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칼럼리스트] 우리 모두는 ‘지금, 여기’에 있다
[나도 칼럼리스트] 우리 모두는 ‘지금, 여기’에 있다
  • 김유신(문화인류 석사과정 2기)
  • 승인 2017.11.26 16: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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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대학의 단과대 학생회 선거에 출마한 한 선거운동본부가 해당 대학의 학생·소수자인권위원회가 보낸 인권 관련 질의서에 답했다. 질문은 “학생회 행사를 준비함에 있어서 장애인이 배제되지 않고 참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학생회 차원에서 어떤 일들을 할 계획인가”였고, 답변은 한 줄이었다. “저희 과는 장애인은 없습니다.” 또 다른 질문인 “학내 배리어프(barrier-free, 장애인의 생활에 불편을 주는 물리적 또는 제도적 장벽의 허물어짐)하지 않은 공간을 배리어프리하게 만들기 위해 어떤 일들을 할 계획인가”에 대한 답변도 “딱히 그런 공간은 없습니다.”로, 앞선 답변과 태도와 성격이 비슷했다. 총 11개의 질문과 답변을 담은 질의서는 SNS에 업로드 된 지 몇 시간 만에 큰 비판을 받았고, 결국 이미 당선됐던 해당 선거운동본부는 사과문과 함께 사퇴했다.

 이 뜨거운 이슈를 실시간으로 지켜보며 ‘표준'이 갖는 권력성에 대해 생각했다. 표준은 사전적인 의미로는 1. 사물의 정도나 성격 따위를 알기 위한 근거나 기준 2. 일반적인 것 또는 평균적인 것을 말하는데, 흔히 사회적, 문화적 측면에서 이야기할 때 사람들이 인식하는 표준은 후자의 의미에 가깝다. 이 때 표준이란 대체로 주류의 집단이 가지는 힘에 의해 ‘옳은 것’이나 ‘당연한 것’, ‘최선의 것’의 지위를 부여받는다. 그리고 이러한 지위는 ‘비표준’을 차별하거나 억압하는 기제로 작동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존재를 쉽게 지워버릴 위험을 낳는다. 조심스레 나름의 정의를 해보자면, ‘소수자’, 즉 ‘비표준자’는 단순히 그 수가 적은 것을 의미하는 개념이 아니다. 신체적, 사회적, 문화적으로 일정한 특질을 가졌다는 이유로 주류사회가 갖는 사회적 권력에서 배제되는 집단에 속해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말한다. 따라서 소수자의 문제는 양적 규모가 아닌 권력의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위의 선본이 “없습니다.”라는 말을 쉽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첫째, 장애인을 가시화된 신체적 특질을 가진 사람이라고만 여겼기 때문이고 둘째, ‘표준’으로서 본인들이 가진 ‘타인의 존재를 지울 수 있는’ 권력성에 대해 의심해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장애인은 다른 소수자 집단과 마찬가지로 스펙트럼이 매우 넓다. 신체적 특질이나 그로 인한 보조기구 사용으로 타인의 눈에 즉각적으로 장애가 인식되는 이들만 장애인이 아니며, 스스로 밝히지 않는다면 타인이 절대로 장애여부를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이는 성 정체성이나 성 지향, 채식주의 등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이들 중에서는 스스로의 소수자성에 대해 가시화를 원하는 이들도 있고,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다. 또한 적극적으로 발언하고 싶어 하는 이들도 있고, 침묵하고 싶어 하는 이들도 있다. 그런데 스스로를 가시화하지 않거나 침묵하는 것이 누군가가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을 허락하거나, 거기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은 아니다. 드러나지 않는 소수자들은 각자의 일상에서 나름의 방식으로 나름의 행위성을 갖는다. 침묵도 비가시화도 ‘존재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선택이고 행위이다. 보이지 않는다고 임의로 소거해서는 안 된다.

 미야베 미유키는 장편소설『낙원』에서 “사람의 행복이나 불행은 자기가 결정하는 게 아니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결정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우리의 말이나 행동이 타인의 행복과 불행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말이다. 상상해보라. 나의 존재와 정체가 타인에 의해 부정되고 지워진다면? 그러한 의미에서 제안한다. “어떤 경우라도 타인의 존재를 지우지 말 것”,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분명히 존재함을 잊지 않을 것” 우리 모두는 ‘지금,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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