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 잘될거야~ 너에겐 눈부신 미래가 있어~♪” 국민응원곡 ‘슈퍼스타’의 원곡자 이한철 동문(정치외교학과 91학번)은 우리 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업 후 싱어송라이터로 활동 중이다. 자신만의 확고한 음악적 색깔과 뛰어난 작곡 능력을 갖춘 그를 만나봤다.
우리 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대학교 진학을 고민하던 당시 정치에 대해 배워 보고 싶었어요. 정치 공부와 함께 유명한 학내 밴드 동아리 ‘에코스’에서 활동해 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겨 영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로 진학을 결정했답니다.
우리 대학교 재학 시절 중 기억에 남는 경험이 있으신가요?
저는 밴드 동아리 활동을 아주 활발하게 한 편이에요. 대학교 2학년 때 노천강당에서 진행된 동아리 첫 공연에서 ‘Eric Johnson’의 ‘Cliffs Of Dover’를 기타로 연주했던 것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전공을 살리지 않고 가수라는 직업을 선택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대학교 재학 4년 동안 ‘에코스’ 밴드 동아리와 더불어 다양한 음악적 활동을 병행했어요. 1994년도 MBC 대학 가요제에서 대상을 받기도 했고요. 취미였던 음악의 비중이 점점 커지며 자연스럽게 가수의 길을 걷게 된 것 같아요.
음악인의 길을 걷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제가 고등학교 1학년 때 미군 캠프 부대에서 3일 정도 가을 축제를 열었어요. 가을 축제에서 우연히 본 한 밴드의 공연이 정말 멋있었어요. 같이 공연을 보고 온 친구들과 밴드를 결성하자는 뜻이 모아져 학내 밴드 동아리 ‘모비딕’을 창립하게 됐죠. 그게 제가 음악을 시작하게 된 계기예요.
학부 시절 우리 대학교 밴드 동아리 ‘에코스’에서 활동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동아리 활동 중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그 당시 밴드들은 공연할 때 고개를 숙이고 심오한 느낌으로 연주하곤 했어요. 그런데 저는 몸으로도 연주하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무대 퍼포먼스를 많이 했어요. 그러다 보니 나중에는 춤추면서 기타 치는 사람으로 이름이 알려지더라고요.
1993년 제5회 유재하 음악경연대회에서 ‘겨울이 오면’으로 동상을 수상하며 본격적인 음악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에코스’ 활동을 함께하던 윤용배 선배의 제안을 통해 참여하게 됐어요. 운이 좋게도 ‘겨울이 오면’으로 동상을 수상하게 됐죠. 유재하 음악경연대회를 경험하며 음악에 좀 더 비중을 둬도 되겠다는 마음이 생겼어요.
1995년 제18회 MBC 대학 가요제(이하 대학 가요제)에서 ‘껍질을 깨고’라는 곡으로 대상을 받으셨습니다. 당시 기분이 어떠셨나요?
하루아침에 세상이 바뀐 기분이었어요. 당시 대학 가요제 우승 경향은 주로 포크 음악, 중창 등이었지만 저는 록 음악으로 출전해 우승에 대한 기대가 없던 상태였어요. 그런데 여러 참가자 사이의 감초 역할이라 생각했던 제가 대상이라고 하니 굉장히 얼떨떨했어요. 더불어 음악은 뚜렷한 성과를 내기가 힘들기 때문에 부모님의 걱정이 크셨어요. 당시 큰 인기였던 대학 가요제에서 우승하니 부모님도 안심하셨어요. 정말 기쁘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997년도에 방영된 ‘남자 셋 여자 셋’ 시트콤에 출연하신 이력이 있으십니다.
연기를 한다는 건 정말 특별한 경험이었어요. 프로그램 측에서 제가 사투리 쓰는 모습을 흥미롭게 보시고 먼저 오디션을 제안해 주셨죠. 연기를 잘하고 싶은데 방법을 모르니 정말 막막했어요. 그래도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답니다.
‘슈퍼스타’라는 곡은 ‘국민 응원곡’으로 불리며 여전히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슈퍼스타’는 한 사람이라도 이 노래를 자신의 주제가로 생각하면 좋겠다는 마음이 담긴 노래예요. ‘슈퍼스타’를 발매하기 이전에는 히트곡이 없어 매번 제 음악을 설득해야 하는 무대에 섰어요. 히트곡이 간절했던 저는 노래 가사 등 기술적인 면에서 답을 찾으려고 했으나 찾을 수 없었죠. 그러던 중 대학교 진학 실패로 인해 방황하고 있던 고등학교 야구선수 ‘신성민’을 만나게 됐어요. 성민 군이 인생에 대한 새로운 방향을 모색할 수 있도록 돕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음악을 만들게 됐죠. 그런 진정성이 통해 국민 응원곡으로 사랑받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지난 2016년부터 2020년까지 약 5년간 라디오 ‘그대 창가에 이한철입니다’를 진행하셨습니다.
라디오 ‘그대 창가에 이한철입니다’를 진행하면서 제가 경험해 보지 못한 다른 분들의 인생을 가깝게 느꼈어요. TV 프로그램은 녹화 후 편집을 거치지만 라디오는 생방송으로 사람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죠. 또한 여러 사연을 소개하면서 라디오가 목소리와 음악만 전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삶의 모습과 감정을 공유하게 만드는 매체라는 것도 알게 됐어요.
2020년도 코로나19 극복을 희망하는 ‘방-방프로젝트’를 진행하셨습니다.
코로나19 확산 초반에 대구에 확진자가 급증하며 어려웠던 시기가 있었어요. 대구에 계신 부모님이 걱정돼 찾아뵙고 싶었지만 도시가 봉쇄된 상황이라 찾아가지도 못했죠. 저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것을 간절한 마음으로 고민하다가 대구에 응원과 위로를 보내는 노래를 만들기로 했어요. 그렇게 방하고 방이 연결된다는 의미의 ‘방-방프로젝트’를 기획하게 됐죠. ‘방-방프로젝트’는 18명의 뮤지션이 본인의 파트를 각자 집이나 작업실에서 녹음해 음원을 발표했어요. 특히 ▲밴드 헤이맨 ▲신현희 ▲mc 메타 등 대구 출신 뮤지션들이 참여해 더욱 뜻깊은 프로젝트였어요.
지역 가수와 마을 주민들이 함께 음악을 창작하는 ‘뮤지로컬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계십니다. 이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코로나19를 겪으면서 사람들과 가깝게 지내는 것보다 거리를 두는 것이 더 안전한 일상이 됐잖아요. 그런 부분이 안타까워 음악으로 다양한 지역사회를 연결해 보자는 생각에 시작하게 됐어요. ‘뮤지로컬 프로젝트’는 제가 하나의 곡을 작곡한 후 지역에서 활동하는 뮤지션이 편곡해 지역마다 다른 음악을 만들어요. 또한 그 지역 마을 공동체분들이 노래 가사도 작성하고 노래를 직접 부르죠.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노래는 마을이나 지역을 연결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연결 매체라는 것을 느꼈어요.
지난 15일 발매된 ‘춘천 디스코’는 아이부터 어르신까지 다양한 연령대로 이루어진 시민 창작자분들과 함께하셨습니다.
‘춘천 디스코’는 뮤지로컬 프로젝트를 통해 춘천에서 만든 노래예요. 춘천디스코는 2세부터 84세 어르신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참여자들로 구성돼 있어요. 어르신분들은 워크숍을 진행할 때마다 묵이나 떡 등 음식을 가져오시기도 했어요. 노래를 만든다는 목적으로 만났지만 창작자들이 모여 즐겁게 놀았다는 기억이 큰 것 같아요.
‘뮤지로컬 프로젝트’의 노래들은 정겨운 멜로디와 함께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는 후렴구가 많은 특징이 있습니다.
뮤지로컬 프로젝트의 곡들은 쉬운 멜로디로 누구나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도록 만들고 있어요. 노래를 듣는 것도 충분히 즐겁고 위로가 되지만 함께 부르며 노래의 일부분이 될 때 더 큰 즐거움과 위로를 받을 수 있거든요.
최근 다양한 오프라인 무대를 통해 팬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소리는 공기의 진동이에요. 그래서 아무리 좋은 음향 장비나 화면을 통해 온라인 공연을 해도 실제 같은 공간에서 울림을 느끼는 공연과는 비교할 수 없어요. 코로나19 상황에서 온라인으로나마 공연을 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최근 오프라인 공연을 할 수 있게 돼 정말 좋아요.
일본, 쿠바, 아프리카 등 여행을 다니며 음악적 영감을 많이 받으시는 것 같습니다.
탄자니아의 섬 잔지바르에서 육지로 가는 배 위에서 ‘흘러간다’라는 노래를 만들었어요. ‘강물은 포기하지 않는 한 그 바다에 다다르게 된다’는 말처럼 서두르거나 자책하지 않고 자신의 소신대로 긴 흐름의 인생을 살아도 괜찮다는 내용이 담겨 있어요. ‘흘러간다’는 저의 삶의 궤적이 담겨 있는 노래라 더욱 애착이 가요.
한 인터뷰에서 자신을 ‘반려가수’라고 칭한 것이 인상 깊었습니다. 반려가수가 되고 싶다는 다짐을 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반려묘, 반려견, 반려식물처럼 반려가수도 있으면 어떨까하는 생각에서 나온 표현이에요. 방송으로 가수를 만나는 것도 좋지만 일상에 가깝게 있는 우리 동네 가수들과 관계를 형성했으면 해요. 지역 가수의 음악을 알고 공연도 가게 되면 그 가수에게는 음악을 해야 하는 이유가 생기거든요. 그렇게 되면 동네 가수들도 음악이 더 좋아지고, 우리도 더 좋은 음악을 듣게 된다는 의미가 반려가수라는 표현에 담겨 있어요.
본인의 음악을 색깔로 표현한다면 어떤 색이라고 생각하나요?
제 음악은 ‘무지개빛 총천연색’이라고 표현하고 싶어요. 저는 싱어송라이터로 활동하고 있지만 노래 부르는 것보단 작곡에 비중을 많이 두고 있어요. 그래서 라틴, 락, 포크 음악 등 표현하는 음악의 스펙트럼도 다양한 편이에요.
가수로 활동하면서 힘들었던 경험이 있었다면 무엇인가요?
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수상한 후 가수로 앨범을 발매하는 과정은 순조로웠지만 세 번째 앨범까지 상업적으로 성공하지 못했어요. 당시 대중들의 마음속에 이한철이라는 가수에 대한 기대가 없어지는 느낌이 들어 가수를 포기해야겠다고 다짐했었어요. 방황을 하던 중 영국과 독일로 떠난 배낭여행에서 버스킹을 하며 많은 것들을 깨달았어요. 방송이나 큰 무대로 내 음악을 들어주지 않더라도 어느 곳이든 노래를 부르고 있는 자체가 의미 있다는 것을 느꼈죠. 가늘지만 길게 음악을 해보자며 힘들었던 고비를 넘겼던 것 같아요.
가수로 활동하며 가장 기억에 남는 무대는 어떤 무대인가요?
처음으로 관객 수가 100명이 넘었던 2001년 크리스마스 이브 홍대 공연이 기억에 남아요. 당시 3년 동안 공연의 관객 수가 2~30명 정도로 많지 않았어요. 처음으로 관객 수가 100 단위로 들어섰을 때 느꼈던 감동은 아직까지 생생해요. 제가 좋은 기회로 상을 타고 갑작스럽게 가수가 됐지만 한 걸음씩 발전하는 것이 더 의미 있다는 것을 경험하게 됐죠.
본인의 가수 인생에서 하이라이트를 뽑아본다면 언제인가요?
대학 가요제에서 대상을 수상했던 순간을 뽑고 싶어요. 당시 동상부터 차례로 수상자를 발표했는데 갑자기 대상 수상자에 제 이름이 호명됐어요. 얼떨떨하게 상을 받고 교수님들께 대학 가요제 참가로 중간고사 시험에 응시하지 못해 죄송하다는 수상 소감을 이야기했던 기억이 나요.
앞으로 하고 싶은 음악의 방향성이 궁금합니다.
저만의 뚜렷한 음악적 색깔로 꾸준히 제 음악들을 발표하고 싶어요. 그러면서도 매번 비슷한 노래들을 발표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음악적인 요소들을 계속 제 음악에 녹여내고 싶어요.
이한철 가수님께 ‘음악’은 어떤 존재인가요?
한번 음악이 삶에 스며들면 떼어내기가 아주 힘들어요. 제가 직업적으로 가수가 되지 않았더라도 직장인 밴드를 하며 음악을 항상 곁에 두고 살았을 것 같아요.
이한철 가수님께 ‘영남대학교’는 어떤 존재인가요?
저를 뮤지션으로 성장시켜 준 곳이에요. 새내기 시절 취미로 시작한 밴드 동아리 ‘에코스’에서 만난 선배들, 동료들에게 음악을 많이 배웠어요. 그리고 대학 시절에 유재하 음악 경연대회와 대학가요제에 출전하게 됐고, 졸업할 무렵에는 가수가 됐잖아요. 그래서 우리 대학교는 제가 뮤지션으로 성장하게 만들어준 곳인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