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회 천마지성강연회 박경철 원장 강연초록

응시, 차이, 용기를 기억하는 글로벌 리더가 되어라

2009-12-06     박주현 기자

지난 25일, 우리대학 천마아트센터 챔버홀에서 제40회 천마문화상 시상식 및 제34회 천마지성강연회가 열렸다. 시골의사 박경철 씨가 강연을 맡아 ‘글로벌 리더를 꿈꾸는 학생들에게’라는 주제로 강연을 진행했다. 3백50여 명의 학생들은 강연자를 뜨거운 박수로 맞이했다.

우리대학 동문인 박경철 씨는 “20년 전 경산캠퍼스에 앉아 공부할 때만 해도 여러 후배들 앞에서 이런 얘기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제게 주어지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며 겸손하게 강연을 시작하였다. 다음은 박경철 씨의 강연 초록이다.

기성세대와 젊은이들은 무엇이 다른가

현재 여러분은 곤욕스러운 내면적 고통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당면하고 있는 시대가 여러분에게 기회의 시대이기 보다는 치열한 경쟁 속에서도 마땅한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아주 각박한 시대이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되었나에 대해서 화두를 던져보면 이렇게 정리해 볼 수 있다.

2000년대를 기준으로 그 이전 시대와 그 이후 시대로 나눠 보면 그 이전 세대의 특징은 추격시대로 규정할 수 있다. 이는 경제적‧사회적‧정치적으로 앞서나간 선두를 따라잡기만 하면 되는 시대를 말한다. 정치적으로 낙후되었던 7~90년대에 우리는 민주적인 체제를 구축하고 있는 국가를 따라 잡기 위해 애썼다. 이러한 추격성장의 시대에는 숨이 차고 다리가 아픈 대신 고민과 고뇌가 없어도 된다. 이 시대에서 중요한 덕목은 빨리 따라 잡는 것이었다. 상업적 측면에서는 일본, 미국제품을 따라잡는 것이었고 대학에서는 미국에서 교육받고 온 석·박사들이 창의적인 교육보다 그동안 배워온 지식으로 학생들을 빨리 사회에 이바지할 수 있는 기술자로 만들어야 했다. 그러다 보니까 논문하나 제대로 쓸 수 없고 베끼는 것은 당연한 것이 되어버렸다.

또 추격성장 시대에서는 선두를 따라잡기만 하면 승자가 되기 때문에 동료가 넘어지면 일어켜 줄 시간도, 돌아볼 새도 없다. 그 중에서 선두그룹이 있고 하위그룹도 있겠지만 그룹전체가 선두를 따라잡으려고 애쓰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시스템이었고 모든 사람이 달리기에만 집중한다면 기회가 주어지는 시대였다.

이 시기를 주도했던 기성세대는 어떤 마인드를 가지고 있느냐 하면 넘어진 사람을 도와주면 비효율적인 사람, 불필요한 사람으로 인식하는 마인드를 지니고 있었다. 또한 모두가 질주해야 되는 상황에서 질주하는 능력 하나만 인정하게 돼 교육은 사유하고 고뇌할 틈이 없는 주입식 교육이라는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우리는 왜 고민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질주하면서 왜 고민도 함께 해야 하는가? 이유는 시대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열심히 질주해 온 결과 2000년대를 접어들면서 우리가 선두를 따라잡게 되었고 2000년대 이후에는 우리가 선두그룹에 서게 되었다. 이제는 선두성장의 시대이다. 선두그룹이 돼 보니까 인도자가 없고 앞에는 우리가 개척해야 할 숲이 있다. 이제 숲을 헤치고 길을 뚫고 나아가야 한다. 이것이 우리사회가 당면한 과제이다. 숲이 있는 길을 달리기 위해서는 밥 짓는 사람, 치료해주는 사람, 나침반을 보는 사람 등 각자 기능을 갖춘 다양한 사람이 필요하다.

하지만 2000년 이전의 기성세대가 앞에 숲을 맞닥뜨린 지금에서도 질주만을 요구하기 때문에 여러분이 혼란스러운 것이다. 선도성장의 시대가 도래했을 때는 기성세대의 리더쉽들이 여러분에게 ‘한사람이 천 발을 앞서나가는 것보다 천 사람이 한 발을 앞서 나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해야 한다.

 글로벌 리더로서 가져야 할 것, 응시, 차이, 용기

이러한 선도성장의 시대를 자각하고 리더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있다. 하나는 응시, 두 번째는 차이, 세번째는 용기이다. 그 중에서 응시가 중요하다 생각한다. 차를 타고 들판을 달린다고 생각해보자. 차에 타고 있는 사람은 들판을 살펴보았다고 말하지만 산과 들판이 보였을 뿐이다. 하지만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 기름진 땅이 보이고, 걸어가면 수많은 작은 생명체가 보이기 시작한다. 이런 응시가 글로벌리더를 결정짓는 큰 요소이다. 질주의 시대에는 가야할 길이 많기에 간 거리만큼을 성취라고 얘기하지만, 선도성장시대가 맞닥뜨린 숲때문에 나아가는 속도가 더딜 수밖에 없다. 질주의 시대에 있는 사람들이 제일 부족했던 것이 응시이다.

여러분에게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을 소개하고 싶다. 아이히만이라는 사람은 유태인을 10만 명 이상 가스실로 보내 학살한 사람이다. 종전이 되면서 자취를 감추고 아르헨티나에서 이민을 가서 숨어 지내다 1920년대 이탈리아 정보국 모사드에 의해 체포된다. 종전이 된 지 수십 년이 지난 후, 인류사상 가장 사악한 전범의 재판이 열렸다. 이 때, ⌜뉴요커⌟라는 잡지에서 사회학자인 한나 아렌트에게 이 재판에 대한 기록을 부탁했다. 재판관이 아이히만에게 왜 죄 없는 10만의 양민을 학살했는가라고 묻자 아이히만은 ‘조국의 이름으로, 조국을 위해서’라고 대답한다. 후회하지 않는가라는 물음에 ‘더 많은 유태인을 가스실로 보내지 않는 것이 후회라면 후회다’라고 대답했다. 이 파렴치한 대답에 여론이 들끓었다.

하지만 이 같은 여론에도 불구하고 한나 아렌트가 재판 참관일기를 기고하면서 ‘아이히만은 무죄다’고 기록했다.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을 세 가지 측면에서 무능함을 가진 사람에 불과하다고 평가했다. 그 세 가지는 ‘생각의 무능성, 판단의 무능성, 말하기의 무능성’이었다. 그는 무엇이 옳고 그름을 보지 못하고 생각하지 못하고 그것에 대해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고 그 판단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맞지 않는 말을 한다는 것이다. 한나 아렌트는 ‘국가의 이름으로 민족의 이름으로’라는 미명 아래 폭력성을 간파하지 못한 것이 아이히만의 유일한 죄라고 말했다. 아이히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그 자리에서 ‘국가의 이름으로 남을 해치라’는 명령을 받았더라도 그 명령에 복종해 악자(惡子)가 될 수 있다고 한나 아렌트는 역설했다. 이를 ‘악의 평범성’이라 하는데 이 때부터 이 말이 널리 회자됐다.

지금 이순간 우리가 정의롭지 못한 일을 개탄하고 옳지 못한 일이 실린 신문을 보고 혀를 차지만 우리 자신이 제2, 제3의 아이히만으로 여기서 숨쉬고 있는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서 용산참사를 기억해보자.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달리 보일 수 있다. 누군가는 생존권을 부르짖었고 누군가는 국가의 명령이었기 때문에 그들을 제압하려고 올라갔다. 누구의 잘못인지 모르겠으나 불길이 일었고 고귀한 생명을 잃었다. 보수신문의 논조를 읽는 사람들은 왜 남의 집에 올라가서 불법행위를 하느냐고 주장을 하고 진보신문을 읽는 사람들은 그 불쌍한 사람들을 왜 학대하느냐고 주장을 할 것이다. 자기의 소신처럼 들리지만 과연 생각의 현명함, 판단의 현명함, 말하기의 현명함을 통해 얻은 응시의 결과인지, 무능함을 통해 얻은 진부함의 결과인지 생각해봐야할 것이다. 우리가 믿는 사회정의는 우리 사회 속에 작은 규범에 불과하다. 글로벌 리더가 되려면 범지구적인 사회사상을 가져야 한다.

그것은 바로 글로벌 리더로서 자격의 비판적 분석능력을 갖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백성과 시민을 구분할 때 백성은 그렇게 말하면 그렇게 믿고, 이렇게 말하면 이렇게 믿는 순종적인 사람을 말하고, 시민은 그렇게 말하면 과연 그럴까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뜻한다. 시민은 똑같이 보이는 사실을 비판적 분석을 통해 진실을 간파하고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다. 리더는 간파한 진실을 가지고 실천하고 생활 속에 옮길 수 있어야 한다. 사이비 지식인은 진실을 간파하는 눈을 가졌지만 그것을 실천하지 아니하고 실천하더라도 낮에는 실천하고 밤에는 복종하는 사람이다. 지식인은 자신에게든 타인에게든 한 점 부끄러움 없이 당당하게 자신의 삶 속에서 진실을 실천하는 사람이다. 한 예를 들어보자. 수많은 노동자가 주식을 사고 있다. 그런데 주식시장에서 주가가 오르기 위해서는 기업이 순이익이 높아야 한다. 순이익을 높이기 위해서는 임금을 통제해야 하고 임금을 상승시키는 등 직원의 복지에 힘쓰면 주가는 떨어진다. 이 때, 자기기업의 주가가 올라갔다고 박수치는 노동자의 모습은 과연 어떠한가.

내가 존경하는 판화가가 있다. 판화는 힘들고 고통스런 작업이다. 일일이 조각칼로 새겨나간다. 판화를 그리기 위해서는 원화를 그리고 수천만 번의 조각칼 질을 통해 음각을 새기고 작품을 만든다. 왜 그런 판화 작업을 하게 됐나라고 묻자 ‘평면적으로 그리는 그림은 내가 진실을 볼 수 없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그는 “내가 10년동안 한 산책로를 걸었지만 10년 내내 똑같은 모습으로만 보였다. 그런데 길을 걷다가 잠시 길가에 앉아서 개울을 내려다봤더니 10년을 지나온 길인데 달리 보였다”고 말했다. 이처럼 내가 간과하는 것과 응시하는 것의 차이는 물리적인 차이에서 나아가 사회전반적인 것으로 확대된다.

두 번째 강조할 것은 차이이다. 차이는 내가 다른 사람보다 상대적으로 무게를 달아서 A와 B의 무게를 가늠하는 것이고 다름은 무게의 경중이 아니라 숙성의 정도를 말하는 것이다. 글로벌 리더가 되기 위해서는 차이를 벗어나 다름에 대해 주목해야 한다.

현재 한국사회는 질주와 추격의 시대를 주도했던 기성세대가 여러분에게 차별을 가하고 차이를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역사의 수레바퀴는 그 누구도 멈출 수 없다. 그 방향은 각자의 다름이 존중되는 방향이다. 따라서 남과 다름을 연마할 수 있는 노력이 필요하다. 내 자신을 날카로운 송곳처럼 가다듬으면 낭중지추(囊中之錐)처럼 누군가에 의해 눈에 띄게 된다. 여러분은 스스로 여러분의 시대를 준비해야 한다. 차이와 차별의 한계가 아닌 소위 다름의 모습을 만들어야 한다.

세 번째 덕목은 도전이다. 용기를 내서 도전하는 것이다. 도전이란 말을 쉽게 할 수 있다. 하지만 도전은 지극히 힘들고 고통스럽다. 20대는 30대를 위해 준비하는 기간. 20대의 치열함이 30대를 열 수 있는 연료가 된다. 뜨거울 만큼 뜨거워야 하고 자신을 소진할 수 있어야 한다. 30대로 접어들면 꿈을 실현하는 단계이다. 20대 때 응축했던 불덩어리를 토해내고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뚜벅뚜벅 걸어가는 시대이다. 심장 안에 있는 불덩어리가 30대의 출사표에 대한 모티브와 사회 속에 필요한 인재로 되는 동력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30대를 보내고 40대 때 인생을 추수하면서 50대를 맞이하는 것이다.

여러분이 남들과 다름을 만드는 제일 중요한 것은 자기를 사랑하는, 자기애에서 출발한다. 내 자신을 미친 듯이 사랑해서 내 자신에 열광하고 나를 아끼고 나를 너무나 사랑하고 존재가치를 새기다보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나와 관계를 맺고 있던 것 사랑스러워 진다. 내 주변이 고마워 지면 마지막으로 오늘이 내가 살아갈 수 있게 한 사회시스템에 감사함이 퍼져나갈 수 있다. 소위 말하는 국가, 민족이 사랑스러워지고 다른 생명체, 인종, 국가, 자연 등 한발한발 사랑의 폭이 넓어지고 다른 사람에게 헌신하는 나로 달라진다. 지구공동체의 평화를 위해 헌신하고 넓은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겸애가 글로벌 리더가 가져야할 자질이자 나 자신을 지킬 수 있는 힘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