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로를 거닌 사람] “사람을 존중하는 것, 그것이 나의 인생철학이에요”
[천마로를 거닌 사람] “사람을 존중하는 것, 그것이 나의 인생철학이에요”
  • 김민석 기자, 이상준 기자, 김경민 수습기자
  • 승인 2021.05.31 18: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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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찬돈 동문(법학과 79학번)은 *입신양명(立身揚名) 이현부모(以顯父母)의 뜻을 갖고 졸업 후 줄곧 법관의 길을 걸으며 우리 대학교의 위상을 높이고 있다. 이에 45대 대구고등법원장 직을 맡고 있는 그를 만나 학창 시절과 법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봤다.

 법학을 전공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집안에 공무원으로 근무하신 분이 많았기에 어릴 적부터 사법, 행정고시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듣고 자라 고시 공부에 관심을 갖게 됐어요. 이에 고등학생 때 자연스레 문과를 지망해 법대에 진학하게 됐죠.

 우리 대학교 법학과에 진학하게 된 계기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당시 대입제도는 모집군이 전기와 후기로 구분됐고, 각각 한 곳씩만 지원할 수 있었어요. 처음 입시에선 전기 대학인 서울대에 지원했지만 낙방해 재수를 선택했어요. 하지만 다음 입시에서도 서울대 진학에 실패했죠. 이에 후기 대학 중 지역에서 가장 명문이며, 당시 서울대에 낙방한 사람들이 많이 지원한 우리 대학교에 진학하기로 마음먹었어요.

 학부 시절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5·18 계엄 선포 등으로 인해 최루탄 연기가 가득한 시위에 참여한 기억이 나요. 1980년에 잦은 시위로 5월부터 10월까지 학교가 휴교하는 일이 있었어요. 이로 인해 교재 500페이지 중 50페이지만 진도를 나가는 등 수업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죠. 학교 수업을 제대로 들을 수 없어 혼자 열심히 공부했던 순간이 기억에 남아요.

 학부 2학년 때 사법고시 공부를 시작해 1984년 26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고 알고 있어요.
 1980년 12월 23일, 본격적인 고시 공부를 위해 동화사 인근에 위치한 고시촌에 갔어요. 고시촌에서 석 달 동안 여덟 과목을 열심히 공부해 이듬해 3월, 1차 시험에 합격하는 영광을 누렸죠. 이후 2차 합격은 세 번 낙방 후 네 번째 도전 끝에 석사과정을 밟던 와중 합격했어요.

 원장님께 ‘영남대학교’란 어떤 의미인가요?
 학부와 석사를 재학하면서 지금 되돌아보면 학교는 저에게 부모와 같은 존재였어요. 이제는 ‘입신양명 이현부모’와 같이 부모의 이름을 드러내는 것이 효의 마지막인 것처럼, 대구고등법원장으로 학교의 명예를 높임으로써 부모인 학교에게 자식 된 도리를 다했다고 생각해요.

 사법연수원에서 공부하던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당시 연수생 300명 중 6명이 우리 대학교 출신이었어요. 그래서 대학 동문 6명과 함께 공부하며 지냈어요. 하지만 그중에서 제가 가장 나이가 어렸고, 또 저를 제외한 모두가 경북고 동문이었기에 소외될 때가 있었어요. 이에 혼자 고군분투했던 기억이 남아있네요.

 우리 대학교 동문 최초로 고등법원장을 맡은 것으로 알고 있어요.
 우리 대학교 출신으로 법원장을 역임한 사람은 네 분이 계세요. 그중 고등법원장은 제가 처음이라 개인적으로 영광이고 보람차죠. 다만 책임감도 막중해서 잘해야 한다는 생각에 무거운 마음도 들곤 해요.

 원장님께서 검사, 변호사가 아닌 법관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법관은 사법부에서 최종적으로 결정을 하는 위치에 있어요. 모든 사람을 존중하는 저의 성격상 법관이 저와 가장 잘 맞을 것 같았어요. 그리고 여담으로 당시 성적이 상위권인 연수생들은 대부분 법관을 선택했죠(웃음).

 2000년에 대법원 재판연구관을 하신 것으로 알고 있어요.
 재판연구관은 대법관을 보조하는 일을 하기에 명예롭지만, 열심히 임해야 하는 자리죠. 재판연구관들 사이에서는 ‘월화수목금토일’에서 ‘월화수목금금금’으로 일주일이 달라진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어요. 보통 연구관은 평일 오후 11시에 퇴근하는 등 힘든 직책이기 때문이죠. 더불어 마지막 재판인 대법원의 판결을 기대하고 있는 사람들의 자료를 잘못 제출하면 재판 결과가 좌우될 수 있기에 직책의 무게를 항상 느꼈던 것 같아요.

 법관 재직 중 가장 기억에 남는 판결은 무엇인가요?
 1996년 9월 대구지방법원 소년부지원장으로 근무할 당시 소년사건에 대해 *즉결심판을 전담하고 있었어요. 당시 대명동에는 미성년자를 이용해 성매매하는 퇴폐업소가 많았어요. 이에 퇴폐행위를 한 미성년자들을 즉결심판에 회부했지만, 5~10일간의 구류를 선고받고 다시 퇴폐행위를 해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들을 즉결재판에 회부하지 않고 소년부로 송치하라고 지시했죠. 소년부에서는 법관의 직권으로 미성년자를 유치시킬 수 있기에 신상 조사를 거쳐 집으로 돌아가게 했어요.

 대구지방법원장 시절, ‘청년 맞춤형 개인회생 패스트트랙 제도’를 전국 최초로 도입해 청년들의 빠른 사회 복귀를 도운 바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10여 년 전, 대구는 경제 상황이 좋지 않았어요. 파산과 회생의 비율이 전국 평균보다 두 세배 높았고, 청년들 중에서도 파산, 회생 대상자가 많았죠. 청년들의 주된 채무 내용은 등록금 미상환과 같은 단순한 내용이었는데 파산, 회생은 접수된 순서로 진행되다 보니 처리가 오래 걸렸어요. 그래서 그 처리 기간을 줄여 청년들이 사회에 더 빠르게 복귀할 수 있게 하도록 ‘청년 맞춤형 개인회생 패스트트랙 제도’를 도입했죠.

 대구·경북지역 출신이며, 대구·경북지역에서 지난 30여 년간 법관 생활을 하셨습니다. 대구·경북에 대한 애정이 남다를 것 같아요.
 법관 생활 32년 중 4년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대구·경북에서 보냈어요. 예전부터 대구는 법조 사관학교라고 불릴 정도로, 대구 법조인들은 엄격하고 원칙적으로 재판하는 사람들로 알려져 있어요. 이에 법조와 관련해 대구·경북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고, 그 자부심은 지금도 여전해요(웃음).

 법관에서 은퇴하신 후 계획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진 않았지만, 대다수 법조인의 마지막이 변호사이기 때문에 변호사를 하지 않을까 싶어요. 그중에서도, 더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드는 변호사가 되고 싶어요.

 사법시험 선배로서 로스쿨 제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사법고시로 법관이 되던 시절 ‘결혼하지 않은 젊은 판사가 이혼 재판을 담당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었어요. 이처럼 법률만 공부한 법관은 다양한 경험의 부재로 사회 현상 및 국민 정서에 맞는 결론을 낼 수 없다는 비판이 있었고, 이로 인해 로스쿨이 도입됐죠. 총론적으로는 로스쿨 제도 방향이 옳다고 생각하지만, 부작용도 있을 거예요. 로스쿨 문제에 대해서는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들어봄으로써 검토해야 할 부분이 있다고 생각해요.

 법조인에게 가장 중요한 자질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법조인을 꿈꾸는 학생들에게 조언 한 말씀 부탁드려요.
 성실함과 형평 감각, 꿋꿋한 자기 의지가 필요해요. 법조인의 기본적인 사명은 사회 정의를 지키는 것이에요. 훌륭한 법조인이 돼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사회에 선한 영향을 기여하는 사람이 되길 바라요.

 *입신양명 이현부모: 후세에 이름을 떨쳐 부모를 영광되게 해 드리는 것이 효도의 끝.
 *즉결심판: 경미한 범죄 사건에 대해 정식 형사소송 절차를 거치지 않고 경찰서장의 청구로 순회판사가 행하는 약식재판.

인터뷰를 마친 기자들의 이야기

 뜨거운 햇볕 아래 가파른 언덕을 올라 대구고등법원을 마주했을 때, 법원이라는 이름에서 무거움이 느껴졌고,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는 긴장감이 나의 몸을 휘감았다. 하지만 따뜻하게 우리를 맞아준 김찬돈 동문의 배려와 그가 손수 내려준 커피 덕분에 처음의 긴장은 풀렸으며 잔잔한 클래식과 함께 그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흔히 자신이 졸업한 학교를 모교(母校)라고 부른다. 단어 모교의 한자를 보면, 모교는 단순히 자신의 출신학교라는 의미를 넘어 지금의 자신이 있기까지 어머니처럼 자신을 뒷바라지하고 보살피는 존재라고 해석된다. 우리 대학교도 지난 74년간 어머니의 마음으로 25만여 명의 동량(棟梁)을 배출했고 매년 3만여 명의 재학생을 자식처럼 뒷바라지하고 있다.

 요즘 우리 대학교가 개교 이래 최대 위기에 직면했다는 말을 듣게 된다. 이는 지속적인 학령인구 감소와 지방대에 대한 학생들의 인식 저하 등이 그 이유로 꼽힌다. 부모가 위독할 때 자식이 나서서 부모를 지키는 것처럼, 위기에 빠진 우리 대학교를 위기 속에서 구해낼 수 있는 능력도 우리 천마인에게 있다. ‘입신양명 이현부모’라는 말처럼 천마인 모두가 한마음으로 우리 대학교에서 배운 것들을 잘 갈고 닦아 모교 ‘영남대학교’의 이름을 드높이면, 우리 대학교의 위상 또한 더욱더 높아질 것이다.

 끝으로 나도 천마인으로서 혁신을 통해 진취적인 사람,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고 끊임없이 전진하는 사람, 자랑스러운 모교 ‘영남대학교’의 이름을 드높일 사람이 되겠다는 포부를 가슴에 품으며 ‘겨레와 인류를 위한 새 역사의 창조자’가 될 것을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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