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의 인문학] 그림읽기로 세상보기
[스무 살의 인문학] 그림읽기로 세상보기
  • 조규민 기자
  • 승인 2017.04.03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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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8일, 천마아트센터 챔버홀에서 박일우 교수의 특강이 진행됐다.                       사진 최준혁 기자

 그림으로 세상을 바라봐야 하는 이유=세상은 그림을 통해서 만나야 한다. 세상에는 두 가지 사람이 있다. ‘미술관을 방문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이렇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예술을 통해 자신의 삶을 윤택하게 할 수 있다. 최근에는 ‘교양’이라는 것의 개념이 바뀌었다. 어떤 일을 하게 되든 창의적인 업무를 해야 한다. 그래서 현재 기초 학문은 교양으로 바뀌고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소양’이다. 기초적인 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소양이다.

 그림은 미술대학을 다니는 학생들만 그리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미술대학 학생들은 미술 자체에 대해선 이해가 부족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왜 그림을 통해 세상을 바라봐야 할까? 철학은 수많은 학문으로 분화, 발달하면서 오늘날 모든 학문이 되었다. 그리고 이는 문서화 되어 있다. 글이라는 것은 지금껏 인류가 만들어온 모든 지혜가 담겨 있다. 그러나 인간은 글뿐만 아니라 그림으로도 인간 정신 활동의 궤적을 기록해 왔다. 글과 그림은 대등한 자격이 있는 거대한 인류의 자산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림을 그렇게까지 생각하지 않고 있다. 글은 1차원적으로 배치돼 있고, 글은 배워야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림은 2.3 차원으로 만들어져 있다. 평면 혹은 입체다. 때문에 자동으로 해석이 된다. 그것이 미술이다.

 김홍도의 그림 ‘서당’에는 한 학생이 책에 그림을 그려 혼나고 있다. 과거 엄격한 유교 문화가 지배하던 사회에서조차 인간은 본능적으로 그림으로 무언가를 표현하고 싶어 했다. 그림이라는 것은 글 이상으로 우리의 본능에서 나오는, 우리 자신의 표현 욕구를 충족하려는 도구였다. 이 외에도 다양한 언어나 글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현재는 이미지 시대다. 특히 SNS를 통해 이미지가 우리에게 쉽게 다가온다. 단지 이미지가 우리의 삶을 구속하고 있고, 나아가 이 세상을 보는 창구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의식하지 못할 뿐이다.

 그림, 일상에서의 오해=예술은 무조건 좋은 것이고, 그림은 무조건 아름다운 것일까? 우리는 이 관념을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어떤 이가 타인의 그림에 대해 분석을 하면 사람들은 “작가의 의도가 과연 그럴까?”라고 반문한다. 이러한 태도는 옳지 않다. 작가가 완성한 작품에서 작가의 구체적인 지각과, 우리가 그것을 보고 느끼는 생각은 일치하지 않는다. 일치할 필요도 없다. 그림이 그림인 이유는 여러 가지 의미가 함축돼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림의 매력이다. 미술관에서 “작가는 저 그림에 어떤 의미를 부여했을까?” 라고 감상하면 안 된다. 스스로가 해석하면 된다. 그려놓은 작품은 우리 것이다. 즉, 최소한의 분석 방법을 익힌다면 그 방법으로 그림을 분석해서 재구성하면 된다.

 예술은 우리가 접근하기 어려운 분야라고 생각한다. 과거 예술가는 위대한 천재, 시적인 존재, 광기가 있는 존재라 생각했다. 현재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창작의 고통을 받는 것은 인정하지만, 위대한 존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앞서 말한 생각들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림을 볼 때 최소한 자신의 틀이 있다면, 그게 바로 나의 그림이 된다는 것이다.

 그림을 분석해 보자. 그림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분석해 보는 것이다. 그림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점선, 면, 색채, 기법, 작가가 어떤 위치에서 힘을 줬는지 등이 있다. 이러한 요소들이 긴밀하게 연결된 것을 보면 흥미롭다. 구성요소를 분석해 보는 과정에서 그림은 새로운 그림으로 다시 태어난다. 그 과정에서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 그림을 보며 감탄만 할 것이 아니라 최소한의 분석 방법을 스스로 연구하여 그림을 본다면 더 큰 즐거움을 얻게 될 것이다.

 현대에서의 미술이란?=요즘 외국이나 한국의 미술관을 방문하면 대부분 현대 미술을 볼 확률이 높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현대미술에 관해서는 아무 할 말이 없다고 한다. 어렵다고, 모르겠다고 한다. 난 정반대라고 생각한다. 현대 미술이야말로 제일 쉽다. 현대인의 생활 그 자체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옛날의 그림들은 다 오래되어 부식되고 사라졌지만, 동상은 많이 남아 있다. 르네상스의 그림들이 훌륭한 한 이유는 인간이 3차원의 세상을 2차원의 세상으로 옮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근대 미술은 사물이 바뀌는 것을 관찰하고, 그것을 그렸다.

 그렇다면 현대 미술을 살펴보자. 서울시립 미술관에는 사람이 계단을 올라가면, 반대편에서 빔을 쏜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의 그림자가 생기게 된다. 사람들이 올라가면서 만들어 내는 그림자, 그 자체가 작품이다. 또한 타자기도 전시되어 있는데, 타자기는 타자를 쳐야 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 물건이다. 때문에 관람객들이 타자를 쳐줘야 종이에 벌레가 그려져 나온다. 관객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작품이 탄생하지 않는 것이다. 이를 모듈이라 한다. 상황에 따라 다른 형상들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관객 참여가 가능한 미술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작가들은 새로운 매체가 나타나면 그것을 사용한다. 과거에는 먹, 물감, 오일이 있었다. 현대에는 컴퓨터, 디지털이 나타났다. 이로써 작가들은 탁월한 소재들을 가지게 됐다. TV와 사진이 나온 이후 우리는 공간을 극복할 수 있었다. 또한 VR(가상현실)이 등장하면서 현실과 비현실의 사이를 극복할 수 있게 됐다. 가상현실 혹은 증강현실, 그런 것을 통해 모나리자 같은 그림도 만질 수 있는 것이다. 새로운 매체가 나타나면 예술의 내용이 바뀔 뿐 아니라 예술 본질 자체가 바뀐다. 이것이 현대 미술의 소통이다.

 요즘 사람들은 스스로가 느끼는 대로 프로그래밍을 한다. 이것이 최첨단 미디어 아트의 본질이다. 작가라는 것은 항상 옛날 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추구해야 한다. 그런 작가에게 새로운 도구를 쥐여주니 새로운 형상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늘날 예술, 미디어 아트는 현격한 혁신을 가져왔기 때문에 현대 미술의 대명사라고도 볼 수 있다. 이제 예술의 개념을 바꿔야 한다. 그동안의 예술은 ‘수준 높은 것, 아름다운 것’이 라고 정의되어져 왔다. 그러나 이제 이러한 정의들은 낡은 정의가 됐다.

 우리는 기존의 그림을 비슷하게 베껴낸 그림을 좋은 작품이라 얘기한다. 그러나 현대에선 기법, 재료는 중요하지 않다. 창조가 중요하다. 때문에 창의성을 위해 예술가들도 인문학, 철학과 같은 공부를 해야 한다. 옛날 예술가들은 대다수가 철학가였다. 실제로 미켈란젤로는 최고의 철학자이기도 했다. 그러나 현대에서의 예술가들은 단지 기술인이다.

 화가 ‘뒤샹’은 전시회에서 ‘샘’이라는 이름으로 소변기를 전시했다. 당시 그의 이러한 행동은 혁신적이었다. 작가는 구상을 하고,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뒤샹은 이러한 과정 없이 작품을 전시한 것이다. 이 외에도 화가 ‘폴록’, ‘워홀’, ‘쿤스’는 작품의 표절, 그림 찍어내기 등의 기법을 사용했다. 이들을 현대 미술의 아버지라고 부른다. 수천 년간 전해 내려온 예술 작품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고 그것을 혁신시켰기 때문이다. 이렇듯 현대의 미술은 다양하게 변화하고 있다.

 가끔 우리는 SNS에서 유명하지 않은 작가들이 만화를 게시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현대에서의 미술은 우리 주머니에서 꺼내면 항상 볼 수 있는 것들이다. 어떤 한 화가는 “이제 미술은 끝났다. 현대는 미술의 종말이다”고 말했다. 물론 역설이다. 미술은 성취되지 못할 목표를 달성했다. 이제 미술의 최후의 보루만 남았다. 그렇다면 최후의 보루란 무엇일까? 그 과제는 무엇일까? 첫째, 작품에 대한 주제가 있어야 한다. 둘째, 그것을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현대에서 예술가라 불리는 사람은 남들보다 조금 더 창조의 고통을 더 겪어 본 사람일 뿐이다. 미켈란젤로가 아니더라도, 반 고흐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예술가라는 것이다.

 미술관 방문은 이렇게=여러분은 앞으로도 미술관을 방문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은 관객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작품에 참여하러 가는 것이다.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이 없으면 그 예술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작가의 손을 떠난 작품은 더 이상 작가의 것이 아니다. 여러분이 감상하고 스스로 해석해야 비로소 예술이 탄생한다. 작가는 이 작품의 반을 완성한 것이고, 나머지를 여러분들이 완성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러분이 그림을 감상하기 위해선 생각의 깊이를 키워야 한다. 앞으로 여러분들은 미술관에서 작품에 대해 작가의 의도를 생각하지 말고, 자유롭게 평가하면 된다.
 

학생들의 질의응답

 현대 예술은 이미지로만 이뤄져 있다고 했다. 그러나 현대의 예술은 대중성을 의식하는 것 같다. 대중성만을 바라보고 창조성을 잃어버린 미술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는가?

 고전주의 낭만주의 등을 중심으로 역사를 이야기하는 것은 재미없다. 최근에 대중적인 이미지가 많이 나오고 있다. 나는 고급 예술이 따로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무엇이 대중적이고 무엇이 고급이고 무엇이 상업적인 것일까. 고대에선 로마 귀족들이 그림을 향유 했다. 중세 때는 성직자들이 그림을 향유했다. 근대에 들어와서는 자본가들이 그림을 향유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는 이러한 그림들과 이미지들이 대중화되었다. 대다수 사람들의 것으로 종속화되어 간 것이다. 그래서 상업성을 추구하는 이미지가 많다는 것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수많이 쏟아지는 이미지에서 상업성을 제거하는 것. 그런 것은 여러분들 스스로가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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