 드래곤이 등장한다. 어디선가 태우 형이 등장해 저쪽으로 가야지! 라고 외친다. 버블드래곤의 입에서 거품이 뿜어져 나온다. 보글보글보글보글…… 나는 입술을 맞대고 버블드래곤처럼 뻐끔거린다.
심리적인 문제라고 봐야죠, 의사는 무미건조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과거에 이런 소리를 분명 들은 적이 있을 거예요. 나는 나지막이 고개를 저었다. 정말 없나요? 의사는 재차 질문하다가 상담사를 소개해 주겠다면서 타자기 위에 손가락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삼 개월 전부터 귀에서는 무언가 톡, 톡 하고 터지는 소리가 났다. 비눗방울이 터지는 소리보다는 조금 더 크고 경쾌한 소리였다.
소리는 규칙적으로 반복됐다. 회사에 출근해 업무를 시작하려고 자리에 앉으면 한번, 아침 회의 자료를 훑어볼 때 두 번, 그리고 그 주기는 갈수록 빨라졌다. 급기야 퇴근 후 만난 여자친구와의 잠자리에서도 그 소리가 멈추지 않았을 때 나는 병원에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다른 건 몰라도 섹스를 할 수 없게 된다면 여자친구는 나를 떠날 것이고, 나는 평생 방안에서 혼자 성기를 만지다 늙어 죽는…… 어쨌든 가벼운 문제는 아니었다. 회사에서는 사원들의 복지를 위한 병원이 몇 군데 있었고, 그곳에는 난청 센터도 있었다. 나는 곧바로 진로 예약을 원한다고 요청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예약 확정 문자가 왔다.
난청 센터는 3층에 있었다. 외관은 연식이 오래된 건물 같았는데, 내부는 인테리어를 새로 한 건지 페인트 냄새가 진동했다. 데스크의 간호사가 손짓한 대로 진료 대기 의자에 앉았다. 진료실 벽면에는 의사의 이름과 약력이 소개되어 있었다. 그중에서도 내 눈을 사로잡은 건 다름 아닌 이름이었다. 황소리. 얼마나 난청 센터 의사로서 신뢰가 가는 이름인가. 나는 의사가 되고 개명한 건지, 아니면 이름에 미래가 정해진 건지 궁금해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렇게 치료가 길어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삼 개월 동안 주에 네 번씩 치료 예약을 잡았다. 병원은 회사에서 차로 십 분 정도 거리였다. 점심시간을 쪼개고, 퇴근 후에도 곧바로 병원에 갔다. 그만큼 정체를 알 수 없는 이 소리가 사라지기를 간절히 염원했다. 혼자서 성기를 만지는 추한 노인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치료는 갖가지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빨간 불빛이 나오는 확성기 모양의 기계를 귀에다 가져다 대고, 귀의 주파수를 확인한다면서 수십 개의 선을 연결했다. 그렇게 길고 긴 치료 끝에 의사는 원인을 알 수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지난 삼 개월 동안 저는 무얼 한 건가요? 허탈한 탄식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뱉진 않았다. 직장을 다니면서 그 정도 사회성은 챙길 줄 아는 사람으로 성장했다. 의사는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한 채 심리적인 요인이 가장 클 거라고 했다. 소리의 출처가 되는 사건을 직면하지 못하면 평생 멈추지 않을 거라고 건조하게 답했다. 이름은 그렇게 믿음직스럽게 지어놓고 이딴 말을 내뱉는 의사가 원망스러웠다. 의사는 서랍을 뒤적거리더니 명함 하나를 내밀었다. 심리 상담센터 명함이었다. 어떻게 이름도 둥근 햇살 심리 치료센터인지. 방문하기만 해도 포근할 거 같은 기가 막힌 이름이었다. 소리의 원인을 밝히지 못한 의사가 소개한 병원을 믿어도 되는지 의심이 됐다.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어 심리 치료센터에 가보기로 했다. 무엇보다 소리가 영영 사라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더 커졌다. 방 안에서 홀로 성기를 만지는 추한 노인…… 더 이상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상담센터는 대기 환자가 많아 일주일 정도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최대한 빨리 잡아달라는 당부를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청년들의 정신 문제가 심각하다는 뉴스가 오보는 아닌 듯했다. 그때쯤 나는 의도적으로 여자친구와의 섹스를 피했다. 퇴근 후에는 거의 오 분 단위로 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톡, 톡, 톡, 톡. 일정하면서도 반복되는 소리. 사실은 내가 비눗방울이고 누가 나를 바늘로 찔러서 터진 건 아닐까. 말도 안 되는 상상들이 머리를 가득 메워 도저히 벗은 여자친구의 몸을 봐도 흥분이 되지 않았다. 섹스가 중간에 끊어지는 것만큼 치욕스러운 일은 없었다. 그래서 나는 필사적으로 집이 아닌 곳으로 피하려고 했다.
상담센터 예약을 기다리는 일주일 동안 상태가 더 안 좋아졌다. 난청 센터를 다닐 때는 효과와 별개로 치료 가능성이 주는 안도가 있었다. 하지만 물리적인 치료가 사라지니 소리에 더 예민해졌다. 이젠 단순히 섹스의 불가능성 문제가 아니었다. 심리 센터에 전화해 상황을 말하니 밤에도 시간을 낼 수 있냐고 했다. 나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상태로는 새벽 두 시에 예약을 잡아 준다 해도 당장 뛰어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퇴근 후에 곧바로 심리 센터 병원으로 향했다. 예약은 밤 10시였지만 지하 카페에서 기다릴 예정이었다. 여자친구에게는 야근 때문에 보지 못할 것 같다고 했다. 굳이 내 병을 말하고 싶진 않았다. 여자친구와는 대학교 선후배였고 우리는 십 년을 만났다. 관계에 믿음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믿음으로 끝낼 만큼 단순한 문제도 아니었다. 오히려 짧게 만난 사이라면 얘기하기 더 쉬웠을지도 모르겠다. 카페에 들어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키자 창밖이 서서히 깜깜해졌다. 여전히 귀에서는 톡.톡.톡.톡 하는 소리가 가득 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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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근 햇살 상담센터는 도심에 있는 단독주택이었다. 문을 열자 가정집처럼 친근한 느낌이 가득했다. 입구에는 귀여운 푸들이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고, 병원 로비에 놓인 소파에는 감색의 꽃무늬 담요가 깔려 있었다. 이런 집은 얼마쯤 하나 생각하다 강남이라는 자각을 한 뒤 생각을 그쳤다. 센터 안으로 들어서자 사십 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여자가 소리 나게 문을 열고 방 안에서 나왔다.
“김상구 씨 맞으신가요?”
나는 그렇다고 했다. 여자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거실처럼 보이는 로비로 안내했다. 나는 여자가 안내한 곳을 따라 가방을 내려놓고 양복 재킷의 단추를 풀었다. 내가 자리에 앉자 여자는 소파 앞에 놓인 기다란 탁상 위로 찻잔 두 개를 가지런히 내려놓았다.
“허브차에요,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죠.”
찻잔에서는 연기가 피어올랐다. 나는 조심스럽게 찻잔을 들고 입을 가져다 댔다. 순식간에 호로록하는 소리가 울렸다. 너무 교양 없어 보이려나 했지만, 여자는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허브차에서는 은은하게 꽃냄새가 났는데 끝맛은 달콤했다.
“원래는 방 안에서 상담이 이루어져요. 그런데 보시다시피 간호사들이 다 퇴근해서 저밖에 없거든요. 여기서 하려고 하는데 괜찮죠?”
여자의 목소리는 나긋나긋했다. 상담사의 전형적인 목소리였다. 나는 여자의 물음에 상관없다고 답했다. 귀에서 나는 소리만 사라지게 할 수 있다면 노래방에서 탬버린 흔들고 치료받는다고 해도 믿을 수 있었다. 여자는 찻잔을 들고 코로 가져다 댔다. 여자의 얼굴 위로 찻잔의 모락모락한 김이 피어올랐다.
상담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감은 상당했다. 나는 센터에 들어오기 전 동네 양아치에게 잘못 걸려 바지가 벗겨진 일까지 떠들 각오를 했다. 불행 서사라도 풀어내야 대화가 진행될 것 같았다. 하지만 예상외로 여자는 자기 얘기만 했다. 처음부터 강남에서 병원을 차리고 싶었다든지, 대출받아 병원을 차렸고 돈을 다 갚다 보니 청춘을 날렸다는 성공한 자의 뻔한 후일담이었다. 여전히 귀에서는 톡.톡.톡.톡 소리가 났고, 궁금하지 않은 여자의 삶은 지루했다.
그런 반응을 알아차린 건지 여자는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고 운을 띄웠다.
“상구 씨는 지금 무슨 일 하세요?”
여자는 내 귀에 대한 증상이나 불편함을 묻지 않았다. 그저 취미 동호회에서 처음 인사를 나누는 사람들처럼 사는 얘기를 궁금해했다.
“……그냥, 근처 회사 인사팀에서 일해요.”
나는 대기업에 다녔다. 그것도 삼성. 대한민국에서 사는 사람이면 누구나 알법한 바로 그 삼성이었다. 보통 때였으면 자랑하듯 떠벌렸겠지만, 의사 앞에서 할 소리는 아닌 게 분명했다. 나는 내심 여자가 어디 회사인지 물어주길 바랐다.
“원래 꿈꾸던 일인가요?”
여자는 나지막이 물었다. 나는 여자의 말을 듣고 웃음이 튀어나오는 걸 막으려 애썼다. 돈을 벌어야 먹고 사니까 그냥 다니는 거지. 여자가 의사가 아니었다면 이런 질문을 뱉을 수 있을까? 나는 여자의 말에 무어라 답할지 고민하다가 문득 잊고 있던 기억을 떠올려 냈다.
오래전에 나는 우뢰메에 나오는 에스퍼맨이 되고 싶었다. 그 당시 우뢰메는 초등학생들에게 최고의 인기 만화였다. 악당들을 물리치는 영웅. 현대판 홍길동처럼 떠올랐고, 열광하는 어린이 중 한 명이 바로 나였다. 학교 앞 문방구에서는 에스퍼맨 변신 슈트를 팔았는데, 나는 그걸 가지고 싶어 용돈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돼지 저금통에 모았다. 그렇게 여섯 달을 모아 결국 변신 슈트를 샀다. 그리고 나는 그 길로 곧바로 정글짐에 올라갔다. 슈트를 입었더니 진짜 에스퍼맨이라도 된 것 같았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정글짐 꼭대기에 올라갔다. 착지를 기대하고 정글짐 가장 꼭대기에서 모랫바닥으로 낙하했다. 그 당시 학교 경비 아저씨가 나를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나는 영영 걷지 못하게 됐을 수도 있다. 병원에서 두 달간 입원하고 집에 돌아왔을 때 에스퍼맨 슈트는 볼 수 없었다. 엄마는 그 슈트를 팔았다고 했다. 그때 처음으로 나의 첫 번째 꿈이 사라졌다.
그렇다고 여자에게 에스퍼맨이 되고 싶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나는 그냥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긍정의 신호였다. 실제로 나는 지금 회사에 불만이 없었고, 삼성은 누구나 선망하는 기업 중 하나였다. 거제도에 사는 엄마는 내가 삼성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 눈물을 쏟으며 통곡했다. 아이고 우리 아들이. 드디어 출세하는구나.
여자는 대답이 끝나면 곧바로 새로운 질문을 던졌다. 형식적인 질문이었으나 여자의 표정은 꽤 진지해 보였다.
“취미는 뭐예요?”
무슨 소개팅이라도 나온 것처럼 기분이 이상했다. 그때 톡.톡.톡.톡 귀에서 또 소리가 났다. 나는 잠깐 얼굴을 찡그리다가 짤막하게 답했다.
“게임요. 컴퓨터 게임은 잘못하고 오락실 게임 좋아해요.”
여자는 흥미로운 듯 말을 이었다.
“요즘에도 오락실이 있어요? 저희 때나 유행했던 건데.”
실제로 서른 살이 넘으면서 오락실을 간 적은 없었다. 오락실이 있던 자리에는 피시방이 들어섰고, 양복을 입고부터는 오락실에 들어서는 게 창피해졌다. 하지만 여전히 오락실은 좋았다. 입구에서부터 나는 요란한 소리. 화려한 불빛. 게임에 열중하고 있는 사람들. 그렇게 오락실을 상상할 때면 문득 태우 형이 떠올랐다. 태우 형은 내가 중학교 때 매일 가던 해피니즈 킹, 그러니까 오락실의 사장이었다. 그리고 나는 문득 잊고 있던 나의 두 번째 꿈을 떠올렸다. 중학교 입학할 때 내 꿈은 태우 형이었다.
나는 인생의 무료함을 빨리 깨우쳤다. 부모의 이혼과 방치. 조금은 흔해 빠진 불행이 내게도 존재했다. 물론 그 당시 엄마 아빠는 젊었고, 그들도 각자의 삶이 있기에 원망하진 않는다. 하지만 부모의 손길이 필요한 나이에 나는 늘 혼자였다. 당연히 학교에서도 적응하지 못했다. 다가오는 애는 목적이 있을 거라며 거부했고, 그러면서도 나를 제외한 다른 애들의 우정이 깨지길 기도했다. 더군다나 인간은 우뢰매에 나오는 에스퍼맨이 될 수 없다는 걸 깨닫는 나이엔 놀이터도 더 이상 흥미롭지 않았다. 그때 내게 손을 내밀어준 건 오락실이었다. 이십 평 정도 되는 꽤 넓은 규모였고, 기계도 삼십 대 정도 있었다.
“누가 왕인데요?”
해피니즈 킹. 다시 생각해도 오락실 이름으로 어울리지 않았다. 왕은 당연히 행복하겠지. 부하가 많으니까. 내가 간판에 불만을 가질 때면 태우 형은 내가 행복한 왕이야, 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태우 형은 처음 본 순간부터 친절을 겸비한 사람이었다. 십 원짜리에 테이프를 감아 무한대로 오락실 기계를 사용하는 걸 보고도 타박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게 오렌지 주스 하나를 건네며 재밌냐고 묻던 착한 사람. 나는 그때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친절을 맛봤다. 그래서 나는 넓은 오락실을 가진 태우 형이, 그 형의 세계가 부러웠다. 자기는 해피니즈 킹을 가졌으니 행복한 왕이라며 미소 짓던 형. 그때 나는 에스퍼맨 다음으로 형이 되고자 꿈꿨다. 그 꿈은 에스퍼맨 보다 현실적이고 가닿을 수 있는 범위에 놓여있었다.
나는 학교가 끝나면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오락실에서 시간을 보냈다. 갤러그. 스트리트파이터. 라이덴. 트윈코부라. 알고 있는 영어 단어보다 오락실 게임 단어에 대해 더 바삭해졌을 때쯤 보글보글이라는 게임이 등장했다.
오락실에 대해 한참을 생각하는데 여자가 증상에 대해 조심스럽게 운을 띄었다.
“정확히 어떤 소리가 들리는 건가요?”
나는 여자에게 내가 듣는 소리에 대해 정확히 묘사했다.
“비눗방울이 터지는 소린데 조금 더 빨라요. 뭔가 톡.톡 터지는 느낌이요. 여름날 창문에 부딪히는 빗소리 같기도 하고, 익숙한데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어요.”
여자는 내 상태에 공감한다는 듯 얕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상담은 두 시간 동안 진행됐다. 여자의 목소리는 일정하게 편안했고, 증상이 나아지진 않아도 마음은 한결 후련해졌다. 그리고 상담을 통해 어쩌면 정말 원래의 상태로 돌아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강남에 병원을 유지하는 것부터 여자의 실력은 보증된 셈이었다.
내일까지 숙제를 내주겠다는 여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나이 서른여섯에 숙제라는 단어가 난감했지만 내색할 수 없었다. 특별하진 않았다. 단지 좋았던 일과 슬펐던 일을 하나씩 생각해오라고 했다. 과거의 일도, 현재의 일도 상관없지만 대신 ‘정말’이라는 부사가 붙을 만큼의 일이어야 한다고 당부했다. 나는 무던한 성격이었고, 감정 변화가 거의 없었다. 여자가 그 짧은 시간에 나를 파악한 건지 의심스러웠다. 늘 나는 감정적인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감정의 표출은 결국 타인에게 약점으로 비칠 뿐이었다. 여자친구도 나의 이런 점이 좋다고 했다.
“오빠는 감정적인 사람이 아니야. 그래서 만나는 거야.”
여자친구와 나는 십 년을 만나면서 한 번도 싸운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미적지근한 관계라는 건 아니었지만, 불꽃이 튈 만큼 뜨겁지도 않았다. 나는 싸울 때 서로 증오하듯이 쳐다보는 얼굴이나 밑바닥까지 보여지는 행동만큼 불필요한 일은 없다고 믿었다. 주변 사람들은 그런 나를 ‘신인류’라고 했고, 여자친구도 깔깔대며 동의했다. 나는 너그러운 사람이라기보단 여자친구의 투정을 받아줄 만큼의 마음 적 여유가 있었다. 무엇보다 말 한마디에 웃거나 울만큼 낭만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아무튼 나는 좋았던 일과 슬펐던 일을 떠올리는 게 쉽지 않았다. 굳이 따지자면 귀에서 소리가 나는 일이 슬픈 일이었다. 이러다 문득 영영 해결되지 못한다면, 그렇다면 나는 혼자 성기를 만지는 추한 노인으로…… 다시 곰곰이 떠올렸다.
그러다 나는 기분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흘러가는 대로 살았다. 언제부터 그랬던 걸까. 생각이 생각에 꼬리를 물면 시간은 하염없이 거슬러 올라갔다. 여자친구의 고백을 거절하지 못한 날, 첫 섹스를 할 때 느꼈던 짜릿함. 그런 일들에 감정이란 단어를 붙이긴 역부족이었다. 그럼 또 하염없이 한참을 거슬러 까마득한 과거로 도달했다. 육 개월 동안 돈을 모아 에스퍼맨 슈트를 산 일, 엄마가 그 슈트를 팔아버린 일. 그땐 분명 좋았고 또 슬펐다. 그다음 오락실에서 태우 형을 만나고, 보글보글 게임 50 스테이지를 깨고, 그리고……그다음에…… 기억나지 않았다. 기억을 거스르고 시간을 역행하다 보면 어느새 나는 해피니즈 킹 앞에 서 있었다. 가게 안에서는 보글보글 보글보글……하는 소리가 났고 그곳에는 태우 형이 있었다. 그러니까 내 마지막 원초적 감정의 근원지는 온통 해피니즈 킹이었다.
해피니즈 킹은 동네에 있는 학생들의 돈을 끌어모으다시피 했다. 물론 오락실을 좋아하는 부모는 없었다. 학부모들은 공부해야 하는 학교 앞에 불건전한 시설이 생겼다고 시종일관 항의했다. 하지만 중고등학생은 더 이상 부모가 통제가 먹히는 나이가 아니었다. 해피니즈 킹에 동네 아이들이 득실댔다. 하지만 그마저도 고등학생 형들이 대부분 오락실 자리를 차지했다. 중학생이었던 나는 게임 한판을 하기 위해선 열판의 게임을 구경해야 했다.
10
나의 세계가 생긴 그날도 별다르지 않았다. 나는 게임을 하는 형들 뒤에 서서 내가 더 잘할 수 있다며 속으로 비웃고 있었다. 그때 탁자에 앉아있던 태우 형이 작은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나에게만 들리는 아주 작은 소리였다. 오락실 안의 사람들은 저마다 화면 속에 빠져들 것처럼 게임에 집중했다. 형 왜요? 나는 태우 형에게 다가갔다. 그때 형은 자신만 들어갈 수 있는 데스크 뒤의 공간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커튼이 반쯤 가려져서 밖에서는 그냥 지저분한 책들이 쌓여있는 공간만 보였다. 나는 처음으로 그 커튼 뒤의 공간 너머 세계에 가까워졌다.
형이 데리고 간 그곳엔 오락실 게임기 한 대가 놓여있었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번들번들 광택을 내는 조이스틱. 누군가 눌러주기만을 기대하는 볼록한 버튼. 세월의 흔적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누가 봐도 새것의 오락기. 형은 이 오락기엔 돈을 넣지 않아도 된다고 했고, 그 말의 뜻은 언제든 게임을 하고 싶으면 하라는 의미였다. 나는 그곳에서 혼자만의 작은 아지트를 갖게 됐다. 처음으로 가져보는 때 묻지 않은 새것. 그리고 나의 것. 나만이 쓸 수 있는 특별함을 나는 그때 처음으로 만끽했다.
아직도 형이 나한테 왜 그런 호의를 베풀었는지 모르겠다. 매번 혼자 오락실을 오던 내가 신경이 쓰였던 건지, 고등학생 형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비켜주지 않는데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내가 답답했던 건지, 그것도 아니면 그냥 내가 친구라도 데리고 와서 가게 매출을 올려주길 기대했는지. 물론 나만이 쓸 수 있는 오락기에는 돈을 넣지 않아도 되었으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어쨌든 형은 내게 가게 문을 닫는 주말에도 게임을 할 수 있도록 했고, 나는 오락실 가게의 여분 열쇠를 받았다. 그러니까 모든 건 호의를 베푼 형의 잘못이다. 나는 호의를 호의로 답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던 그저 열다섯의 작은 소년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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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면 소리가 나지 않는 상상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쿨의 <아로하> 노래를 틀면서 샤워하고, 식탁 위 일주일이 지난 식빵을 입에 물고, 정장 구두를 구겨 신고 집을 나선다.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일상이었다. 눈을 뜨면 시작되는 톡.톡.톡.톡 하는 소리. 그 소리는 하루가 다르게 빨라지고 또 커졌다. 이젠 거의 매초 마다 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조금 나아지나 싶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소리는 반복되었다. 누군가 머리를 잡고 뒤흔드는 것 같았다. 바다 위를 배회하는 유리병이 된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퇴근 후에 어김없이 상담센터를 찾았다. 여자친구에게는 오늘도 야근이라고 둘러댔다. 다른 변명을 생각해봤자 어차피 거짓말인 건 똑같았다. 오빠 요즘 왜 이렇게 바빠? 여자친구의 투정이 돌아왔고 나는 답장하지 않은 채 화면을 껐다. 누군가를 달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럴 때는 뒤돌아 각자의 방법으로 해결해야 한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병원에 들어서자 여자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환하게 웃고 있었다. 현관에서는 귀여운 푸들이 쪼르르 달려와 꼬리를 흔들었고, 여자 말고 다른 직원은 없는 듯했다. 나는 어제 앉았던 자리에 똑같이 앉아 여자가 내어주는 똑같은 허브차를 마시고 끝맛이 조금 달콤하다고 생각했다. 여자는 그런 나를 보고 방긋 웃으며 말을 꺼냈다.
“숙제는 어떻게, 생각해보셨나요?”
나는 손에 들고 있던 허브차를 내려놓고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물론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었다. 하지만 생각이 깊어지고 정답에 가까워질수록 ‘묻어야 하는 일’에도 생각이 닿고는 했다. 이를테면 해피니즈 킹에 내가 더 이상 가지 못한 그런 일 말이다. 머리가 복잡했다.
“일이 바빠 생각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여자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황한 기색 없이 익숙해 보였다.
“괜찮아요, 처음에는 다 그렇죠.”
내가 의사라면 치료에 따르지 않는 환자가 짜증 날 것 같았지만, 여자는 인내심이 깊었다. 이 정도 인내심을 가진 사람이 정신 상담을 할 수 있다고 다시금 생각했다.
“그럼, 조금 더 상태에 대해 알아볼까요? 처음 소리가 난 날 기억하세요?”
여자는 더 이상 개인적인 감정을 묻지 않았다. 내가 말을 꺼린다는 걸 눈치챈 것 같았다. 그래서 조금 더 증상에 관해 묻기 시작했고, 나는 그에 맞는 대답을 했다.
“당연하죠, 몇 번이고 떠올려봤거든요. 기억은 반복되는 재생 테이프잖아요. 억울할 정도로 평범한 순간들이었어요.”
여자는 모든 걸 이해한다는 듯 내 말에 공감했다. 나는 그런 여자의 태도에 조금은 기분이 나아졌다. 여자는 계속해서 질문했다.
“그럼, 저한테 그날 하루를 전부 자세히 알려주세요. 하나도 빼먹지 말고요.”
소리가 나기 시작한 그 하루에 대해 기억나는 것 전부를 말해 달라고 했다. 아침부터 밤까지 매 순간을 자세히. 그리고 전부 말이다.
“그날은 아침에 일찍 눈이 떠졌어요. 출근까지는 두 시간 정도 여유가 있었고, 저는 일찍 나가서 회사 근처 스타벅스에 갔어요. 한 손에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고…… 아 맞다, 샌드위치도 먹었어요. 에그 마요 샌드위치요. 그걸 받아서 햇빛이 잘 드는 자리에 앉았어요. 오늘은 날씨가 참 좋다고 생각했죠. 그날이 여름의 끝자락이어서 좀 선선했거든요. 하여튼 그렇게 샌드위치를 먹고 커피도 절반 정도 마셨어요. 그리고 창밖을 보는데 사람들이 다 출근하고 있더라구요. 다들 바쁘게 사는구나, 생각하면서 계속 보는데 어떤 할머니가 혼자서 목에 피켓을 걸고 서 있었어요. 1인 시위였나, 무슨 내용인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아요. 억울한 일이었겠죠. 그리고 시계를 보니까 출근 시간이 가까워졌고, 그냥 카페에 나와서 회사로 갔어요.”
“일찍 일어나서, 맛있는 아침을 먹고. 좋은 시작이네요.”
내 말을 경청하는 여자의 시선이 느껴졌다. 사이사이에 간단한 호응도 빼먹지 않았다. 때때로 종이에 무언가 적는 것 같았는데, 내 시야에서는 글자까지 보이진 않았다. 여자는 퇴근 후의 일도 말해달라고 했다. 나는 어렵지 않다는 듯 말을 내뱉었다.
“퇴근할 때는 여자친구가 본가에 내려간다고 했어요. 오랜만에 자유시간이구나 싶어서 근처 치킨집에서 치킨을 포장했죠. 축구 하는 날이었거든요. 그래서 치킨을 들고 공동현관문 비밀번호를 눌렀어요. 마침 엘리베이터가 내려오고 있었고, 저는 기다렸죠. 문이 열리고 후드를 쓴 남자가 있었는데 휴대폰 게임을 하는 것 같았어요. 그 사람이 앞을 보지 않아서 부딪힐 뻔했지만, 결국 엘리베이터를 탔어요. 그리고 곧바로 소리가 시작됐어요.”
나는 조금의 막힘없이 말을 내뱉었다. 수십 번 생각하고 돌려본 상황이라 바로 어제 일처럼 또렷했다. 여자는 내 말을 경청하면서 무언가 계속해서 써 내려갔다. 그리고 내 말이 끝나자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상구 씨가 말한 상황에는 딱 두 명이 등장하네요, 피켓을 든 할머니와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핸드폰 게임을 하는 남자. 그들은 시위를, 그리고 게임을 해요.”
나는 여자의 말을 따라 머릿속에서 다시 한번 장면을 묘사했다. 시위를 하는 사람과, 게임을 하는 사람. 피켓을 든 여자와 게임 하는 남자. 기억에 가까워질수록 귀에서 나는 소리가 급진적으로 빨라졌다. 온몸을 휘감고 내 전신을 옭아맸다. 투명한 막 안에 가둬진 것처럼 소리에 완전히 매몰되었다. 나는 고통스러운 듯 귀를 붙잡고 얼굴을 무릎에 파묻었다. 여자는 그런 내 상태를 보더니 진정하라고 했다. 귀에서는 계속해서 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톡.톡.톡.톡.톡.톡.톡.톡. 나는 이제야 알게 되었다. 이 소리의 근원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어쩌면 나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해피니즈 킹에서 시간을 보내던 열다섯의 나와, 그런 나의 꿈이었던 태우 형, 그리고 그 순간들이 자꾸만 머릿속에서 어지럽게 흩어졌다.
여자는 오늘은 더 이상 상담을 진행할 수 없을 것 같다고 했다. 절대적인 휴식을 강조하며 나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도저히 차를 운전할 수 없을 것 같아 택시를 탔다. 차 안에서도 여전히 소리는 반복됐다. 택시 기사는 적막을 견디기 힘들었는지 라디오의 볼륨을 높였다. 라디오에서는 여러분! 오늘 하루도 행복하게 마무리하세요! 라는 라디오 DJ의 경쾌한 목소리가 울렸다. 행복하게 마무리하세요! 행복, 행복, 행복, 떠올랐다. 나는 해피니즈 킹에 가지 못한 그 순간부터 단 한 번도 행복을 느낄 수 없었다.
보글보글이 동네 아이들에게 유행처럼 떠오르던 그때, 우리 지역은 한 아이의 실종으로 떠들썩했다. 사람들은 살기 좋아져서 세상이 미쳐 돌아간다고 혀를 찼다. 무엇보다 나와 같은 학교 동급생이었고, 어쩌면 복도에서 마주쳤을 수도 있는 아이였다. 선생들은 학교가 끝나면 곧바로 집에 가라며 타일렀다. 뉴스에서나 보던 일들이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나는 실종된 아이를 걱정하면서도 그 아이가 내가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했다. 마음이 무거웠다. 그 아이가 무사히 돌아오기를.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오길 바랐다. 경찰이 본격적으로 사건을 수사한다는 소문이 돌자 엄마는 학교가 끝나면 곧장 집으로 오라고 했다. 나는 그런 엄마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아지트가 생기고 나서부턴 세상 무엇도 겁나지 않았다.
처음 경찰을 마주한 건 커튼 뒤 나의 세계에서 보글보글을 하고 있던 날이었다. 해피니즈 킹 안에 있던 아이들은 어느 순간 겁을 먹었는지 우르르 밖으로 나갔다. 나는 게임기 앞에 앉아 경찰과 태우 형의 얘기를 엿들었다. 정확히는 그냥 들렸다. 경찰은 근처에 실종 사건을 탐문하고 있다고 했다. 한 남자아이의 사진을 내미는 것 같았는데 자세히 보이진 않았다. 뒤따라 형은 경찰을 향해 고개를 내저었고, 경찰은 명함을 내민 뒤 밖으로 나갔다. 그때 형은 커튼 뒤에 숨어 있는 내게 다가와 여느 때처럼 환하게 웃어줬다. 상구야, 너도 조심해라. 아무래도 흉흉한 세상이니까. 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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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회사 출근길에 피켓을 들고 있는 할머니를 봤다. 처음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날 봤던 할머니였다. 그때와 같은 자리에서 같은 표정으로 할머니는 피켓을 들었다. 삼 개월간 매일 그 자리에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할머니의 존재를 인지하고서야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피켓 속에는 진실을 밝혀달라는 미제사건 피해자 가족의 설움이 묻어있었다. 언젠가는 수면 위로 드러날 거라는 희망. 나는 그 피켓을 보자마자 황급히 회사 건물 안으로 달려갔다. 귀에서는 여전히 톡.톡.톡.톡 하는 소리가 났고, 그에 맞춰 심장이 쿵쿵댔다. 해피니즈 킹의, 그러니까 행복한 왕의 몰락 뒤엔 내가 있었다. 그리고 몰락은 한순간에 모든 걸 망가뜨렸다. 가진 게 많은 자는 잃는 것도 많다는 걸 그때 처음 배웠다.
태우 형이 실종된 중학생을 살해한 범인으로 몰린 건 경찰이 사건 조사를 시작한 지 일주일쯤 지날 무렵이었다. 형은 억울하다며 절규에 가까운 비명을 질렀고, 경찰들은 해피니즈 킹에서 형을 끌어내다시피 했다. 오락실 바깥에는 동네 아줌마들이 몰렸다. 이런 불건전한 시설은 진작에 사라졌어야 한다는 야유가 이어졌다. 그때도 나는 커튼 뒤의 나의 세계에서 보글보글을 하고 있었다. 버블드래곤의 입에서는 거품이 뿜어져 나왔고, 적들은 거품 속에서 버둥댔다.
경찰은 해피니즈 킹 안을 뒤지다 커튼 뒤 나의 세계를 침범했다. 어이, 너 왜 거기 있어? 순찰 봉을 허리에 맨 순경이 매서운 눈초리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책가방을 품에 쥐고 고개를 푹 숙였다. 오락기에서는 적을 감싸고 있던 거품이 터지는 소리가 났다. 톡.톡.톡.톡.
내가 왜 경찰서까지 가게 됐는지는 잘 알지 못한다. 그저 커튼 뒤에서 혼자 보글보글을 하고 있던 내가 태우 형과 닮아 보였는지, 아니면 자신들의 추측을 확신으로 바꿔줄 존재를 찾았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나는 처음 느끼는 공포를 물리치기 위해 주머니에 손을 넣고 연신 꼼지락댔다. 그 속에는 해피니즈 킹의 열쇠가 들어있었다. 경찰의 전화를 받고 달려온 엄마는 기함했다. 우리 아들은 아무것도 몰라요. 제가 오락실 같은 데 못 가도록 단단히 타이르겠습니다. 아이고 전부 제가 부족해서 그래요. 엄마의 처절함이 경찰서 안에 울려 퍼졌다. 해피니즈 킹의 몰락은 순식간에 나의 세계를 빼앗아 갔다. 나의 세계가 불건전한 것이 되고, 형의 호의는 더럽혀졌다. 조금 전 매서운 눈초리로 나를 노려봤던 순경은 어느새 인자한 표정으로 엄마를 진정시켰다. 아닙니다, 그냥 아드님이 증언만 해주시면 돼요. 그럼 다 해결됩니다.
상담센터의 문을 열자 항상 꼬리를 흔들던 푸들 강아지가 보이지 않았다. 센터 안의 조명은 전부 꺼져 있었고, 불길함을 암시하듯 이상하게 서늘했다. 나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현관으로 들어섰다. 여자는 로비의 소파에 앉아 조금 어두워 보였고, 지친 기색이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여자에게 먼저 말을 내뱉는 건 처음이었다. 항상 여자가 내게 허브차를 내어줬고, 나는 찻잔을 들고 여자가 내게 무어라 말하길 기다렸다.
“초코가 죽었어요.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애가 갑자기…….”
여자가 말하는 초코는 아마도 센터에 들어오면 꼬리를 흔들던 푸들 같았다. 여자는 한동안 상심에 빠져있더니 이내 자신의 본분을 알아차린 듯 아주 깊고 긴 숨을 내쉬었다.
태우 형의 자살 소식을 들은 건 재판이 시작되고 한 달 후의 일이었다. 그동안 나는 총 두 번의 법정 증언을 했고 네 번의 경찰 조사받았다. 특별히 힘든 건 없었다. 나는 엄마가 시키는 대로 말을 내뱉었고, 경찰이 원하는 대로 진술서를 작성했다. 형이 그 학생과 함께 있는 걸 봤다는 한마디와 친한 사이 같았다는 딱 그 한 줄이면 모든 게 끝났다. 그때 어른들이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는 전부 버블드래곤이 뿜어내는 거품 같았다. 나는 그 거품 속에 가둬진 적이었다. 그렇다. 형도 나도 거품 속에 가둬진 것이었다. 내가 조금이라도 망설이는 순간 터지는 건 형이 아니라 나였다. 옆에 앉은 엄마는 시종일관 내 허벅지를 꼬집었고, 경찰은 정확히 내 눈동자를 응시했다. 상구야, 어른들이 묻잖니. 빨리 답해야지.
나는 법정에서 증언할 때 비로소 형의 마지막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태우 형은 조금 야위어있었고, 내가 행복한 왕이야! 라고 외치던 그때의 모습이 아니었다. 형은 그저 공짜로 게임을 하게 해준 착한 형이에요. 실종된 아이와 친했는지 저는 몰라요. 목 끝까지 진실이 차올랐지만, 진실은 바늘 모양을 하고 있었다. 거품을 내뿜는 어른들은 터지는 것보다 버블드래곤이 되길 택하라고 했다. 나는 진술서에 적힌 말을 그대로 읽어 내려갔다. 피고인석에 앉은 형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상구야, 나한테 왜 그러는 거야. 처음 보는 형의 표정이었다. 형은 언제나 나에게 친절을 보여주던 착한 사람이었다. 두 번째 재판이 끝나고 형의 자살로 사건은 수사 종결됐다. 어디선가 태우 형의 노모가 나타나 억울함을 밝혀달라고 홀로 시위했다. 사람들은 그런 노모를 향해 반성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손가락질했다. 나는 동네에서 그 노모를 마주칠 때마다 전봇대 뒤에 숨거나 목적지 없이 달렸다. 노모가 보이지 않을 만큼 멀고 먼 곳으로. 그리고 이듬해부터 노모의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여자는 상담할 준비가 되었다는 듯 목을 큼큼 가다듬었다. 나는 한참을 고민하다 조심스레 한 마디를 내뱉었다.
“이름이 초코였나 봐요. 낯선 사람한테도 꼬리를 흔들더라고요.”
나는 여자에게 같은 기억을 공유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위로가 되길 바랐다. 여자는 그런 내 말에 화색 하듯 웃었다가 이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한 일만 생각나요. 못 해준 것만 생각나고. 저는 초코한테 너무 많은 걸 받았거든요. 근데 저는 그것들을 너무 당연하게 생각했어요.”
여자는 조금 전보다 진정된 목소리였다. 하지만 여자의 얼굴에는 여전히 존재를 잃었을 때의 상실이 묻어있었다. 나는 그런 여자를 향해 말을 이었다.
“저는 예전에 보글보글이라는 게임을 좋아했어요. 아실지 모르겠는데 그 게임은 적에게 거품을 쏴서 죽이는 게임이거든요. 저는 거품이 터지면 모든 게 끝나는 줄 알았어요. 적을 죽였으니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잖아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아니에요. 하나의 적을 죽이면 새로운 적이 만들어지고, 거품은 터지고 생기길 반복해요. 그러니까 제 말은 초코의 죽음은 그냥 거품이 터진 거예요. 언젠가는 터졌어야 할. 그런 거품이요.”
내 말이 끝나자 여자는 잠시 무언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뒤이어 상담사는 제가 아니라 상구 씨가 해야겠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나는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던 초코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했다. 그리고 나는 다시금 생각한다. 다시 해피니즈 킹에 나의 세계로 돌아가는 상상. 형은 그런 나를 보고 반갑게 맞이하고, 나는 여느 때처럼 오락실 게임기 앞에 앉는다. 딸깍하는 소리와 함께 전원이 켜지고 버블드래곤이 등장해 거품을 내뿜는 그 순간. 보글보글보글보글……톡.톡.톡.톡 귀에서는 수백 개의 거품이 동시에 터졌고 그건 평생을 기억해야 하는 고통의 무게라는 걸 직감했다. 인생에서 처음 받아본 친절과 호의. 나의 삶. 나의 세계. 어쩌면 나는 처음부터 소리의 근원과 고리를 끊어낼 방법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지만, 무얼 해야 하는지는 또렷이 알았다. 이젠 거품에서 나와야 할 시간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