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회 천마문화상-우수작(소설)] 양철 나무꾼과 양철 나무꾼
[53회 천마문화상-우수작(소설)] 양철 나무꾼과 양철 나무꾼
  • 박세빈(영남대 철학과)
  • 승인 2022.12.01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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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무슨 소리야, 지금? 퇴사?”

 잔잔하게 흘러나오던 음악 소리를 제치고 올라온 언성은 카페 내 사람들이 둘을 바라보게 할 정도였다. , 조금만 작게 말해. 유진은 가느다란 손가락을 제 입가에 대며 파란을 진정시켰다. 파란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한 채 제 손으로 움켜쥐고 있던 아이스 아메리카노 잔을 탁자에 턱 올려둔다.

자기 같음 지금 진정할 수가 있겠어? 갑자기 왜 그런 건데. 너 잘만 다니는 회사를, 것도 월급에 보너스에 꼬박꼬박 잘 챙겨주는 일자리를 박차고 나오다니.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도르륵 도르륵 눈알을 굴리던 유진이 파란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파란은 포크를 들고 쿡쿡 조각 케이크 따위나 찔러대고 있는 유진의 미적지근한 반응에 되레 눈살을 찌푸렸다. 제 애인이자 오랜 친구 유진은 늘 그랬다. 어딘가 느긋하고 여유롭고. 미래 걱정과 먹고 살기 바빠 시간에 쫓겨 살던 파란 저와는 묘하게 다른 구석이 있었다. 그래서 항상 남들과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시각으로 볼 줄 알던 유진을 동경했고 사랑했다. 하지만 이건 분명 맞닿을 수 없이 어긋난 것이리라. 기계공학과를 나온 유진이 다니던 대기업은 지금 파란이 바둥바둥 작은 회사 사무직을 맡은 것보다 대단했을 텐데. 자신이라면 그 자리를 일생일대의 동아줄처럼 꼭 붙들고 평생 놓지 않았을 텐데. 장거리 연애를 하는 탓에 그리웠던 유진의 얼굴이 난생처음 반갑지 않은 순간이었다. 여기서 몰아붙일 순 없지. 파란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사근사근 묻기로 했다.

어쩌다 그런 결정을 한 거야, 자기야. 더 좋은 자리를 소개받기라도 했어? 그런 거야?”

아니, 그건 아니야. 네가 좋은 직장이라 여기는 그곳도 괜찮았지만 내가 다른 생각을 해 봤거든.”

 절레절레 고개를 흔든 유진의 얼굴은 비장한데다 또 의연해서, 파란은 연거푸 한숨이 터져 나왔다. 철저하게 또 다른 세상으로 똘똘 뭉친 유진 앞에서 걱정거리에 휩싸인 파란이 퍼붓는 질문들은 주인을 잃고 방황한다. 파란의 물음표와 유진의 온점이 자꾸만 부딪힌다. 제 애인이 남들과 다르다는 것은 진즉 알고 있었지만 그 남다름이 고작 이런 결과를 낳았을 줄이야. 한심함과 걱정들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나중엔 우리가 결혼을 할 테고. 집도 살 테고. 그러기 위해선 안정적인 직장과 돈이 필요하다.

그래, 들어나 보자. 어떤 생각이길래.”

팔짱을 낀 파란이 유진의 뒤로 해가 짧아 금세 주황빛이 물든 유리창 너머의 세상을 잠시 바라보다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알잖아. 내가 영 회사 일에 재미를 붙이진 못했던 거. 매일 하나의 제품을 만지고 살펴보고 분석하다 하루를 보내는 일. 난 그런 일은 이제 못하겠어. 내가 원하는 걸 만들어보고 싶어.”

난 자기가 전혀 이해가 안 돼. 어떻게 그런 일자리를 그렇게 쉽게 버려?”

나도 쉬운 결정은 아니었어. 하지만 난 기계처럼 주어진 일만 해내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 몇 번을 고민해도 내가 원하는 건 따로 있어. 회색 도시에서 벗어나 창조적인 예술을 해 보고 싶거든. 늘 자기가 힘든 일이 있을 때면 내가 응원했잖아. 너도 그냥 날 믿고 응원해주면 안 될까?”

 꿋꿋하게 제 말을 이어나간 것치고 유진은 잘근잘근 입안 여린 살을 씹으며 파란의 얼굴을 살폈다. . 파란. 이름처럼 늘 파란 하늘만을 위로 두고 바라보며 살던 사람이 언제부터인가 묵묵히 앞을 바라보기 시작했을 때 유진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파란의 표정이 굳어갈수록 이런 반응을 예상치 못한 유진의 고개는 점차 아래로 수그러들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네. 이미 일은 벌여놨으면서. 퇴사하기 전에 나랑 상의 정돈 할 수 있었잖아. 넌 우리 생각은 하나도……. 됐다. 오늘은 피곤하니까 이만 들어가자. 역 앞까지 데려다 줄게.”

 파란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카페를 벗어난다. 유진은 싸늘하게 식어버린 제 커피를 두고서 파란을 허둥지둥 쫓아갔다.

 역까지 차로 가는 내내 둘은 침묵이 익숙한 벙어리가 된 것만 같았다. 조수석에 앉은 유진은 창문에 팔을 기대어 머리를 받치고 빠른 속도로 지나치는 길가의 나무들을 하릴없이 살핀다. 유일한 불문율이라도 되는 듯했던 정적이 벨 소리 하나에 흩어진다. 벨 소리의 주인은 파란의 것. 파란은 핸들에서 오른손을 떼어내 주머니 안에 숨어있던 휴대 전화를 꺼낸다. 액정에 뜬 이름은 파란의 상사다. 파란이 탄식을 내뱉으며 질색하다 마지못해 전화를 받는다. , 무슨 일이세요. ……내일요? 아니요. 일은요. 괜찮습니다. . 전화를 끊은 파란이 욕지거리를 하며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고 유진은 그 틈을 타 분위기를 파훼시키고자 슬쩍 입을 열었다.

, 회사에서 뭐라고 해?”

내일 나올 수 있느냬. 급하게 처리할 일이 있다는데. 일찍 퇴근하기라도 하면 주말까지 부려 먹으려 하더라.”

전에도 일요일에 갑자기 회사 오라고 했다면서. ……그냥 그런 곳은 그만두면 안 돼?”

, 그게 말처럼 쉬워? 너도 사직서 냈으니 나도 내라 이거야?”

 파란이 눈을 부릅뜨며 핸들을 꺾었다. 급작스러운 움직임에 차량이 덜컹거렸고 유진은 눈을 질끈 감는다. 갓길에 세워진 차의 라이트가 껌뻑거린다. 파란이 휙 고개를 돌려 핏대선 목을 하고 유진을 쳐다본다. 유진은 제 가방을 힘껏 끌어안는다.

, 고장 나면 어쩌려고…….”

이까짓 거 새로 고치면 그만이야. 넌 이딴 기계가 나보다 더 중요한가 보다?”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잖아. 그리고, 예전엔 네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고 싶댔잖아. 자유로운 삶이 좋다면서…….”

우리가 한창 젊었을 때랑 지금은 상황이 다르니까. 너야 취업률 높은 곳 나와서 어딜 가려면 갈 수야 있겠지, 나는 뭣도 없으니까 이러는 거 아니야. 가뜩이나 백수들 득실거리는 실업자 백만 시대에 이렇게 꼬박꼬박 돈 받으면서 사는 게 얼마나 힘든데. 넌 뭘 안다고……. 이게 다 기계가 만연해서 그래. 노동자들 일자리 뺏은 게 다 그놈의 기술 발전 때문이라고.”

……너 참 많이 변했구나. 누굴 탓하는 애는 아니었는데.”

, 이 와중에 감성적일 수 있는 네가 더 대단하다. 내가 이 얘기까진 안 하려고 했는데 말야. 아등바등 사는 사람한테 넌 뭐든 쉽게 말해. 쉽게 생각하고. 그러니까 예술을 한다느니 혼자 이상적인 삶을 산다면서 한심한 생각이나 하지.”

 파란 또한 아차 싶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뒤늦게 입을 다물고 유진의 표정을 살핀다. 파란이 끼얹은 찬물에 정신이 번쩍 든 것만 같았던 유진은 괴로운 얼굴로 파란을 바라보다 입술을 벙긋거렸다. 무어라 할 말을 꺼내려던 유진이 혀를 내어 건조하기만 한 제 입술을 훑는 행위가 이어진다. 파란의 분노는 순간적이었지만, 유진은 깨달았던 것이다. 파란은 더 이상 제가 아는 파란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이내 유진은 가보겠다는 말만 힘없이 뱉곤 어설프게 차 문을 닫았다. 그렇게 인사도 없이 가 버린 그날의 만남 이후로 둘은 일주일 동안이나 서로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유씨 가문은 대개 미술과 음악의 조예가 깊었다. 그 덕에 어린 시절부터 조부에게서 예술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듣고 자랐던 유진은 대학생이 되는 날까지 예술을 희망했다. 그도 그럴 게 조부는 늘 유진에게 이런 말을 늘어놓았기 때문이다. 꿈은 파랑새와도 같아서, 잡기를 체념하면 자꾸만 멀어져. 그리고 희구하는 걸 쫓다 보면 그게 어느새 내 어깨에 앉아 있기 마련이거든. 하고 싶은 일에 한계를 두지 말거라. 한계를 갖는 순간 꿈을 꿀 수가 없게 되니까. 유진은 조부가 눈을 감은 지 십여 년이 흘렀다 해도 그의 말을 오래도록 잊지 않았다. 유진의 마음속엔 그런 날개가 죽지 않고 접혀 있곤 했다. 파랑새를 향해 나아갈 도약을 기다리고 있었을 뿐.

 그런 도약을 기다리며 만난 게 바로 대학교 동아리에서 만난 파란이었다. 아직 마음 편히 자신의 꿈을 펼치지 못한 유진의 눈에 들어온 파란은 자유로운 새. 그래, 파랑새와도 같았다. 제약 없이 삶을 살아내는 것 같던 파란을 동경한 유진은 그렇게 파란을 사랑했다. 유진은 언젠가 대학 졸업을 앞두고 예술에 대해 파란에게 물었던 날이 떠올랐다.

예술을 하는 사람은 말이야. 어디 하나가 건강하진 못해. 예를 들어서, 흡연자라던가. 술을 마신다든가. 밤늦게까지 작업하느라 퀭한 얼굴로 커피만 쪽쪽 빠는 삶이 될 수도 있어. 아니면 마음의 병이 있어서 그걸 예술로 승화시키려고 하던가. 아무튼, 넌 너무 곱게 커서 네가 하는 예술마저도 곱기만 할 텐데.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울림을 줄 수 있을까?”

 직설적인 파란의 화법이었지만 틀린 말은 없는 것 같았다. 시무룩한 유진의 얼굴을 알아차린 파란은 말을 덧붙였었다. 그렇다고 네가 꼭 예술을 할 수 없다는 건 아니지. 예술의 세계는 가끔 나도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거든. 겨우 선 하나 그어놓고 억 단위인 작품도 있다잖아. 누군가 내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이 한 명쯤 있다면, 그 사람의 일생에 그 작품을 잊지 못할 만큼의 값어치를 했다면 아주 쓸모없는 작품이라고 할 순 없지. 오히려 백 명의 사람이 스쳐 지나가듯 작품을 마주한 단 일 분의 시간들과 한 사람이 그 작품을 줄곧 떠올리며 살아가는 평생의 시간. 둘 중 뭐가 더 좋을 것 같은데? 파란의 물음에 유진이 고민하는 눈치로 후자를 답하면 파란은 유진을 끌어안으며 말했다.

나는 늘 네 작품과 인생에 평생 울림 받는 후자가 될 테니까 걱정하지 마. 하고 싶은 걸 해.”

 

*

 

 그날 다툼이 있은 직후, 유진은 그야말로 파란에게 통보를 했던 격이기 때문에 그가 회사를 나온 것은 며칠 사이에 이루어졌다. 항상 가벼운 싸움이 일 때엔 못 이기는 척 유진이 파란에게 사과를 건넸지만, 이번엔 그마저도 포기한 모양이었다. 누구보다 서로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라 여겼던 두터운 신뢰가 분열됐음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내가 알던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을 것이라고. 지레짐작하던 것은 확신으로 변해갔다.

 일주일이 흘렀다. 평소라면 유진이 선뜻 화해하자며 연락을 했을 텐데, 연락이 없었다. 파란은 업무 도중에도 자꾸만 책상에 엎어둔 자신의 휴대 전화나 손목시계 따위를 힐끔거리기 바빴다. 얘는 꼭 중요한 대화가 어긋나기만 하면 이렇게 막무가내로 군다니까. 방금까지도 시간을 허비해 팀장님께 잔소리를 들었기 때문일까 부정적인 감정만 스멀스멀 올라오기 바빴다. 결국 맞불 작전처럼 유진에 대한 생각, 즉 그가 다시 사과를 하면 자신도 대수롭지 않은 듯 사과를 건네고 다시 진중한 얘기를 나눠볼 상상 같은 것을 그만두기로 했다.

 또 한 번의 일주일이 흐르고, 유진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럼 그렇지. 얘가 연락을 안 하고 배겨? 으레 갑이 된 것만 같은 기분으로 의기양양하게 유진의 메시지를 확인하던 파란의 얼굴은 점점 일그러지고 있었다. 분명 사과로 가득한 문자를 기대했던 파란은 우리 시간 좀 가지자.’와 같은 이야기가 유진의 생각에서 나올 것이라 여기진 않았기 때문이다.

 파란은 걱정과 달리 유진이 없는 하루들을 잘 보내고 있었다. 오히려 유진의 빈자리를 찾을 공허를 맞이하기도 전에 들이닥친 업무에 허덕거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시키는 일만 해내도 과부하가 걸릴 것만 같은 머리와 머리가 하는 만큼 따라가 주지 않는 어설픈 육체를 애석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새벽이 되어가는 자정, 간만에 유진에게서 걸려온 전화도 받는 둥 마는 둥 할 수밖에 없었다고. 먼 나중의 파란은 그렇게 합리화를 했다. 어느새 까맣게 잊고 있었던 유진과의 사이, 또 유진의 소식을 전화 한 통으로 다시 복기한 파란은 잠결에 웅얼거리며 전화를 받았다. 발신자의 침묵이 이어지고, 파란은 금세 잠들어버릴 것 같아 오랜만에 전화한 사람치곤 인사도 늦는다며 먼저 투정을 부린다.

나 없는 동안 생각은 많이 해 봤어?”

. 무슨 생각?”

내가 다른 일, 하는 거. 예술 같은.”

, 넌 새벽부터 사람 피곤하게 또 머리 아픈 얘기만 한다. , 뭐야. 그건 그냥 일어나고 얘기하면 안 돼? 나 지금 너무 피곤해. 내일 출근도 해야 하고.”

늦게 연락한 건 미안한데, 난 네 얘기 듣고 싶어. 오늘 아니면 안 될 것 같아서.”

좋게 넘어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거든? 근데 진짜 예술은 자기가 다시 생각해 봐라. ? , 응원해줄 수야 있지. 근데 우리 미래를 좀 생각해 봐. 너 예술 같은 것만 해서 어떻게 먹고 살래? 당장에 재능있고 유능한 애들은 어릴 때부터 준비를 착착 해왔단 말야. 너도 그냥 나처럼 하던 거나 하고 살자. 그게 편하잖아.”

그게 네 생각이야?”

, . 그렇지. 아무튼. 나도 못되게 말한 건 미안해. 널 이해는 하거든, 내가? 그래도 현실을 직시하자는 거지. 우리 이제 진짜 끊으면 안 될까? 중요한 얘기는 주말에나 만나서 하고…….”

……그래, 알았어. 잘 지내.”

 그 연락이 마지막일 줄 알았다면 다시 유진을 붙잡았을까, 하고 파란은 때늦은 후회를 해 봤지만 이것마저도 자신과 어울리진 않았다.

 

*

 

 유진이 죽었다. 잠수 이별을 겪은 지 4개월이 흐른 뒤였다. 몇 달이고 연락이 없기에 그런대로 자신처럼 잘 지내고 있겠거니 치부했던 게 화근이었을까. 가끔 유진이 그립긴 해도 그건 술이나 퍼마실 때 얘기지, 평소 정신머리가 말짱한 상태에선 속으로는 자신을 버린 유진을 마음껏 헐뜯기도 했다. 간혹 원망하거나 후회하는 등의 롤러코스터 같은 감정 변화만 뺀다면 말이다. 그런 파란에게 유진의 부고 소식이 알려졌을 땐 뭐랄까. 감정의 롤러코스터는 주체할 수 없는 가속도로 주행을 멈추지 않는 듯했다. 사망 사유가 자살이었다는 걸 듣고 난 이후론 더욱 그랬다. 유진과 어긋나기 이전, 재작년쯤부터 유진은 회사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있었다고 한다. 제 앞에선 아무렇지 않아 보였기에 괜찮은 줄로만 알았는데 유진의 죽음에 파란이 일말의 기여라도 했을까 싶어 불길하게 스며드는 죄책감과, 허망함이 잊을만하면 등장했다. 보란 듯이 나와 갈라서고 잘만 지낼 줄 알았더니. 유진의 끝이 이거라고? 그 애는 끝까지 미련했다. 너무 미련한 결말로부터 도망치듯 부조금만 전달하고 장례식장을 나오던 파란을 붙잡은 게 유진의 친구였다. 종종 유진이 그의 얘길 했는지 파란을 아주 잘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자신을 유진의 친구라고 소개한 그는 보여줄 것이 있다며 사흘 뒤 이곳에 와줄 수 있느냐 물었다. 유진이 사이에 있다는 것만 아니면 전혀 볼 일 없는 사람이었지만 유진과 결별한 이후 친하게 지냈다던 유일한 이였기에 쉽사리 내칠 수 없는 파란이었다. 메모지에 연락처와 날짜, 시간, 장소를 차례대로 작성해낸 그는 파란의 손에 쥐여주며 꼭 와달라 부탁한다. 유진이 살아있었다면 이것을 반드시 파란에게 보여주고 싶었을 거라며. 그 말 한마디에 파란은 알겠다고 응할 수밖에 없었다.

 유진의 친구가 일러준 위치는 바로 유진의 작업실이었다. 작고 단란한 작업실만을 예상해왔던 파란은 생각보다 넓은 장소에 내심 기가 죽었다. 파란이 도착하자마자 기다리고 있었던 건지 유진의 친구가 다가왔다.

작업실인 거 맞죠? 많이 넓네요.”

제가 아는 친구들이랑 저도 같이 쓰는 곳이에요. 유진이가 주로 이곳을 쓰긴 했지만요.”

, 그건 그렇고. 저한테 보여 주시려던 게 뭐예요?”

 파란이 이날을 기다리고 있던 것도 전부 유진이 남겼던 것을 보기 위해서였다. 유진도 죽은 마당에 느긋하게 가벼운 대화만 나눌 순 없었다. 유진의 친구도 느꼈는지 따라오라며 앞서 걸음을 했다. 얼마 못가 작업실 가장 내부에 무언가 길고 큰 조형물이 검은색 천에 덮여 있었다. 유진의 친구가 천을 거둬냈을 땐 눈을 내리깐 인간의 형태를 띤 것이 파란의 눈앞에 들어왔다. 유진이 남기고 간 것이 이것이란 말인가? 어쩌면 내게 보여주고 싶었을지도 모를 게 단순한 기계라는 사실이 파란은 믿기지 않아 연신 헛웃음이 나올 것 같은 스스로를 자제했다. 그러는 동안 유진의 친구는 한참이나 무얼 만지는가 싶더니 그것을 작동시켰다. 연결된 장치들을 만지다 유진의 친구가 벌떡 일어나는 동시에, 반신까지만 만들어진 것인지 양손으로 한 도끼를 들고 있는 진회색의 그것과 눈이 마주쳤다.

 유진의 친구는 설명을 이어갔다. 작품명이 지원이란다. 이 고철 덩어리 이름이 지원이라서 작품명이 그렇다는데. 내부에 인공지능이 있어 질문을 하면 배워둔 답변을 해낸다고 한다. 지원은 양철 나무꾼에서 소재를 가져온 것이었다. 평범한 나무꾼이 마녀의 저주를 받게 되어 온몸이 양철이 되었다는 바로 그 이야기에서 착안한 것이라고 했다. 유진은 그런 양철 나무꾼의 녹이 슬어버린 마음을 되찾고 싶어한다는 점을 특히 마음에 들어했더란다. 계속해서 인간이 되고 싶어하는 지원에게 직접 질문을 하게 만들고, 그렇게 지원이 생각하며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모습을 전시회에서 보여주고 싶었던 거다. 이런 고철에게도 모티프와 세계관이 주어졌다는 건 우스운 일이지만, 그것 또한 유진다웠다. 지원은 다양한 질문을 받을수록 스스로 알아서 답변을 만들어낸다고 한다. 가능하다면 내달 말에 유진의 죽음을 기리며 지원을 전시회에 올리기로 한 것이다. 머리카락도 하나 없고, 피부색이라는 것도 로봇에 가까운데 이게 무슨 인간이 될 수 있다고. 퉁명스러운 시선으로 파란은 눈을 깜빡이는 지원을 바라봤다.

 유진의 친구는 또 생각난 게 있는 모양인지 무언갈 뒤적거리다가 유진의 유품 중 하나였던 빨간색 다이어리를 건넸다. 그곳엔 지원을 파란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말부터, 자신이 지원을 맡을 수 없게 될 때엔 지원에 대한 모든 결정을 파란에게 넘기고 싶다는 말이 쓰여 있었다. 그러니까, 유진의 친구가 개인전에 특별히 지원을 선보이고 싶다 해도 파란의 선택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저도 이걸 전시해도 되는지 용기가 쉽사리 나지 않았어요. 같이 고생해서 만든 건 맞지만, 유진이 다이어리에 쓰인 말처럼 파란 씨 소유가 되었다고도 생각했고요. 그래서 파란 씨를 줄곧 찾았던 건데. 어떻게 하실지 결정권을 드리고 싶어요.”

알아서 하세요. 제가 만든 것도 아닌데요, .”

? 그래도 어떻게 보면 이제 지원이는 파란 씨 거예요. 유진이도 그러길 바랐을 텐데 제가 함부로 지원이의 이후를 결정하는 건 좀 내키지 않아서요. 그럴 자신도 없고.”

어차피 한 번 전시하고 말 것 아니에요? 여차해서 유명세 타면 몇 번 더 전시할 테지만. 저는 그만 가볼게요. 더는 시간 뺏기고 싶진 않네요.”

 작업실을 나서려는 파란을 붙잡은 유진의 친구는 마음이 변하거든, 다음 주까지 지원에 대한 전시회 여부 결정을 알려달라고 했다. 그리고선 유진의 작업실이기도 했던 이곳에 생각이 나면 자주 찾아오라며 비밀번호까지 알려주었다. 지원과 시간이 되면 얘기를 한 번 해보는 걸 권한다나 뭐라나. 말을 할 때마다 저 로봇 같지도 않은 로봇이 실재라도 하는 듯 이름까지 정성스레 부르는 유진의 친구에게서 가증스러운 유진의 이상향이 보이는 것 같아 진절머리가 날 판국이었다. 로봇과 인간의 공존, 뭐 그런 주제로 만든 게 저 고철이겠거니 싶었다.

 

*

 

 유진의 작업실을 확인한 지 이틀이 흘렀다. 그러고 보니 요샌 잠자는 시간도 부쩍 줄어들었다. 배가 고픈 것도 잘 느껴지지 않았다. 파란은 허기가 사라지니 맛의 즐거움도 차츰 잊혀갔다. 그저 끼니를 때우기만 한다면 뭐든 괜찮을 지경이었다. 이런 게 무기력의 증세인 걸까 싶었지만 파란은 오히려 좋으면 좋은 것이지, 나쁠 건 없다고 생각했다. 불필요한 결핍이 사라지면 계속해서 무리한 일정에 몸을 맞출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승진의 기회를 놓치고 파란은 지금 충당하고 있는 업무에서 더 많은 것을 해내야 한다고 불시에 생각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함께 험한 사회생활을 욕하던 입사 동기가 버젓이 승진했기 때문이다. 파란은 야근에 주말 출근까지 해 봤지만 그만 한계를 인정하라는 회사 분위기도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 회사까지 박차고 나오면 당장 생활비는 누가 충당한단 말인가. 어쭙잖은 감상에 젖을 시간도 없는 파란은 지금의 몸 상태가 오히려 반가울 뿐이었다. 예민해져서 그런지 새벽마다 비척비척 잠에서 깨는 일이 많아졌다만 그 외엔 달리 허기가 지는 일도 적었고 깊게 잠들지 않아 일찍 깨 업무 전화에 능숙히 대처했으며 정해진 일들을 완벽하게 딱딱 처리하기에 이르렀다. 그래, 마치 그토록 파란이 증오했던 기계처럼.

 

 파란은 거래처와의 일정 때문에 회사를 벗어나다 교통사고를 당했다. 회사의 일이 많다는 과장의 재촉에 하는 수 없이 깁스를 한 채로 회사에 나왔다. 파란의 오른쪽 다리엔 철심을 박아야 했고 병실에서 있은 지 6일을 채 넘기지 못하고서 그렇게 바삐 다리를 움직여야 했던 것이다. 업무를 위해 굴려야 할 머리와 분주히 컴퓨터 앞을 지켜가며 움직일 손은 다치지 않았으니 불행 중 다행이라 여길 판국이었다. 교통사고가 있기 이전에도 파란은 자신의 팔과 다리, 그러니까 이 비천한 몸뚱어리가 제대로 움직이지 않은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이렇게 되자 파란은 차라리 자신의 팔과 다리에 철심을 박아 이 인간적인 육신의 한계를 벗어날 순 없는가 생각한다. 그토록 로봇을 증오하는 것 같던 파란이 로봇의 형태를 띠게 되면 어떨까 고민케 하는 밤이었다.

 

 

정리를 했다고 한 건데, 아직 유진이 유품이 남았을 줄은 몰랐네요.”

 주말 아침 유진의 친구가 또다시 유진의 작업실로 파란을 불렀다. 전시회를 준비하다가 작업실을 한 번 정리했는데 유진이 사용했던 물건들이 채 다 버리지 못하고 남아있었던 모양이다. 그걸 굳이 끝난 인연인 파란에게 전해주는 의도를 모르겠다고 생각했지만, 유진의 친구가 전해준 물건을 받아들고 그 생각이 멎었다. 한 손에 들어오는 크기의 폴라로이드 사진이었다. 사진 속엔 대학 시절 유진과 파란이 어깨동무를 하며 웃는 모습이 있었다. 지금보다 앳된 얼굴들은 나이의 앞자리가 다른 만큼 시간이 두렵지 않았던 풋내로 일렁거렸다. 돌아갈 수 없는 과거를 회상하자 파란은 마음이 자꾸만 울컥거렸다. 이젠 옛 연인이 되었다지만 파란은 유진의 남부럽지 않은 환경과 상대를 가리지 않는 친절과 다정을 선망했다. 파란과 달리 유진은 그저 잔소리 없이 유복하게 살아온 것만 같았고 그 때문에 종종 질투도 했지만 유진의 사랑스러움이 커서 덮을 수 있었다. 하지만, 언제인가부터 잦아든 현실의 벽 앞에서 파란은 몸이 차게 식어갔다. 이미 변질자가 되어버린 자신은 이상에 부푼 유진을 마주하기가 어려웠다. 유진을 바라보는 것조차도 숨이 막힐 때가 있어 파란은 순수한 사랑이 썩어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이 동경하던 모습 그대로의 유진의 무해함이 유해함으로 다가온다. 유진이 지쳐 병들어가는 동안 파란은 끝없는 질문과 회의를 통해 관계 속에서 질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파란은 유진의 작업실도 전시회가 끝나면 함께 정리를 하게 될 것 같다는 유진의 친구 말을 고스란히 들을 뿐이다. 전시회 준비가 한창인 가운데 파란이 떠나지 않고 의자에 앉아 있자 구경을 더 하고 가라는 말을 덧붙인 유진의 친구가 다시 분주하게 움직이며 시범 삼아 지원을 구동시킨다. 자연스럽게 파란은 지원에게 시선을 던졌다.

얘기라도 해보실래요?”

 유진의 친구가 선들을 정리하다 넌지시 묻는다. 파란이 역시 거절할 것이란 걸 알고 있지만 혹시나 싶어 던진 질문이었는데 파란은 웬일로 지원 앞까지 다가갔다. 팔짱을 끼고 지원을 관찰하는가 싶던 파란이 입을 열었다.

넌 네가 뭐라고 생각하냐.”

당신이 보기엔 제가 아직 기계에 불과할 수 있지만 저는 인간이 되고 싶어요.”

사람의 목소리가 아닌 기계 특유의 일정한 음으로 이루어진 목소리. 말이 나올 때마다 지원의 입이 호두까기 인형의 입처럼 벙긋거리고 있었다.

정말 인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

저를 만든 엄마는 그렇다고 믿고 있어요. 그리고 저도 인간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이렇게 당신과 얘기를 하면서 저는 인간에 대해 생각하게 되니까요. 인간은 저와 다르지만, 그렇다고 아주 다르진 않은 것 같아요.”

네가 인간이랑 다른 게 뭔데. 그건 알면서 하는 소리야?”

…….”

인공지능이 있긴 해도, 제대로 된 답변을 구축하지 못했을 땐 저렇게 침묵을 해요. 아마 다음에 똑같은 질문을 하면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이 만들어져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더 고민하는 인간 같지 않아요? 질문들이 실시간으로 저장되면 저희는 그걸 확인하고 구색에 맞는 답변을 따로 설정해주기도 하지만 거진 지원이 만들어내는 답변들이거든요.”

 대답이 멎은 지원을 대신 설명이라도 하는 듯 유진의 친구가 나서서 이야기했다. 웃기시네. 파란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입력된 대답이 없으니까 말을 못하고 있는 것뿐이잖아. 그걸 침묵이라느니, ‘고민이라느니. 인간에게만 쓰일 말을 고작 이런 것에게 부여하는 유진의 친구도 답답하게만 느껴졌다. 이미 그에겐 지원이라는 하나의 인격체가 눈앞에 있는 것이다. ‘유진이 마지막 순간까지도 붙들고 있었을지 모르는 게, 이런 기계였다는 걸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텐데.’ 라는 생각을 파란은 가끔 하곤 했다. 이젠 세상에 없는 유진을 지원을 통해서나마 느껴야 한다는 것도 영 불쾌한 일이었으니까. 어쩌면 지원의 답변 일부가 유진의 생각이었을 테다. 그리고 유진이 지원을 만나는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이야기들이었을 거란 판단이 서자 지원을 완전히 무시할 순 없었다. 파란은 입술을 짓이기며 지원을 바라봤지만 지원은 표정이 없는 게 당연하다. 그저 무표정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기계에게 그런 표정의 개념이나 감정의 경계도 모두 사치인 것을. 파란은 지원과 대화를 하기 전만 해도 유진의 유작(遺作)인 점을 감안해 전시회에 올리길 허락하려 했다. 그러나 자신이 정말 인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 오만한 기계를 굳이 만천하의 사람들 앞에 공개해야 하는가? 조금 더 고민을 해보겠다는 파란의 말에 유진의 친구는 흔쾌히 수락했다.

 

 집으로 돌아온 파란은 괜히 시간을 또 허비했다고 여기면서도 지원의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금세 두통이 밀려와 약을 두 알 털어 넣고 쉴 새 없이 알림 소리가 울리던 휴대 전화도 꺼두었다. 모두 업무 얘기일 것이다. 피로한 관계들에 질려버린 파란은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그날 꿈에선 자신의 팔이 고철로 되어 도끼를 쥐고 있는 꿈을 꿨다. 자신이 나무를 베는 사람이어서 그런지 알 수 없었다. 눈앞엔 희뿌연 안개가 지더니 유진이 나타났다. 반가움과 그리움이 중첩되자 파란은 유진을 향해 달렸지만 곧 괜찮았던 걸음이 어기적거린다. 철심을 박았었던 오른쪽 다리 역시 고철이 된 것이다. 파란은 절망하면서도 시야에 유진이 멀어지기 전에 내달렸다. 쫓을수록 유진은 웃으며 저 멀리 가버리는 것만 같았다. 유진의 이름이라도 불러야겠다고 결심한 순간, 파란의 턱엔 녹이 슬어 유진을 부를 수 없었다. 입을 벌릴 수 없어 도끼를 떨어트리고 손으로 우악스럽게 턱을 잡아챘다. 목소리도 나오지 않는다. 유진의 이름조차 부르지 못한 채 그대로 유진은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파란이 잠에서 깨고 침대의 베개는 땀으로 흥건했다. 탁자 위 시계는 자정을 알리고 있었다. 생경한 꿈에 파란은 이불을 들쳐 자신의 몸을 살폈다. 턱도 더듬거리며 만져봤지만 이 역시 정상이다. 헉헉거리던 파란이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쉽사리 다시 잠들 수 없었던 파란은 웅크리고 앉아 꿈을 곱씹었다. 이상하게 지원이 떠오른다. 정말 정신 나간 소리일 수 있겠지만, 지원이 제 삶에 나타난 이후부턴 종종 말이 안 되는 일이 일어났다. 잠이 줄고, 식욕이 사라지는 등의 삼욕(三慾)을 상실한 것이다. 그 자리에서 파란은 옷가지를 걸쳐 입고 길을 나섰다. 유진의 작업실을 향해.

작업실엔 아무도 없었다. 오직 지원만이 있었을 뿐. 작동을 끄고 간 게 아닌지 지원은 눈을 뜨고 있었다. 지원의 침묵도, 자신이 움직일 때마다 이리저리 움직이는 고개와 눈동자도 거슬린다. 마치 살아있는 것 같아서.

널 왜 만든 것 같은데?”

어떻게 보면 저를 만든 제 엄마가 절 전시하기 위해서죠. 그리고 제가 인간이 될 수 있도록 많은 사람을 만나게 하려고요. 엄마는 저를 통해 사람들이 다른 깨달음이나 울림을 얻었으면 했던 건 아닐까요?”

무슨 깨달음이라고 생각해?”

인간은 하나의 사물을 보고도 각기 다른 생각을 해요. 그렇지만, 그 중 엄마의 생각을 빌어 말하자면 저와 같은 기계들은 한없이 인간이 되기를 바라고. 인간들 또한 그런 기계를 계속해서 만들어내요. 하지만 인간들을 보세요. 인간들 역시 저희처럼 변해가고 있는 게 아닐까요? 상대를 닮고 싶어하는 우리들과 우리가 무섭고 증오스럽지만 우리를 닮아가는 그들을 떠올려보세요.”

왜 인간이 되고 싶은 거야.”

저는 당신이 부러워요. 인간이 되면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을 테니까요. 자유롭게 움직이고, 자유롭게 말하고. 저는 이곳에서 누군가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그 누군가의 질문에 답을 하죠. 인간이 되기 위해서 말이에요. 인간이 된다면, 넓은 들판을 뛰어다니거나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들으면서 아침을 맞이하고 싶어요. 그래서 저는 당신이 부러울 뿐이에요.”

 낮에 봤을 땐 아무런 감정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대화를 나눌수록 지원에게서 온갖 감정이 느껴지는 것 같아 파란은 제 팔뚝을 문질렀다. 방금 꿨던 꿈이 현실로 겹쳐온다. 파란은 섬뜩한 기분을 느끼며 한참이나 제 손으로 턱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지원은 물음 없이도 홀로 말을 이어갔다.

제가 인간과 다른 점은 결핍의 차이예요. 당신의 눈엔 여전히 저는 졸리거나 배가 고프지도, 아픔을 느낄 일도 없는 로봇이겠죠. 인간은 결핍을 느끼기 때문에, 그 결핍을 채우고자 하는 끝없는 욕망 때문에 기계와는 다를 거예요.”

그만 말해.”

하지만, 지금의 저를 보세요. 저는 인간을 시기하기도, 질투하기도 해요. 감정을 느끼죠. , 인간이 되고자 하는 꿈을 꾸기도 해요.”

그만 말하라니까!”

이런 제가 당신을 통해 언젠간 인간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파란은 귀를 틀어막았다. 그런다고 지원의 목소리가 완벽히 안 들리는 것은 아니었다. 파란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급히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지원이 자신을 비웃고 있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작동을 멈추고 싶었지만 어떤 버튼을 눌러야 할지 몰랐다. 멈추라는 뜻을 피력해도 지원은 말을 마치지 않는다. 교묘하게 인간과 자신이 다른 점을 이야기하면서도 종내 인간이 되겠다고 얘기하는 저 건방진 말이 파란을 농락하는 것 같았다. 자신은 녹이 슬어서 곧 마디가 다 굳어버릴지도 모르는데 지원은 더욱 살아있었다. 파란을 통해 인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지원이 파란의 생명을 갉아먹고 있어서는 아닐까? 결론이 여기까지 도달하자 파란은 지원이 어떤 말을 꺼내 자신을 괴롭히고 기만할지가 두려워졌다. 지원이 물음으로 말을 멈춘 것 같았을 때 파란은 공구함에서 아무렇게나 놓여 있던 도끼를 훔쳤다. 지원이 자신과 우열을 가리고 싶어 한다면, 기꺼이. 파란은 손도끼를 쥐고 지원을 향해 내리쳤다. 압력에 지원의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파란의 셀 수 없는 내리침으로 몸까지 찌그러진다. 파란을 통찰하려는 듯했던 지원의 눈도, 결연한 꿈이라도 품은 듯 단단히 도끼를 붙잡던 팔도, 꼿꼿하게 설 수 있었던 받침과 허벅지도 무자비하게 박살 낸다. 지원의 말이 들리지 않을 때까지 그렇게 파란은 지원을 고장 내버리곤 저만치 도끼를 던졌다. 자리에 주저앉은 파란은 자신의 팔과 다리, 턱을 여러 번 매만져보다가 실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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