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논단] 미래가 닿을 수 없는 곳
[천마논단] 미래가 닿을 수 없는 곳
  • 정병기 교수(정치외교학과)
  • 승인 2017.03.06 19: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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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제 잡기가 어렵다. 자유 주제로 청탁을 받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프랑스의 시인 발레리(P. Valery)는 생각하며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한다고 했다. 오늘은 한번 엇나가보자. 사는 대로 생각해보기로 한다. 그리고 쓴다.

 나는 정치학을 공부한다. 그런데(아니면 그래서) 정치인과 목사가 싫다. 그들은 만나면 손부터 꼭 잡고, 더 반가우면 꽉 끌어안는다(물론 그렇지 않은 정치인과 목사도 많다. 요즘은 많이 세련되어서 그렇지 않은 사람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나는 스킨십을 싫어해 그런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또 우리에게 잘 알려진 레바논 시인 지브란(K. Gibran)은 열정과 이성을 각각 바다를 항해하는 영혼의 돛과 키라고 했다. 사회와 역사의 발전에 열정과 이성은 모두 중요하다. 그러나 열정의 바다에서 항해한다면, 이성이라는 키가 필요하다.

 특히 사회적 행동에서 감정에 호소하는 것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 권위에 호소하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정치인과 목사는 사회적으로 지도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권위적이 아닐지라도 손을 꼭 잡고 몸을 꽉 끌어안는다면, 그것은 감정에 호소하는 것이다.

 감정이나 권위에 의지하는 것은 정의와 거리가 멀다. 정의는 이성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촛불집회와 태극기집회를 보면서 마음이 착잡하다. 그들 중 누가 감정과 권위에 기대어 호소하고 주장하는가?

 대통령을 두 번이나 탄핵할 정도로 우리나라도 민주주의가 발전했다. 광장에 모여 집단적으로 상반된 주장을 하면서도 폭력 충돌이 일어나지 않을 정도로 시민의식은 성숙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정경유착과 권력형 부패가 판치고 있으며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가 버젓이 존재하고 있다. 게다가 탄핵 심판은 감정적 호소로 난장판이다. 일부 정치인들의 정치의식은 아직 군사독재 시기에 머물러 있다.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수많은 무비스타들이 서슬 퍼런 신임 대통령에 반대하는 파란 리본을 달고 나왔다. 태극기집회에서 성조기를 흔드는 사람들은 이러한 미국의 모습을 알고는 있는지 의심스럽다. 약소국에 사드를 배치하는 미국을 여전히 ‘자유 대한의 해방국’으로 반기는 것으로 보인다.

 감정과 권위에 호소하는 주장은 대개 그 사람의 이익과 관계가 있다. 감정과 권위는 그것을 은폐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이성적 성찰과 논의를 피해가기 위해서다. 이들은 열린 사회를 두려워한다. 열린 사회는 이성적 성찰을 통해 다른 사람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옳은 얘기라면 수용하는 사회를 말한다. 편견에 사로잡혀 자신이 무조건 옳다고 생각하거나 자신이 틀린 것을 알면서도 이기는 것만을 능사로 생각하는 사회는 닫힌 사회다.

 물론 닫힌 사회는 열린 사회로 발전해 간다. 하지만 그 과정에는 진통이 따른다. 개인은 고통이 두려워 피할 수 있으나, 사회 전체는 이 과정을 피해갈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닫힌 사회의 요소들을 골라내어 지양해나가는 것이다.

 미래가 닿을 수 없는 곳이 있을까? 있다면 그곳은 성찰이 없고 절망만 있는 곳이다. 이성의 키 없이 열정으로만 항해하거나 열정조차 없는 경우다. 그것은 후퇴로 귀결된다. 후퇴는 시간적으로 이후일 수 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미래와 연관 짓지는 않는다. 이성적 성찰이 있다면 미래가 닿을 수 없는 곳은 없다. 미래는 희망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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