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건국의 철학, 세상의 기획자 ‘정도전’
조선건국의 철학, 세상의 기획자 ‘정도전’
  • 홍정환 준기자
  • 승인 2016.11.15 0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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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일 상경관 210호에서 김영수 교수(정치외교학과)의 특강이 진행됐다.                  사진 홍정환 준기자


 흔히 조선의 설계자는 정도전이라고 알려져 있다. 정도전은 어떻게 해서 조선을 건국하게 됐을까? 도대체 그는 어떤 사상을 갖고 있는 사람일까.

 혁명이 일어나면 그 과정에서 역사가 만들어진다. 혁명의 시대는 도전의 시대라 할 수 있다. 4차 산업 혁명시대가 목전으로 다가와 있고, 60년 만의 큰 전환기가 다가왔다. 이는 세상을 몰락으로 치닫게 할 수도 있고,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따라 역사를 이룰 수도 있다. 지금 한국 정치도 큰 위기에 봉착했지만, 새로운 국면 전화의 계기가 될 수 있다.

 고려 말에도 세 가지 변화가 있었다. 첫 번째로 동아시아의 정치체제가 바뀌며 권력 구조가 바뀌었다. 원나라 시대에 처음으로 유라시아 대륙을 연결시켰다. 그런데 명나라가 들어서며 그것이 붕괴됐고, 전체 권력 구조가 바뀌었다. 두 번째는 조선왕조에서 고려왕조로 넘어가며 권력 구조가 바뀌었다. 세 번째는 사상이 변동되는 시기였다. 시대의 도전에 직면해 이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문제를 창조적으로 이해하고, 해결해나가면 역사가 한 발자국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지 못하면 그 자리에 머물게 된다. 당시 문제를 인식하고 도전해 나갔던 사람이 정도전이었다. 근대 이전의 시대는 토지를 이용해 먹고 살았기 때문에 토지제도가 왕조의 길이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토지제도가 왕조 초기에는 건전하게 유지되다가 왕조 말기에 굉장히 타락하게 된다. 쉽게 얘기하면 이는 세금 문제이다. 처음 국가를 만들었을 때 세금을 총 생산의 10%정도로 보는데, 왕조 말기에 가면 70%까지 이른다. 그러면 농민이 30%를 갖고 먹고 살아야 하는데, 인구수가 많아져 배분이 충분치 못하면 다 사망하게 되는 것이다. 흉년이 한번 들면 인구의 1/3이 죽는 취약한 시기였다. 그런데 30%로 살아가다가, 흉년이 들면 사망하는 사람이 증가하는 것이다. 그러니 한계에 이르면 농민들이 봉기를 일어나고 새 왕조가 들어서는 식으로 역사가 진행됐다.

 고려를 전후기로 나누면 태조 왕건 918년에 고려 왕조를 건국, 후삼국을 통일해 두 번째 통일 왕조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무신란이 일어난다. 고려왕조를 처음 만든 문신지배의 틀이 붕괴되고, 무신지배로, 원나라 지배기로 들어갔다가 고려가 멸망하게 된다. 이 시기에 국가의 독립성이 약화되긴 했지만 제1차 세계화가 원나라 시대에 일어났다. 이는 결국 세계의 상품, 얼마나 이동성이 강화됐는지가 세계화의 핵심이다. 당시 세계화는 상품을 기반으로 하는 것으로 안전에 의해 유지된다. 확실한 정치권력 아래 치안이 이뤄져야 이동이 일어난다. 유라시아의 경우 유럽, 아시아, 중동을 잇는 실크로드가 만들어졌지만, 한계가 있는 시스템이었다. 그런데 몽고가 교통시스템으로 역참을 만들었다. 지점을 만들고 말을 대기시켜 빠르게 이동시키는 것인데, 몽고인들이 치안을 담당했다. 유럽과 중동에 아시아 전체의 교역량이 연결이 됐다. 당시 원나라 수도인 베이징에서 처음으로 세계문화가 만들어졌다. 세계문화를 공부하고 길러낸 사람들이 조선의 건국자이다.

 고려 말 1300 이후에는 고려 사람들의 문진이 폭발한다. 이는 몽고의 세계화경험을 고려가 유입하며 지적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원나라 수도에서 살던 고려인구가 북경에서 고려를 오가며 교류가 이뤄졌다. 예속적인 성격이 있지만, 당시 세계가 만들어내는 최고 문명을 수입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이것이 조선이 됐다. 당시 큰 문제는 공민왕이 집권 하며 즉위교서를 발표하는데, 4가지 문제를 지적했다. 인사, 재정, 국가, 기후에 문제가 있다고 봤지만, 해결하기 위한 장치가 없었다. 그럼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왕조시대 개혁을 위해선 왕이 힘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원나라가 왕을 지명했기에 왕은 고려 내정이 아닌 원나라의 눈치를 봤어야 했기에 개혁을 생각할 수 없었다. 고려 정치를 운영하는 친원세력의 딸들이 원나라 유력자와 결혼했다. 그러니 왕이 되어도 왕위 유지를 걱정해야 했다. 원나라 때문에 왕이 안심을 하고 무엇을 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었기에 개혁도 하지 못했다.

 토지제도가 붕괴된다. 과거는 토지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시대였다. 근대 이전의 토지제도는 공전제로 개인의 사유재산이 없다. 전국 토지를 국가에서 어떤 역할을 하느냐에 따라 나눈다. 이는 왕실 비용, 관료의 월급, 군인의 월급 등 필요에 따라 배분했고 잉여 토지는 없었다. 이성계가 토지개혁을 하긴 했지만 백성들은 토지를 소유 할 수 없었다. 백성들은 국가가 임대인인 것과 상관없이 토지를 경작하면서 얼마나 세금을 내느냐가 중요하다. 정상적인 토지제도라면 10%의 세금을 내면 되는데 그렇지 않았다. 관료에게 토지를 나눠주면 관료가 토지를 반납해야 한다. 그런데 반납하지 않았고, 토지하나에 세금을 받아올 사람들이 7~8명까지 나왔다. 세금으로 생산량의 70%까지 받쳐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니 행정체계를 유지할 수 없었고, 군대를 유지할 수 없다. 이로써 국가 체제가 붕괴가 되고 외구문제에 대비할 수 없었다. 관료 체제가 비정상이니 원나라가 무너지고 명나라가 들어오는 시기에 외교문제를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우리나라도 동아시아의 세력변동기였다고 볼 수 있다.

 네 번째는 사상의 위기이다. 사상이라는 것이 종교의 형태로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백성들의 마음의 안정이다. 정치는 기본적으로 질서를 만들어내는 것이 임무다. 법을 지키지 않으면 처벌을 통해 질서를 만든다. 국가가 질서를 만들어 내는 데는 비용이 든다. 그런데 종교는 전혀 비용이 들이지 않고 질서를 만든다. 그래서 종교 활동에 대해서 세금을 면제해준다. 종교는 백성들의 마음을 안정시키고 법을 지키게 하고, 충성하게 해준다. 훌륭한 종교가 있다는 것은 정치를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것을 의미한다. 나쁜 종교는 서비스에 대해 대가를 요구하기도 한다. 재산을 증식시키는 것이다. 고려 말 불교가 이러한 모습이었다. 고려 때 까지 불교 나름대로 중요한 일을 했지만, 할 일을 하지 않고 돈만 챙겼다. 이를 개혁해야 했다. 누가 개혁의 대안을 제시할 것이냐? 세계를 넓게 볼 수 있는 지식인이 필요했다. 불교자체가 이미 타락해서 유교적 가치관에서 답이 나왔어야 했다. 고려 말 유교는 너무 문학화 됐다. 유교는 정치적인 사상이고 불교는 비정치사상이다. 불교는 정치색을 떠나서 자기구원을 하지만, 유교는 현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라고 한다. 유교지식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수기치인이다. 그러나 고려 중기에는 치인이라는 관점을 잃었고, 불교적 지식인들도, 유학도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이에 새로운 지식인이 필요했고 이는 성리학이다. 새로운 혁명으로까지 나아간 사람 중 한 사람이 정도전이다.

 성리학은 보수적, 권위적인 사상이 아니었다. 성리학은 1289년 안양이 들여왔다. 충렬왕이 몽고에 잠깐 갔을 때 원나라 수도에 머물러 있었는데, 돌아다니다 주자의 책을 발견한다. 당시 성리학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는데 중요한 이야기라는 느낌을 받아, 그 책을 사서 고려로 돌아온다. 안양은 학문깊이가 깊지는 않았지만, 학문적 감수성이 민감한 사람이었다. 그는 고려로 돌아와 주자의 학문이 중요하다는 것은 인식했지만, 학문의 오체에 대해 이해하지 못해 일을 하진 않았다.

 그는 제자를 몇 명 뒀는데, 이진과 배기정이라는 사람이 있다. 배기정은 원나라 수도에 있으며 10년 동안 성리학을 공부하고 돌아와서 처음 가르친 사람이 이재연이다. 이재연이 개성에 성균관이라는 학교를 세웠다. 이곳은 13~11년 사이에 홍건적의 난으로 불타버려 다시 짓고 새로운 공부를 시작했는데 당시 교재가 성리학 책이었다. 당시 참여했던 사람들이 이색, 정몽주, 정도전 등 조선의 건국자에 해당되는 사람이다.

 이들은 학문적으로 공통점이 있었지만, 정치적으로 공통점이 있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이런 사람들이 처음으로 정치 세계에 자신의 이름을 알린 것이 1374년에 공민왕이 죽고 난 다음이다. 공민왕은 반원정책을 실시했고, 다음 집권자인 이인임은 친원정책을 바꿨다. 당시 고려의 중요 귀족들이 다 친원파였다. 이를 반대하고 나선 사람들은 젊은 성리학자였다. 그들은 대외정책을 바꾸면 안 된다고 말해 갈등이 이었다.

 공민왕이 죽은 후에도 같은 문제가 있었다. 친원정책으로 돌아가려 하는 사람들은 고려 특권층이었다. 더 혁신적인 사람들은 친명정책을 세웠다. 유배를 간 정도전이 위기를 겪게 되는데, 가장 큰 위기는 옳은 것이 실현되지 않는 세계에 대한 경험이다. 불교와 성리학은 차이가 있는데, 불교의 진리는 스스로 깨닫는 것이다. 유교의 진리는 그렇지 않다. 수기치인의 관점에서 개인 인격의 완성이 세상에 바로 실현되어야 함을 주장한다. 세상이라는 것이 생각하는 것만큼 이상적으로 돌아가지 않기에, 성리학의 세계관은 생각보다 어렵다.

 헤겔(Hegel)의 철학은 현실적인 것이 이상적인 것이고, 이상적인 것이 현실적인 것이라 한다. 관념의 세계에서는 가능한 이야기다. 세대의 근원이 약하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세대의 근원이 설화라면, 설화가 현실과 아무 관련 없다고 말 할 수 없다. 현실적인 것은 비이성적인 것이고, 비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이다. 성리학이 갖고 있는 천도론 등도 이를 가져온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자신의 이상이라, 중심이라고 생각한다. 실현되지 않는 것을 삶의 중심으로 사는 것을 경계에 산다고 하고, 지식인이라 한다.

 늘 어떤 분열된 상태에 살게 된다. 보이지 않는 것에 집중하는 사람들이 현실 세계에 와서 보이지 않는 것에 집중하게 되면 죽음에 직면하게 된다. 이는 보편적 문제이다. 자신의 이상이 실현되지 않고, 실현을 하면 할수록 삶이 고통스러워진다. 이상적인 방법 중, 첫 번째는 혼자 살아가는 것이다. 도저히 견딜 수 없다면, 그것에 대해 대항하고 싶다면 저항을 하는 것이다. 중국에 굴원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역사에 나타났던 지식인적 전형으로, 경계인적 존재로 나타나는 상징적인 존재이다. 사마천도 그러하다. 사마천의 『백이열전』을 보면, ‘백이숙제라는 훌륭한 사람이 왜 죽어갔는가? 현실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왜 백이숙제라는 사람이 죽어가야 하는가?’ 그것이 사마천을 써간 기본정신이었고, 정도전도 마찬가지다.

 정도전이 자신의 고통을 물리적으로 쓴 글이 있는데, 『천문심당』이다. 마음이 묻고 하늘이 답한다. 질문의 요점은 “세상을 살아보니깐 착한사람들은 해를, 악한 사람은 득을 본다”는 것이다. 하늘은 답하기를 “사실은 나도 힘이 없다”. 하늘로써도 어쩔 수 없다. 논리적으로 보면, 하늘이 세계를 결정하지 못한다면, 인간이 세상에 대한 스스로의 원리를 가지고 있는가? 우리는 스스로의 기준과 원리를 갖고 살아가려 한다. 이러한 사람들이 무엇을 지향하며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제기했다. 정도전 이후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받아 분열의 단계에까지 갔었다. 많은 사람들이 뭘 의지하고, 세계를 살아 갈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세상과 단절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이다. 정도전은 10년을 유배 후, 이성계를 찾아갔다. 시를 통해 자신은 최선을 다해서 일을 했지만, 결국 얻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찾아갔다고 하지만 혁명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유배를 통해 정도전은 3가지를 자각했다. 하늘이 가만히 있는다고, 그 원리가 실행되지 않는다. 누군가 나서서 직접적으로, 주체적으로 행동하지 않는 이상 하늘의 원리는 실행되지 않는다. 정도전은 천민출신으로써 국가에 봉사하는 것이 딱 한 가지가 있구나를 느꼈다. ‘백성에 대한 자각’이다. 정도전이 나중에 유배를 갔을 때, 백성들을 자신이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 백성들은 생각보다 따뜻한 사람들이 않았다. 또한 ‘백성들이 우리를 위해 일을 해주고 있는 것이구나’라고 생각했다. ‘소재동기’라고 소재동에 살았을 때의 이야기를 남겼는데, 나중에 백성들에 대해 이해하고, 그동안 스스로의 행동이 부끄러워 글을 적은 것이다. 결국은 정도전은 이러한 생각의 전환으로 이민도 간다. 남들이 만들어 놓은 음식을 먹고, 만들어 놓은 옷을 입는 자는 남의 근심을 알아야 한다. 세금을 걷어가는 국가의 통치자는 자신들을 위해 음식과 옷을 만들어주는 사람들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 지 생각해야 할 것이다. 핵심은 백성을 위한 국가다. 백성을 위하지 않는 국가는 의미가 없다. 이성계는 초기 기록을 보면 왕의 자질까지는 없었다. 정도전을 통해 군인으로써의 법치가로 거듭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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