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자폐성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다. 나의 장애는 꽤나 심각해서 6살 때 나의 지능지수는 고작 70에 불과했다고 한다. 부모님과 찾아간 병원에서 의사선생님은 내가 평생 타인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가야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심각했던 장애로 인해 어린 시절의 기억을 거의 잃어버렸다. 하지만 차라리 다행일지도 모른다. 내게 그나마 남아있는 어린 시절의 기억들은 나에게 오늘까지도 깊은 상처를 남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내가 처음으로 장애진단을 받던 날의 기억은 그 중에서도 가장 아픈 기억이다.
의사선생님과 부모님이 상담을 하러 들어간 사이,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나는 갑자기 들려온 울음소리에 놀라 내 귀를 막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우리 부모님의 울음소리였다.
그 날의 기억은 그렇게 나의 마음속에 영원히 남아 나를 괴롭게 한다.
하지만 부모님은 나를 포기하지 않았다. 훗날 부모님은 그 날 모든 것이 무너진 기분이었다고 술회하셨지만 그렇다고 나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고 말씀하셨다. 부모님은 나의 치료를 위해 최선을 다했고, 나는 나를 위해 나와의 긴 싸움을 시작했다. 얼마나 그 싸움이 길어질지는 알지 못한 채로.
시간이 지나고 나는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6살 때 장애등급을 받은 이후, 나는 고통스러움을 참고 꾸준히 치료를 거듭했고, 초등학교를 입학할 때 즈음에는 최소한의 생활은 가능할 정도로 호전되었다. 물론 아직 갈 길은 멀었지만 그래도 나는 초등학교 생활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겪었던 것은 초등학교 6년 내내 지속된 학교폭력이었다. 폭력을 피해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기도 했지만 전학을 간 학교에서도 학교폭력은 이어졌다. 나는 친구 한 명 없이 학교를 다녀야 했고, 졸업식에도 얼굴을 비치지 않고 도망치듯 학교를 졸업해야 했다.
졸업이 코앞이던 6학년 즈음, 아버지는 내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이제 네 인생에서 가장 긴 6년이 지나간 것이란다.” 안타깝지만 아버지의 말씀은 절반만 옳았다. 그 때의 6년은 나의 인생에서 가장 긴 6년이었지만, 동시에 가장 고통스러운 6년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나의 초등학교 시절은 경험하는 모든 것이 새로웠기에 가장 길었지만, 동시에 차라리 겪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경험들로 점철된 6년이었기에 가장 고통스럽기도 했다.
나는 학교를 가는 것이 두려웠고, 나의 안식처는 학교 도서관이 전부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폭력의 강도가 거세지자 나의 안식처는 학교 화장실로 바뀌었다. 결국 난 식사도, 휴식도 모두 화장실에서 해결해야 했다.
물론 화장실 역시 안전하지 않았고 때론 친구들이 문 위로 뿌린 물줄기를 정통으로 맞고 온몸이 젖은 채로 교실에 들어간 적도 많았다. 나는 그저 두들겨 맞지 않길 바라며 하루를 버텨내고 다시 내일의 전쟁을 준비할 뿐이었다. 나는 그렇게 죽지 못해 살며 6년을 버텼다.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중학교를 가지 않고 집에 틀어박혔다. 난 이미 사람에게 너무 많은 상처를 받았던 터라 결국 사람을 싫어하게 되었다. 나는 인간관계를 부정했고, 인간관계를 만드는 인간의 감정을 부정했다.
나는 극도로 염세적인 사람이 되어갔고, 하루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어른이 된다면 힘이 생길 것이고 그 힘을 통해 나를 괴롭힌 사람들에게 복수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입만 열면 “어차피 사람은 혼자야. 친구 따위 만들어서 뭐해?”라고 말했다.
나는 그렇게 세상으로부터 나를 가뒀고, 세상을 버렸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나는 더욱 고독해지고 내 안에 갇힐 뿐이었다. 돌이켜보면 그 때의 나의 행동은 오히려 그만큼 더 많은 사랑을 갈구하던 내가 할 수 있었던 비뚤어진 표현이었다.
올바르게 나의 마음을 표현하고, 나의 상처와 어둠을 직시하기에 나는 너무 어렸다. 감정을 멸시하던 나는 정작 가장 감정적인 방법으로 나를 버린 세상에게, 그리고 세상에게 버림받은 나 자신에게 복수하고 있던 것이다.
그렇게 1년이 넘는 시간동안 학교에 가지 않고 집 안에서만 지내던 나는 어머니의 권유로 대안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사람에 대한 두려움으로 완강히 거절하던 나도 어머니의 거듭된 설득 덕에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용기를 내기로 했다. 그리고 나는 마침내 그곳에서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게 되었다.
나는 처음으로 친구를 사귀었고, 그 친구들과 함께 서로의 상처를 치유하며 성장해갔다. 나는 차츰 내가 겪었던 상처를 마주하기 시작했고, 동시에 이전에는 채우지 못했던 행복이라는 인생의 한 페이지를 친구들과의 아름다운 추억들로 수놓을 수 있었다.
그 뒤 나는 많은 도전을 했다. 2년간의 꿈같은 대안학교생활을 마치고 누구도 시키지 않았던 일반 고등학교로의 진학에 도전하기도 했고, 아직 부족했던 탓인지 고등학교에 적응하지 못해 자퇴를 선택하기도 했으며, 이후 다시 학교 밖 청소년이 되어 입시를 준비하기도 했다. 그리고 결국 나는 피나는 노력 끝에 기적적으로 대학에 합격하게 되었다.
나는 아직도 대학에 최종 합격했을 때 부모님의 반응이 생생히 기억난다. 어머니는 지하철에서, 아버지는 길거리에서 내 전화를 받고 오열을 하셨다. 어린 시절, 어머니는 내가 단 한 번만이라도 가방을 메고 학교를 가는 것을 보는 것이 유일한 소원이라고 하셨다. 나는 결국 그 소원을 이루어 드렸고, 다사다난했던 10대를 가장 화려하고 영광스럽게 마무리하며 마침내 꿈에도 그리던 어른이 되었다.
어른이 된 후 나는 나를 성찰할 시간을 자주 가졌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어린 시절의 내가 상상했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어른이 되어 힘을 가지고 남을 향해 복수하는 것을 꿈꿨던 나는 어느새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있었고, 인간관계의 가치를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그 시절 내가 받은 상처와 그 상처로 인해 사람을 증오했던 시기를 회상하고 어른이 되어 더 큰 힘을 가지고 나를 지키고자 했던, 또 그 힘을 사람들에게 휘두르며 내가 받은 상처를 고스란히 되돌려주고자 했던 나의 비틀린 내면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어린 시절의 나를 부정하지 않았다. 다만 그 내면 역시 나의 일부였다는 것을 수용하고 대안을 찾아 고쳐나갈 뿐이었다.
나는 어렸을 때와는 달리 오히려 그때의 나를 사랑하게 되었다. 소년이었던 나는 자신을 지키지 못했던 나를 경멸해 하루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지만 어른이 된 나는 소년이었던 때의 나를 아낌없이 용서하고 사랑하고자 했다.
그렇게 순수한 소년의 마음으로 되돌아가고자 한 어른은 과거 억지로 어른의 마음을 가지고자 했던 소년을 아낌없이 품어 안음으로써 마침내 과거의 상처를 씻어내고 이겨냈다. 나는 그렇게 진정한 어른이 되었고, 마침내 나의 오랜 원한을 떠나보냈다.
나는 어린 시절의 나를 부정하지 않고 그 시절의 내가 가지고 있던 비틀어진 마음을 부정하지 않았다. 오랜 도전을 통해 뿌리부터 단단해진 나는 그 때의 나를 직시한다고 해서 수치심을 느끼지 않게 된 것이다.
다만 그 모든 것이 과거 나의 일부였음을 시인하고 모두 품어 안았다. 그렇게 나는 나를 온전한 그대로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끝까지 희망을 놓지 않고 미래를 향해 도전하되, 과거의 내 모습도 외면하지 않는 것. 그것이 진정으로 강인한 사람이 된 내가 나를 사랑하는 방법이었다. 그리고 나를 사랑하고 받아들임으로서 내가 아닌 다른 이들도 아낌없이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먼저 나를 가꾸고, 나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을 때, 비로소 남에게도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마음으로 13살의 나를 품에 안은 23살의 나는 이렇게 말해주었다.
“현수야, 너 정말 멋지게 잘 자랐어. 이제 그만 미워하고 아파해도 돼. 대신 이제부터는 아낌없이 사랑하자. 그 동안 정말 고생 많았어.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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