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회 천마문화상-우수상(소설)] 당신의 박음질
[52회 천마문화상-우수상(소설)] 당신의 박음질
  • 김하진(한신대 문예창작학과)
  • 승인 2021.11.29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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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마의 손가락에서 낙하한 핏방울은 이미 다갈색으로 굳어져 있었다. 미싱기의 굵은 바늘과 상아색 바닥판 그리고 실이 박히다 만 자투리 천에도 작은 짐승의 발자국 같은 혈흔이 남았다. 미싱기 바늘의 반 이상이 검게 녹슬어 있었다. 나는 엄마를 간병 중인 이모에게 전화를 걸어 파상풍 검사는 했는지 확인했다. 
 핏자국 끝에는 빨간 외투를 구겨 넣은 종이봉투가 있었다. 잉어 비늘 같은 스팽클이 다닥다닥 붙은 낯익은 외투였다. 종이봉투 위로는 말대에 걸린 기모 원단이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병원에서 출발할 때만 해도 외투만 챙겨 곧장 가게를 나설 생각이었으므로 닫지 않은 문밖에서 오후의 햇빛이 들어온 까닭이다. 햇빛은 엄마가 만지고 앉고 걷던 모든 곳에 내려 앉아 그림자를 만들었다. 그 풍경이 나를 서글프게 만들었다.
 나는 가게 구석에 난 여닫이 문을 열었다. 요가 깔린 쪽방의 문은 한참이나 열린 적이 없다는 듯 덜컹였다. 가게 밖에 차를 세우고 있는 남편의 존재도 잊은 채 나는 바닥에 깔린 요 위에 모로 누웠다. 여닫이 문 밖으로 그 커다란 기모 원단이 그 위에 자주 손을 얹곤 하던 엄마의 모습이 보이는 듯 했다. 엄마가 쓰다듬으면 원단은 말대로부터 술술 풀어졌다. 어릴 적 나는 이렇게 쪽방에 누워 원단을 만지는 엄마의 손길을 바라보다 잠에 들었다. 내 머리를 만지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그 모습이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원단이 풀어질 때 나는 도로록, 도로록 소리에 맞춰 눈꺼풀이 꺼져갔다. 잠에 눈이 멀고 귀까지 막힐 즈음이면 먼 곳에서 누군가 코를 훔치는 소리가 들렸다. 도로록─훌쩍, 도로록─훌쩍. 

 내가 엄마와 ‘경이네’를 떠난 것은 3년 전이었다. 남편의 월세 집에서 신혼을 보내던 나와 남편이 전세 집을 계약한 날, 나는 엄마를 찾아가 대형 캐리어를 건넸다.
 “이제 제대로 된 집에서 살자. 엄마 짐도 입주 전까지 저 사람 집에 옮겨 놓을게. 가게는 차차 정리해도 되는 거니까.”
 “내놓는다고 가게가 알아서 빠지기를 해? 정리 될 때까지는 있어야지 당장 어디를 가.”
 “내놓기만 하면 부동산에서 알아서 해. 종로 상가인데 매물로 오래 묵기야 하겠어?” 남편도 내 의견을 거들어주었지만 엄마는 가게가 정리된 후에 짐을 옮기겠다고 한사코 고집을 피웠다. 그 전까지는 버스를 타든 지하철을 타든 주말마다 왕래할 테니 이만 돌아가 쉬라는 매정한 말까지 들어야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나는 룸미러에 비치는 캐리어를 괜히 쏘아보았다. 올 때는 반듯하게 세워 안전벨트까지 채워놓았던 것이 이제는 뒷좌석에 엎어져 바닥에 떨어질 것을 육중한 몸으로 우악스레 버티고 있었다. 방지턱을 넘을 때마다 캐리어가 조수석 등받이를 콩 콩 두드렸다. 
 오는 길에는 캐리어를 트렁크에 싣고 싶었다. 뒷좌석에 엄마를 앉히고 카 오디오로 이제는 촌스러워진 노래를 틀고 조금 먼 곳까지 차를 끌고 가 셋이서 단란하게 외식을 하고 싶었다. 차가 터널을 지날 때 백미러에 비친 내 얼굴 위로 실망감이 주홍색 빛을 내며 빠르게 스쳐갔다. 새 집에 입주한지 한 달이 다 될 동안 엄마로부터 새 주소지를 묻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초조한 마음에 부동산에 전화를 걸어 원단 가게가 매물로 나왔는지를 몇 번 물었지만 아니라는 대답만 반복해 들었다. 갈비뼈 안쪽에서 무언가 엎어진 기분이었다. 발에 채인 대형 캐리어처럼 ‘퉁’ 공허한 소리를 내며 더 엎을 것도 남지 않은 무언가가 엎어졌다. 그제야 내 의식은 길고 긴 터널을 빠져나와 눈이 시릴 정도로 파란 하늘을 똑바로 쳐다볼 수 있었다. 엄마는 ‘경이네’를 떠나지 않는다. 나에게 오지 않는다. 상가 공용 화장실에서 일을 보고 샤워를 하는 것이, 쪽방의 딱딱한 바닥에 요를 깔고 잠드는 것이, 쪽방에 앉아 숙제를 하고 엄마의 일하는 모습을 내다보는 것이 퍽 외롭고 권태로웠던 것은 나뿐이었음을 깨달았다. 
 전화기 너머 종이 넘기는 소리가 날카롭게 들릴 때에서야 아직 전화가 끊기지 않았음을 알았다. 서둘러 통화종료 버튼을 누르려는데 부동산 주인이 입을 열었다.
“그 옆 채소가게는 매물로 나왔어요. 급해보이시는데 꼭 그 가게여야 합니까?”

 어린 날엔 저녁이면 상가로 나가 그날의 장사가 마무되는 모습을 구경하곤 했다. 가게마다 불이 꺼지고 내놓은 물건이 안으로 들어가고 셔터가 닫히는 모습은 상가 전체가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엄마는 상가를 삼킨 어둠 속에서 백열전구를 밝히고 상가 사람들이 수선 맡긴 옷을 꿰맸다. 먼발치에 서 엄마의 원단 가게를 보고 있노라면 채소가게 셔터를 내린 배불뚝이 아저씨가 외벽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1층은 채소가게로, 2층은 집으로 사용한다는 모양이었다. 나는 가게와 집이 일과 생활이 명확하게 분리된 채소가게 아저씨가 부러웠다. 갖고 싶은 장난감을 보러 문방구를 자주 드나들던 것처럼 나는 채소가게 건물의 2층에 불이 들어오는 순간을 매일같이 바라보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중학생이 되었을 무렵엔가 아저씨가 올라간 직후 누군가 2층에서 걸어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아저씨는 가족 없이 혼자 살았으므로 처음에는 아저씨 본인이겠거니 했다. 하지만 ‘경이네’에서 새어나온 불빛에 드러난 남자의 모습은 아저씨와는 딴판이었다. 계단을 다 내려온 남자가 나를 발견하고는 손을 흔들었다. 나는 그를 삼킨 골목의 어둠을 얼마간 바라보다가 도로 ‘경이네’ 안으로 들어갔다.
 엄마 심부름으로 장을 보러 나왔던 날 나는 채소 가게 안에 서있는 남자가 내게 손을 흔들던 사람임을 알아보았다. 딱 벌어진 어깨에 검게 그을린 피부, 눈썹이 짙고 눈가가 깊은 청년이었다. 
 “경이 뭐 주냐?”
 “경이, 뭐, 주냐?” 남자는 채소가게 아저씨의 말을 그대로 따라했다. 나는 그의 억양을 듣고서야 그가 외국인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만 좀 따라하라는 아저씨의 핀잔에도 그는 주눅들 줄을 몰랐다.
 “어때요? 한국말 잘 하죠?” 마이크가 제 한국어 실력을 뽐낼 때면 그가 한국인이고 내가 외국인이 된 것처럼 고개만 열심히 끄덕였다. 
텔레비전, 라디오, 채소가게 아저씨의 트로트 100선 카세트까지 여행 온 나라의 언어가 나오는 매체라면 숨소리 하나까지 따라하고 보는 것이 그의 적응 방식이라고 했다. 아시아 국가들로의 장기 여행을 목표로 일본에서 한국까지 배를 타고 온 마이크는 모아온 여행 자금을 도둑맞아 채소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다고 했다. 여행을 하다보면 이런 경우가 많다고, 남들은 감히 시도하기 힘든 여행법이라며 거들먹거리기도 했다. 
 나는 그가 석 달이면 돈을 모아 다음 나라로 옮겨 갈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내가 성인이 되어 엄마와 ‘경이네’를 떠나는 순간까지 마이크는 채소가게에 남아 있었다. 상가 사람들은 채소가게 아저씨가 돈을 떼어먹은 것이라며 수군댔고 그럴 때마다 마이크는 한국이 너무 좋아서 다른 나라로의 여행은 아직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마침 배추를 사러 채소가게에 들렀던 나는 ‘다른 나라 말고. 집에는 안 가?’하고 물었고 마이크는 잠시 말이 없다가 ‘집이 어디였는지 까먹었’다며 웃었다. 
그날, 엄마의 가게로 돌아온 나는 쪽방에 틀어박혀 울었다. 사춘기 시절 내 마음에 인 울렁임은 죄책감이었다. ‘집이 어디였는지 까먹었다’며 농담하듯이 던진 말이, 그때는 왜 펑펑 울만큼 슬펐는지 스스로도 납득하지 못했지만 이제는 안다. 슬픔이란 얼굴 안에서 눈처럼 내리는 것이고 그때 마이크의 짙은 눈썹 위로 슬픔이 무겁게 쌓였던 것이고 그래서 그 웃음은 웃음이 아니었고 나는 그를 슬프게 만들었으므로 미안했다.

 반년 후 마이크는 근처 클럽의 이미테이션 가수로 출근했다. 한번은 상가 노상에서 술판을 벌이던 아저씨들이 마이크를 껴주었는데 나는 그때 처음 마이크가 부르는 ‘가로등 하나’를 들었다. 말할 땐 엉성한 한국말이 테이프에서 나오는 노래를 따라할 땐 또 완벽했다. 그 즈음 나를 놀라게 한 사실이 또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마이크가 마이크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마이크’는 리모컨을 마이크 삼아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트로트를 따라 부르는 모습을 보고 채소가게 아저씨가 붙여준 별명이었다. 그 별명 덕분인지 클럽 무대에 서게 된 마이크는 ‘마이크를 든 마이크’라는 코너명으로 클럽 손님들로부터 꽤 괜찮은 반응을 얻을 수 있었다.
 마이크는 채소가게 장사가 끝난 뒤 2층에 올라가 빨간 스팽클이 달린 무대의상을 챙겨 계단을 내려왔다. 나는 그전만큼 상가 풍경에 관심을 갖지 않았으므로 엄마가 버린 난단을 챙겨 쪽방으로 들어가 바느질을 하며 놀았다. 널찍하게 실을 꿰어놓고 양쪽 실을 잡아당겨 천을 쪼그라뜨리거나 그림을 그리듯이 마음 가는 대로 실을 꿰었다. 몇몇 천에는 엄마가 새기다 만 바늘자국이 남아있었는데 그것들은 무서울 만큼 일정한 간격을 가지고 있었다. 어떤 것은 간격도 없이 실자국으로 빽빽이 연결되어 있었고 끝에 매듭도 짓지 않았는데 워낙 촘촘하여 힘을 주어 뜯어내려 해도 쉽지 않았다.
 나는 천을 가지고 노는 것도 금방 질려 방바닥에 드러누웠다. 서걱서걱― 재단가위가 실크 천을 부드럽게 파고드는 소리가 들렸다. 어둠에 스며든 상가의 간판처럼 머릿속을 떠돌던 생각들이 흐릿해졌다. 그새 잠든 줄도 몰랐던 나는 가게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악을 쓰며 고함을 치는 소리가 상가에 울렸다. 정신이상자나 취객이 가게에 침입해 해코지를 할까봐 이불 속으로 몸을 웅크렸다. 소리를 지르다가 욕설을 내뱉는 목소리는 틀림없는 마이크의 것이었다. 잔뜩 흥분한 마이크의 목소리가 가까워지다가 이내 뚝 끊겼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아이처럼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나는 그가 우는 소리에 안심이 되었다. 소란하게 화를 내지 않고 소란하게 울어서, 그때처럼 웃지 않고 울어서 다행이었다.
3년 전, 채소가게가 매물로 나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마이크가 말레이시아로 돌아갔을 거라고 믿었다. 가로등 불빛 아래 빨간 스팽클이 번뜩일 때마다 낯빛을 잃던 마이크가 가여웠고 손님들이 권한 술에 정신을 잃고 골목을 돌아오면서도 한국이 너무 좋다고 시치미 떼는 것이 싫었다. 그가 한국을 떠나 다른 나라로 건너갔거나 가족들을 만나 단란한 한 때를 보낼 것을 상상하면 기분이 좋아졌다. 문득 마이크의 동향과 상관없이 주인아저씨의 사정으로 채소가게를 넘기게 된 것이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마이크라면 괜찮을 거야, 마이크라면. 하고 애써 생각의 마개를 닫아버렸다. 그리고 그 마개를 멋대로 열어버린 것은 엄마였다. 
 병실 탁상에 놓인 가습기가 뿜어내는 희뿌연 안개 뒤로 3년만에 만난 엄마의 얼굴이 꿈결처럼 흐릿하게 번졌다. 나는 쪽방에 모로 누워 올려다보던 엄마의 뒷모습과 옆얼굴을 떠올렸다. 엄마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은 태어나서 처음 있는 일 같았다. 엄마를 찾아가 새 집에서 함께 살자고 이야기 했을 때조차 엄마의 고개는 사선으로 기울어 있었다. 예술가들의 추상적인 작품처럼 엄마의 얼굴이 반만 존재하는 줄 알았던 시절도 있었다. 그래서 마이크가 입원해 있다는 병원 주소를 받았을 때 이모가 호들갑을 떨며 엄마 손에 감긴 붕대를 매만질 때 나는 엄마의 얼굴이 낯설다는 생각만 했다. 뻥 뚫린 어둠처럼 새까맣기만 할 줄 알았던 곳에 나와 닮은 눈과 코가 있었다.
 “마이크한테 외투를 전해줘. ‘경이네’로 가 줘.”

 무척 오랜만에 만난 마이크는 내가 실로 꿰어 쪼그라뜨린 천 조각처럼 작아져있었다. 넓고 탄탄한 몸은 잔뜩 여위어 환자복이 어깨 위로 붕 떠 있었다. 내가 병실에 들어섰을 때 마이크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다가 제 침상 앞으로 다가선 나를 보고는 당황한 듯 함박웃음을 지었다.
 “경이, 여긴 어쩐 일이야.” 나는 숱이 적어진 그의 눈썹과 주름진 미간을 보고 그가 아주 많이 외로웠고 아팠음을 느꼈다. 이마에 생긴 하얀 각질이 슬픔의 무게를 가시화했기 때문이다. 
그는 폐암으로 입원한 상태였다. 클럽에서 일할 무렵 손님들이 피우던 담배가 억지로 권해서 입에 문 담배 몇 십 개비가 자기를 이 정도로 병들게 할 줄은 몰랐다고 했다.
 “채소가게 아저씨가 3년 전에 가게를 내놓으셨던데….”
 “어떻게 알았어. 선희 누나가 말했어?” 나는 어쩌다 보니 알게 된 거라며 말끝을 흐렸다. 마이크는 내 대답에 실망한 눈치였다. 그러다가 금방 표정을 바꿔 남편과의 생활은 어떤지 물었다. 나는 처음으로 제대로 된 집과 가족을 얻은 것 같다고 말했다. 엄마를 원망하면서도 자조적인 내 태도에 마이크는 고개를 저었다.
 “선희 누나가 들었으면 엄청 서운해 했겠다. 너 결혼하고 누나가 얼마나 쓸쓸해 보였는데.” 나는 괜히 나를 위로하려는 듯한 마이크에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3년 전 호되게 까인 나의 제안과 그 이후로 연락 한통 없던 엄마의 매정함에 대해 토로했다. 내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마이크는 엄마에게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무슨 시간이요?”
 “치료할 시간.” 마이크는 침상의 맞은편 벽을 바라보며 내게는 안 보이는 것이 자신에게 보이기라도 하듯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갑자기 나타나 엄마에 대해 아는 체 하는 마이크의 태도에 슬슬 짜증이 났다. 엄마에게서 치료되어야 할 순간에 마이크는 없었다. 모든 것이 끝난 뒤에야 상가에 나타난 주제에 말을 얹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아직 그에게 건네지 않은 종이봉투의 겉이 구겨지도록 손에 힘을 꼭 주었다.

 종로의 원단 가게는 외할머니로부터 비롯됐다. 시래기 국 장사로 가게를 시작한 외할머니는 수입 원단을 들여다 원단 가게를 시작했고 시장에서 구제 옷을 떼다가 팔았다. 할머니가 살아계실 적 가게의 이름은 엄마의 이름을 딴 ‘선희네’였다. 내가 다섯 살이 되었을 무렵 할머니께서 돌아가셨고 엄마는 그 해에 ‘경이네’라는 이름으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그로부터 오 년이 지난 후 날 때부터 심장이 약했다던 아빠가 심장마비로 죽었다. 아빠는 온종일 쪽방에서 보낸 날이 많았으므로 지금 와서 아빠에 대해 추억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할머니와 아빠가 몸져 누웠던 곳이기 때문인지 엄마는 잠을 잘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인 쪽방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옆자리 요가 흐트러져 있는 것을 보고서 엄마가 쪽잠을 자고 갔겠거니 했다. 그래, 나는 엄마가 두려워하는 쪽방에 들어가 앉아 그곳이 우리를 해치지 않는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었다. 하지만 엄마는 쪽방을 포함해 내가 어디 있든 내 곁으로 와 안아주지 않았고 너도 무섭지, 나도 무서워. 하며 함께 울어주지 않았고 슬픔으로 얼룩진 가게에서 꺼내주겠다는 선심에도 냉정했다. 엄마가 치료할 시간을 원했다면 나는 충분히 오랜 시간동안 엄마를 내버려두었고 그 덕에 홀로 외로웠던 것이다. 
나는 서러운 마음에 간이 침대에 쪼그려 앉은 채로 울었다. 가슴과 허벅지 사이에 낀 종이봉투가 맥없이 바스락거렸다. 마이크는 힘없는 몸을 일으켜 겨우 손이 닿는 나의 머리를 반복해서 쓸어내렸다. 머리에 닿았다가 천천히 떨어지는 손길이 반복될수록 잠결에 들었던 소리가 기억 속에서 되살아났다. 도로록─훌쩍. 엄마도 울었나? 도로록─훌쩍. 엄마도 외로웠나? 그 시절 내가 느꼈던 모든 것들을 엄마도, 엄마도…. 훌쩍.

 내가 눈물을 그치고 호흡을 가다듬는 동안 마이크의 차트를 든 간호사가 다녀갔다. 침상에 붙은 이름표에 그의 진짜 이름이 있지 않을까 싶어 슬쩍 고개를 내밀어보았지만 영락없이 ‘마이크’라고 적혀 있었다. 마이크는 입원 수속을 밟는 과정에서 채소가게 주인아저씨가 보호자 역할을 자처했을 뿐 아니라 재정적으로 큰 도움을 주었으며 쓰러진 저를 업고 접수처에서 ‘마이크, 마이크요!’하고 정신없이 외치던 장면에 대해 자랑하듯 말했다. 내 기억 속 주인 아저씨는 퉁명스러운 배불뚝이였으므로 나는 마이크가 허풍을 떠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주인아저씨가 채소가게 다음으로 무얼 하냐는 질문에 말문이 막혀 얼굴을 쓸어내리는 마이크를 본 순간, 두 팔 사이로 일그러진 미소를 발견한 순간 그의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한국으로 가는 배 안에서 내 짐을 가져간 사람이 여자였는지 남자였는지, 어느 나라 사람이었고 나와는 어느 나라 말로 대화를 나눴었는지는 이제는 기억나지 않아. 어쩌면 나란히 앉아 말을 주고받던 순간에도 그의 얼굴을 살피지 않았었는지 모를 일이야. 짐을 도둑맞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나는 자켓 안주머니에 숨겨놓은 비상금을 떠올리며 안도했어. 손수 달았던 작은 안주머니는 스무살에 떠난 첫 여행에서 같은 상황을 겪으며 얻은 깨달음 그 자체였어. 어느 나라에 가든지 그 나라의 말을 알아듣는 것보다 말을 하는 사람에 대해 한눈에 아는 것이 어렵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내 마음 속에도 주머니 크기 만큼의 의심이 달려 있었어. 한국에서 맞이한 첫날 밤 싸구려 모텔 방을 빌려 남은 돈을 세는 동안 더 큰 주머니를 만들어 돈을 조금 더 많이 숨겨놓을 걸, 하며 후회를 했어. 주머니가 컸더라면 가방 안에 넣을 돈까지 그 안에 몽땅 숨길 수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그건 이상하지. 그러면 가방과 주머니의 의미가 뒤죽박죽 되어버리는 거니까. 돌아갈 채비가 넉넉지 않아 그날 밤은 뜬눈으로 지샜어. 스무살의 여행 이래로 오랜만에 얻은 깨달음에서는 모텔 천장에서의 곰팡내가 풍겼어.
나는 그 약간의 돈으로 지하철을 타고 줄이 긴 식당마다 들어가 밥을 먹고 잠자리를 옮겨가며 잠을 잤어. 누가 내 것을 빼앗아 갔어도 내가 이곳에 온 이유마저 잃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하지만 돈은 금방 동이 났고 나는 침대도 벽도 천장도 잃은 채 길바닥에서 잠을 청할 신세가 되었지. 며칠 사이 물렁해진 몸은 내리막길을 따라, 내리는 빗물을 따라 아무렇게나 흘러가다가 ‘경이네’와 채소가게가 있는 상가 안까지 다다랐어. 
 새벽이 늦도록 불을 밝힌 해장국집은 소란하고 따뜻해보였어. 나는 형광등에 거꾸로 매달려 시린 배를 덥히는 나방처럼 가게 안을 훔쳐보았지. 텔레비전에선 70년대 트로트가 구슬프게 흘렀고 상가 사람들은 불콰해진 얼굴로 그 노래를 따라 불렀어. 그 사이에 앉은 채소가게 주인 아저씨는 노래할 줄을 모른다는 듯 입을 다문 채 있다가 문밖에 선 나를 발견해주었어. 아저씨는 고갯짓으로 나를 불러 앉히고 전병을 담은 그릇을 밀어주었어. 한국에 도착한 첫날 평수를 넓혔던 마음속의 안주머니도 텅 빈 공간을 드러내며 입을 벌리는 듯 했어. 배가 고파 전병을 집어 먹고 몸이 시려워 받은 술을 속에 털어넣었지. 상가 사람들은 갑자기 나타난 나를 뜯어보며 베트남 사람인가? 아니야, 한국인 같은데? 했어. 그들은 내게 정체를 밝히라는 듯 어깨를 툭툭 건들기도 하고 알아듣지 못할 영어로 말을 걸다가 다시 텔레비전에서 흐르는 노래를 합창하기 시작했지. 그 자리에 대화란 없었고 오직 노래, 노래뿐이었어. 
 경이야 참 이상하게도 그 시절 노래에는 꾸밈이 없었다. 사람을 꿰어내려는 간사함은 말로써 은닉할 수 있지만 노래는 정말 그런 사람만이 부를 수 있는 언어의 또 다른 형태였어. 나는 더듬더듬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따라 불렀어. 누군가 내게 텔레비전 리모컨을 내밀었고 나는 그것을 붙잡고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지. 모두가 와하하 웃을 때 주인 아저씨는 내가 깨끗이 비운 전병 접시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너 나랑 갈래?’ 하셨어. 아저씨를 따라 가게 밖을 나설 땐 아주 오랜만에 두 발로 땅을 밟고 선 기분이었단다.

 아저씨는 내게 이름을 물은 적이 없어. 그냥 적당한 영어 이름을 따다 마이크라고 부를 뿐이었지. 여행 채비를 마련하기 위해 고용된 내가 뭐라고 이름을 묻겠어. 여행지에서 사람을 만나고 떠나는 과정을 반복하며 적당한 경계심을 유지하며 짧은 만남에 의미를 두지 않는 법을 배웠으니까. 하지만 역시, 그런 건 쓸쓸하지. 내가 죽는 날까지 다시 볼 줄 몰랐던 너를 오늘에야 만나 ‘경이야’ 하고 불러보는 것이 얼마나 기쁜지 너는 모를 거야. 아저씨도 그런 기쁨을 꿈꿨을 거야.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던 이들을 만나 이름을 한 자 한 자 곱씹어 뱉는 순간을 바랐을 거야. 그래서 장사를 정리한 뒤 2층의 불을 밝히고 나면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한 자리에 오래도록 앉아 있던 거야. 그러다보니 문득 외로워져서 돌아가신 거야. 미처 치료되지 못한 외로움이었다고 생각해, 아저씨를 죽인 것은.
 아저씨는 임산부처럼 부른 배만큼 입이 무거운 사람으로 제 이야기를 함부로 하는 사람이 아니었어. 나는 상가 사람들이 간간이 하던 아저씨 이야기를 통해 그에 대해 알게 되었지. 아저씨에게는 식을 올리지 않고 함께 살던 여자가 있었는데 어느 날엔가 그 여자가 아저씨와 낳은 아들을 데리고 달아났다고 했어. 원래도 말 수가 적던 아저씨는 더더욱 말을 잃었고 입안에 갇힌 말들이 뱃속에 쌓여 몸이 부은 것이라고들 했지. 아저씨의 침묵은 아주 원시적인 몸부림이었을 거야. 외국에 가 새로운 단어를 익히고 그 나라의 억양을 배워도 시간이 흐르면 잊어버리기 마련이란다. 하지만 모국어는 영영 지워지지 않지. 가끔 다른 말과 혼동되어 나오기야 하지만 내 안의 어딘가에, 그래. 안주머니 같은 어딘가에 꼭꼭 숨어 있단다. 나는 모국어마저 잃어버린 아저씨가 가여웠어. 아저씨를 처음 만난 해장국 집에서 그가 홀로 침묵한 것은 노래는커녕 말하는 법도 잊어버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아저씨가 잠들고 나면 나는 텔레비전과 전등을 껐어. 방안이 어두워지자마자 그는 뒤척였어. 그러면 안 된다고 손을 휘휘 젓듯이 말이야. 나는 텔레비전이 꺼지지 않은 것처럼, 잠든 아저씨를 안심시키기 위해 텔레비전에서 흐르던 노래를 따라 불렀어.
 “인정 많은 아저씨가 한 세상 살아온 길. 추억 어린 옛 이야기는 사연도 많았었대요.” 아저씨는 마지막으로 몸을 뒤집고는 완전히 곯아떨어졌어. 아저씨가 입고 잠든 셔츠의 등판에 벌레가 파먹은 듯한 구멍이 나 있었는데 그 정직한 동그란 모양새가 나를 슬프게 했어. 저 동그란 것은 점점 크기를 키워갈 텐데 사람은 제 등판을 살피지 못하므로 평생 제 구멍이 깊어지는 것을 모를 것이기 때문이야. 나는 혼자선 살필 수 없는 내 등판의 구멍과 아저씨 대신 발견해버린 그의 구멍을 보며 쓸쓸해졌지.

 아저씨의 옷을 정리하며 구멍나거나 찢어진 것을 모두 골라냈을 때 아저씨는 애썼다거나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았어. 그는 그저 ‘경이네’ 맡겨라. 하셨어. 나는 네가 생각났어. 어둠 속에 서서 나를 바라보다가 내가 손을 흔들면 너 달려가 숨던 그 가게가 내가 가파른 계단을 내려오는 동안 어둠속에서 눈을 밝혀주던 가게의 빛을 기억했어. 나는 퀘퀘한 냄새가 나는 옷을 수선감으로 맡기는 것이 창피해 선희 누나에게 옷을 떠넘기듯 가게를 나왔어. 누나는 내 마음도 모른 채 나를 불러 세워 바지는 수선 안 맡겨요? 하고 물었어. 그리곤 내 바지 밑단이 터져 고무줄이 흘러내리고 있음을 알려주었단다. 누나는 나를 앉히고 내 바지의 터진 곳을 꿰매주기 시작했어. 고무줄을 새 것으로 갈고 잔뜩 닳아 터진 바지 밑단을 안쪽으로 접어 박음질 해주었지. 터지지 않은 한쪽은 터질지도 모르는 상황을 대비할 겸 반대쪽과 길이를 맞춰 안으로 접어 꿰매주었어. 나는 바지 수선이 끝난 뒤에도 그 자리에 오래도록 앉아 누나가 다른 이의 옷을 꿰매는 것을 바라보았어. 구석에서 여닫이 문을 열고 제 엄마의 등을 빼꼼 바라보는 네 모습도 보았단다. 나는 누나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과 나와 주인 아저씨만큼이나 외로워 본 사람임을 알았어. 하지만 우리는 각기 달랐지. 아저씨는 구멍이 났고 나는 그의 구멍을 발견했고 누나는 누군가 발견한 구멍을 닫아주고 있었으니까. 그러는 누나의 구멍은 누가 발견하고 누가 닫아주려나. 나는 괜히 그것에 대해 신경 쓰기 시작했어. 시간이 지나며 여행 채비는 충분히 모였지만 누나에 대한 생각도 충분히 쌓여 선뜻 어디로 떠나지 못했어.

 너 내가 한국을 ‘너무’ 좋아하지는 않았다는 거 알고 있었니? 한국에서 지내는 동안 나는 앵무새였기 때문이다. 내가 그렇지 않다고 믿어도 누군가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클럽에서 모창가수로 일하는 동안 친구가 되었다고 믿었던 이들은 하나같이 내게 무례했고 술과 담배를 강요했어. 내가 무대에 오를 때면 어둠속에서 ‘베트콩 새끼, 네 나라로 돌아가!’하는 고함소리가 들렸지. 나는 베트남 사람이 아닙니다. 말레이시아에서 온… 하고 말을 하려 하면 앵무새 같은 외국인 녀석이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며 다시 소리를 지르고 피우다 만 담배를 던졌어. 말을 배우고 노래를 따라하듯이 그들의 욕설과 고함도 자꾸만 내 안으로 흘러들어와 구역질이 났어.
 나는 광대의 커다란 코처럼 우스꽝스럽게 어깨 뽕이 들어간 붉은 자켓을 걸친 채 골목에 들어섰어. 그리고 그동안 쌓였던 모든 것들을 토해내며 소리를 질렀어. 나를 광인이라고 여기는 듯 온 상가는 깊은 잠에 빠진 시늉을 하며 침묵했어. 나는 엎어질락 말락하며 자꾸만 앞으로 걸어갔고 어느새 내가 빛 속에 서 있다는 것을 알았지. 나는 ‘경이네’ 앞에 서 있었고 가게 안에서 나를 바라보는 선희 누나의 눈빛에 부끄러워졌다.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누나의 눈빛에 부끄럽고 부끄러워 참을 수가 없었고 나는 더 부끄러울 것을 알면서도 서럽게 울어버렸지. 
누나는 뒤 돌아 서더니 벽에 걸린 원단 앞으로 걸어가 가위질을 하기 시작했어. 누나마저 내 모습을 못 본 채하며 일에 몰두하는 듯 보였지. 하지만 누나는 잘라낸 원단 조각을 가지고 가게 밖으로 나와 내게 건넸어. 그리곤 밤이 늦었으니 어서 들어가라고, 시끄럽다거나 그만하라는 말은 하지 않고 그냥 그렇게 나를 돌려보냈어. 보풀 난 천조각이 뜨거운 손에 열을 더하는데 마음은 오히려 식어가고 됐다. 이제 괜찮다 하는 마음이 내 안의 깊은 곳에서 고개를 내밀었어. 그 순간이었을 거야. 내가 영영 한국을 떠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은. 누나의 구멍을 일러주고 직접 꿰매어주고 싶다고 생각했던 순간은.

 너 떠나던 날 나는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어. 남편과 떠나는 네게 마지막으로 손을 흔들고 ‘경이네’로 들어가 누나에게 나의 빨간 자켓을 수선해달라고 했어. 누나는 내 자켓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어디를 꿰매야할지 찾았지만 꿰맬 만한 구멍은 찾을 수 없었지. 누나는 말없이 나를 올려다보았고 나는 용기를 내어 누나에게도 구멍이 있다고, 등에, 뒷목 언저리에 총알 자국 같은 구멍이 있다고 말했어. 누나는 내 말을 듣고는 있는 건지 멀뚱히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다시 부끄러워졌어. 그러다 주인 아저씨가 나를 데려갔을 때처럼 너, 나랑 갈래? 했을 때처럼 함께 살자고 했단다. 사람에겐 서로의 구멍을 찾아줄 사람이 필요하니까 서로 등 뒤를 살펴주며 살아가자고 했어. 
 누나는 내 자켓을 작업대에 내려놓고 그때 내게 잘라준 원단이 있는 벽에 다가섰어. 누나는 그것을 쓰다듬기라도 하듯이 천천히 매만지고 풀어내기 시작했어. 누나가 내게 그 원단 조각을 내밀었던 날이 떠올라 귓가가 홧홧했지. 누나는 뒤로 돌아 내게 그곳으로 오라고 했어. 우리는 결혼 서약을 하는 신랑 신부처럼 나란히 서서 원단에 손을 올리고 천천히 그것을 쓸어내렸지. 그리고 나는 보고야, 아니 만지고야 말았어. 원단 안에 꿰어진 온갖 다른 천들을. 색이 같고 무늬가 같고, 틈이 보이지 않도록 촘촘히 박음질한 원단 조각의 각기 다른 감촉을. 달랐어. 내가 같다고 생각했던 것들은 실은 같은 게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외국인이라서가 아니라 나의 외로움은 다 나아버렸는데 누나의 것은 덧나고 있었기 때문이었어. 나는 누나에 의해 회복된 주제에 그녀를 나아지게 할 수 있다고 건방을 떨고 만 거야. 나는 자켓도 버려둔 채 가게 밖으로 도망쳐 나왔고 그날 이후 ‘경이네’에 가는 일은 없었어.

∗∗∗

마이크는 내가 건넨 종이봉투를 확인하고 퍽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울다가 웃는 것을 반복했다. 마이크는 앙상한 몸 위에 품 넓은 빨간 외투를 걸치고 내게 손을 흔들어주던 때처럼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는 떨어져 나갔던 스팽클이 온전히 붙어있는 것을 보며 감탄했고 외투를 젖혀 안쪽을 살피다가 엉엉 울기 시작했다. 옷 안쪽에 작은 기모 원단이 단단히 꿰매져 있었다. 엄마가 마이크에게 건넸던 한 뼘의 위로였다. 마이크는 서럽게 울며 말했다. 
 “나도 누나에게 이런 존재로 남고 싶었어.”

 마이크는 품 넓은 빨간 자켓을 걸친 채 병원을 나서는 나를 배웅해주었다. 나는 주차장을 향해 걷는 내내 자꾸만 뒤로 돌아 마이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마르고 앙상하지만 그 시절보다 아프지만 회복된 순박하고 순수한 청년의 얼굴을. 얇은 실로 시침질 한 듯 한 그의 얼굴에 엄마의 지난 밤들이 피어올랐다. 
 차 안에서 잠이든 남편을 깨우고 엄마가 있는 병원으로 가는 길, 나는 쪽방에서 바라보던 엄마의 등과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구멍들을 떠올렸다. 매일 밤 남의 옷을 수선하던 가깝고도 먼 여자의 모습을 그렸다. 바늘과 실로 타인의 마음에 위안을 박아 넣던 당신이 유일하게 해내지 못한 일은 이미 지나가버린 행복을 당신 삶에 박는 일이었음을 깨달았다. 나는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며 고속도로에 작은 간격을 두고 길게 그어진 페인트가 꼭 바닥의 균열을 붙든 명주실 같다고 생각했다. 나 역시 얇은 실에 묶여 어딘가로 흘러가고 있는 것 같았다. 그곳으로 가면, 눈을 감고 숨을 고르다 보면 ‘경이네’에서 미싱기를 돌리고 있는 엄마가 하얀 명주실의 끝자락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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