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논단] ‘보는 사람의 집’
[천마논단] ‘보는 사람의 집’
  • 정은 교수(교육학과)
  • 승인 2018.03.05 15: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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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 옛 친구들이 오래간만에 집에 놀러왔다. 왁자지껄 갖가지 이야기를 풀어놓다가 한 친구가 어떤 뜻 모를 상황을 부지런히 설명했는데, 나를 포함해 다들 그게 뭔지 도통 이해하지 못했다. 그때 누가 그랬다, “야! 그거 홀로그램 아냐? 너 제대로 본 거 맞아?” 덕분에 와르르 웃었는데, 돌아서서 생각해 보니 이런 질문, 과거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새로운 질문이었다.

 얼마 전부터, 정확히 말하자면 수년 전부터 배우다 말다 또 배우다 말다 한 언어가 있다. 수어(手語)다. 손도 못 따라가고, 눈도 잘 못 따라가고, 특히 표정이 못 따라가서 애를 먹고 있지만, 수어 수업이 있는 날이면 나는 어느새 또 그곳에 앉아 있다. ‘역시 매력적인 언어야.’라고 생각하면서.
 
 사람들은 흔히 수어(수화)를 농인들(만)의 언어라고 생각하여 - 물론 농인에게 수어는 모국어지만 -, 수어가 인류에게 제1언어였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간과한다. 또 이런 입장에서 ‘듣지 못하는 사람’의 의미로 ‘농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듣는 사람’이라는 의미의 ‘청인’이라는 단어의 반대어로. 그런데 얼마 전 재미난 글을 보았다. 농인은 ‘듣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보는 사람’이라는 주장이다. 수년째 수어를 배우는 한 사람으로서 나는 바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맞아, 이들을 지칭하는 새로운 용어가 필요해. 보는 사람. 그럼 시인(視人)이라고 해야 하나?

 수어는 무엇보다 표정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언어이기 때문에 매우 불가피한 상황이 아니라면 항상 서로 제대로 마주본 상태로 주고받는 언어다. 아마도 이런 친밀한 언어 태도가 가끔은 수어가 뭔지 모르는 사람들이 봤을 때, 대화 나누는 두 농인이 서로 깊이 사귀고 있다거나 심각한 슬픔에 빠져있다고 착각하게 하는 것 같다. 사랑하는 사이도 아닌데 저렇게 풍부한 표정으로 서로 눈을 맞추며 대화 나눌 리가 없다는 청인식 사고로 인한 오해. 혹은 슬픔에 빠진 누군가의 상태를 상대에게 전해주고 있을 따름인데, 그 언어(수어)가 가진 탁월한 생동감 덕에 마치 그 사람이 너무 안 좋은 상태에 처한 것으로 사람들이 잘못 받아들이곤 하는 것이다. 아무튼 나는 수어가 이런 특유함으로 인해 우리 대부분의 청인들이 표정을 숨기고 ‘대화인 듯 대화 아닌 듯’ 애매한 소통을 함으로써 겪게 되는, 소위 가식적인 의사소통의 굴레에서 본원적으로 벗어나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물론 이 말이 수어로는 거짓말을 할 수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앗! 홀로그램에서 수어로 이야기가 너무 번졌나?

 마지막으로, 무겁지만 기꺼이 글에 담고 싶은 2018년 봄 이야기가 있다. M.E.T.O.O.

 ‘보는 사람’이 있어야 ‘보이는 사람’도 있다. 내가 보아야 ‘네’가 보인다는 말이다. 중요하고도 신기한 사실은, 그렇게 ‘네’가 보일 때 그간 스스로 짐짓 외면했던 ‘내’가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나는 거기가 ‘집’이라고 생각한다.

 당신을 ‘보는 사람의 집’으로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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