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문화상] 내가 스스로 만드는 인생의 한 줄
[천마문화상] 내가 스스로 만드는 인생의 한 줄
  • 곽미경 준기자
  • 승인 2016.11.28 2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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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강연 주제는 ‘사람의 인생을 바꾸는 한 줄이 어떻게 만들어지느냐’이다. 우리는 인터넷으로 인한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다. 엄청난 정보 속에서 본인에게 꽂히는 그 한마디를 찾기가 힘들다. 인생의 한 줄을 찾기 위해 가져야 할 것은 한 줄의 이야기가 우리 인생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이다.

 이야기와 가치관의 중요성=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알렉산더 대왕의 이야기이다. 알렉산더 대왕이 어릴 때 꿈이 무엇이냐 물으니 ‘세계를 제패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 후 실제로 알렉산더 대왕은 페르시아에 쳐들어가 페르세폴리스라는 그 시대 세계 최대도시를 정복하게 된다. 이집트와 페르시아를 정복한 알렉산더 대왕은 그곳에 안주하며 살 수 있었지만 ‘나는 아직도 배가 고프다’며 인도 정복을 꿈꿨다.

 알렉산더 대왕은 정예 군대를 모아 인도로 향했다. 하지만 만년설이 쌓인 힌두쿠시 산맥 넘는 과정에서 많은 정예군이 죽었다. 인더스 강 앞에 도착한 정예군은 인도왕의 근위대와 마주하게 된다. 그 당시 인도는 어마어마한 문명국이어서 알렉산더의 정예군과 인도 왕의 근위대 사이에는 병력 차이가 컸다. 하지만 알렉산더 대왕은 후퇴를 모르는 사람이었고, 인도로 가는 강을 건너려다 알렉산더 대왕과 그 측근을 제외한 정예군들은 모두 죽게 된다. 이에 인도로 가는 것을 포기하고 페르세폴리스로 가기 위해 사막을 건너서 도보로 돌아가던 중 알렉산더 대왕은 길거리에서 희한한 노인을 만나게 된다. 이 노인은 오랫동안 씻지 않아 머리 위에 파리가 오갔고 갈비뼈는 훤히 드러났다. 먹을 생각도, 잘 생각도 하지 않고 같은 자세로 계속 앉아있었다. 뭐 하고 있냐는 알렉산더 대왕의 질문에 노인은 “인생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다”라고 답했다. 이에 알렉산더 대왕은 “저는 28살에 페르시아 대제국을 정복해 왕이 됐고, 인도도 정복해 세계를 제패하는 황제가 될 것입니다”라고 얘기하자, 노인은 웃더니 수풀로 걸어가서 가부좌를 틀고 수련을 계속했다.

 인도 사람의 눈으로 알렉산더 대왕을 보면 그는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사는 청년이며, 사막 한가운데서 철갑을 두르고 터벅터벅 걸어가는 사람이었다. 노인은 그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객관적으로 봤을 때, 알렉산더 대왕이 본인보다 더 힘든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알렉산더 대왕은 그것을 고생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세계 정복’이라는 꿈을 좇고 있다고 생각했다. 앞서 말한 내용에 보면 우리는 자기 자신의 꿈은 현실적이라고 생각하고, 대체로 남의 꿈은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경제적 성공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예술을 꿈꾸는 사람이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을 하고, 어떤 사람이 취직보다 자유 시간을 선택하고 싶다면 그 사람을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어떤 이야기가 자기 이야기냐에 따라 서로 다른 꿈을 좇는다는 것을 시사한다.

 몇몇은 힘든 일을 굳이 찾아가는 알렉산더 대왕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세계정복’을 현실적인 꿈이라고 생각했고 그것을 좇아갔다. 그의 가치관 때문이다. 어떤 가치관을 머릿속에 설치하는 것이 인문학이라 생각한다. 우리의 행동은 우리의 가치관에 의해 정해진다. 가치관이란 무엇이냐면 ‘뭣이 중헌디?’란 질문의 답변이다. 가치관에 인문학자들은 ‘주의’라는 단어를 붙인다. 돈이 중요한 사람은 물질주의자, 소설 같은 인생을 살고 싶은 사람은 낭만주의자, 예쁜 데서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은 탐미주의자다. 이런 가치관은 이야기를 통해 머리에 설치된다. 스토리를 읽는다는 것은 새로운 가치관을 머리에 다운로드하는 방식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 안에는 ‘영웅’이라는 가치관이 들어있다. 이는 그리스가 아이들에게 은연중에 주입하는 가치관이다. 아킬레우스는 버릇이 없고 남을 존중하지 않는 사람이었음에도 싸움을 잘했기에 그리스 사람들에게는 그가 영원한 영웅으로 남았다. 이 스토리를 어렸을 때부터 읽고 자란 사람에게 영웅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어떤 적을 만나면 싸워 이기고, 더 센 적을 찾아 나서고, 또 그 적과 싸워서 이기고 어느 순간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적을 만나게 되면 그 적의 손에 명예롭게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라 대답할 것이다.

 인도사람들은 어떤 스토리를 읽고 자랐을까? 인도 아이들이 많이 읽는 책 중에 ‘마하바라타’라는 책이 있다. 이 책에는 ‘바라타’라는 영웅이 나온다. 바라타도 알렉산더 대왕처럼 젊은 나이에 인도 천하를 평정한다. 본인이 얼마나 잘났는지를 알리기 위해 세계를 정복했다는 의미로 ‘인도에서 보이는 가장 높은 산 위에 깃발을 꽂아놓겠다’고 결심하고 에베레스트에 오르게 된다. 에베레스트 꼭대기에 올라가 세계를 정복했다는 깃발을 꽂으려는 순간 눈앞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이미 만개가 넘는 깃발들이 펄럭이고 있었다. 그 밑에는 왕관을 쓴 해골들이 늘어져있었다. 그걸 본 바라타는 ‘나와 같이 세계를 정복해서 영원히 이름을 남기겠다는 포부를 가진 사람들도 시간을 이겨내지 못해 뼈가 됐다’는 생각에 회의감을 느껴 수련의 길을 떠났다는 이야기가 있다. 앞 두 이야기를 읽고 자란 사람들은 당연히 다른 인생을 살게 된다. 알렉산더 대왕을 비롯한 그리스인들은 계속 새로운 것에 도전해 싸워야 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반면 인도 사람은 어려서부터 ‘잘사는 것은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해 인생이 허무하다는 것을 깨닫고 찰나를 있는 그대로 즐기면서 세상에 너무 연연하지 않는 것을 좋은 인생이라 인식할 것이다. 이렇게 우리가 어렸을 때 어떤 이야기를 읽고 자랐느냐에 따라 우리의 인생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뻗어 나간다.

 한국의 이야기와 가치관, 그리고 인문학=우리는 과연 어떤 이야기를 듣고 서로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주며 살아왔을까? 2016년 대한민국에도 아킬레우스와 헤라클레스 같은 인물이 존재했을 것이다. 근데 그 존재는 그리스 로마 신화 안에도 인문학책에도 국어 시간에 배운 여러 소설 속에도 있지 않다. 친구들과 부모 사이에 오가는 이야기들에서 탄생한다.

 문학에서 원형(archetype)이라고 부르는 어떤 존재이다. 한국 학생들이 많이 접하게 되는 것은 ‘엄친아’라는 존재다. 이 엄친아들은 대체로 특징이 있다. 시험을 잘 봐서 성공한다. 대부분의 한국 청소년들은 성공을 시험에 합격하는 것이라고 배웠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학생들이 사회에 나가게 되면 갑자기 이상한 상황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아무도 시험을 보라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수많은 청년이 시험이 존재하는 곳으로 도망친다. 어떤 기성세대는 청년들이 공무원을 준비하는 것이 안정된 삶을 살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경쟁률 높은 공무원 시험이 안정된 것인가? 그것은 도박이다. 가장 위험한 행동이 경쟁률 높은 시험에 자기 인생을 거는 것이다. 그 때문에 우리는 여러 책을 읽고 우리와 다른 생각을 한 사람들이 만들어 낸 이야기를 접하면서 나한테 맞는 가치관이 무엇인지 찾아야 한다.

 대학 재학 중 당시 집이 경제적으로 굉장히 어려워졌다. 재학 중 학비가 없어 1년 휴학을 하게 됐다. 휴학하는 동안에 많은 책을 읽었다. 그중 감명 깊게 읽은 시가 있다. 프랑스 시인 샤를 보들레르가 쓴 ‘여행’이라는 시이다. ‘선장이여 나는 준비가 됐다. 닻을 올려라. 가는 곳이 천국이든 지옥이든 무슨 상관이겠냐. 미지의 세계에서 새로운 것만 찾아낼 수 있다면.’ 이 구절을 읽고 굉장히 감동했다. 이 시를 읽고 나는 성공하는 것보다 새롭고 멋진 것을 더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부터 새로운 것을 찾아 세계를 떠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나한테 중요한 것은 안정이 아니었다. 그것을 할 수 있는 용기는 가치관의 정립이었다. 새로운 이야기를 통해 머릿속에 설치된 새로운 가치관이다. 그렇다고 내 가치관이 모두에게 다 맞는다는 것은 아니다. 안정을 사랑하는 분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여러분은 아직 그 선택의 여지가 얼마나 넓은지 모르고 있다. 내가 어떤 직장을 선택해서 어떻게 돈을 벌고 싶다, 변호사를 하고 싶다, 작가를 하고 싶다는 것은 여러분의 생각보다 여러분의 가치관과 크게 연관이 없을 수 있다. 왜냐하면 먹고사는 문제는 대체로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해야 하는 것과 연관돼 있기 때문이다.

 가치관은 ‘내가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는가’이다. 인문학책이나 역사책을 읽으면서 ‘내가 남의 스토리, 이야기, 인생을 왜 읽고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수 있고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나는 이야기를 왜 읽나 물어보면 나와 전혀 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알아야 수많은 가치관 중 나랑 맞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라고 답하고 싶다. 대부분의 사람은 속해있는 문화권이 주입한 가치관을 평생 가지고 살아간다. 체질과 환경이 잘 맞는 경우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인문학을 접하고 이야기를 읽을 때 열린 마음으로 읽어서 다양한 가치관을 만나게 되면 좋겠다.  그리고 해석에 얽매이지 않는 독서를 해야 한다. 머리로 읽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읽으면 책이 우리 인생에 가지는 의미를 발굴할 수 있다.

 책을 한 줄 한 줄 느끼며 읽으면 좋은 덩어리를 씹게 된다. ‘아까 씹은 것은 나랑 안 맞는 건데 지금 씹은 것은 한우 등심이다’가 느껴지면 그게 내 인생의 한 줄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내 마음 깊숙이 박힌 스토리들이 내 가치관을 변화시켜나가고 그제야 우리는 우리가 당연하다고 느끼던 스토리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인도의 신화에 따르면 바루나라는 신은 눈이 천 개나 있다고 한다. 인드라라는 신은 전통에서 마음이 굉장히 좁은 신이라 눈이 백 개밖에 없다. 시바신은 파괴의 신이기 때문에 눈이 8개밖에 없다. 우리가 원래 가지고 태어난 눈 2개로만 세상을 봤다면, 만약 새로운 정보를 접할 때 그 사람이 어떤 눈으로 세상을 보는지 이해하면서 읽으려고 하면 8개나 10개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상대방을 고려하며 얘기할 수 있고 상대방이 어떤 상황인지 이해할 수 있는 조금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 또 나에게 적합한 가치관이 무엇인지 고를 수 있어 더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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