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칼럼리스트] 교육자의 눈, ‘나쁜 사람’을 넘어
[나도칼럼리스트] 교육자의 눈, ‘나쁜 사람’을 넘어
  • 김현성(교육학 석사과정 4기)
  • 승인 2016.11.15 04: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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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퇴양난이라는 말을 실감하는 요즘이다. 국가가 작동하지 않는 시점에서 어떠한 해결책들도 어두운 길을 밝히기에는 어려워 보인다. 이러한 소란 중에, ‘나쁜 사람’이라는 표현이 유독 눈에 띈다. 국가 인사에 결정적으로 반영되었다는 ‘나쁜 사람’이라는 평가는 교육계에서는 사용되기 어려운 말이기 때문이다. 교육자의 눈으로 학생을 바라볼 때, ‘나쁜 행동’을 한 아이는 있을 수 있어도 ‘나쁜 아이’는 있을 수 없다. ‘나쁜 아이’라는 평가가 내려진 학생이 있다면 이미 교육이라는 시스템은 작동되지 않는다는 뜻일 것이다.

 ‘교육자의 눈’이라고 표현한 관점은 딱히 교육계에서만 국한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칸트는『실천이성비판』에서 철학자의 역할을 화학자의 역할에 비유한 바 있다. 화학자가 물을 분석함으로써 물이 H₂O라는 산소와 수소의 결합임을 밝혀내는 것처럼 철학자들도 경험적 의지라는 현상에서 순수한 이성의 규정 근거들을 밝혀내는 것이 인간의 도덕성을 규명하는 첫걸음이라고 본 것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시작된 윤리학은 ‘선한 인간’에 대한 고민으로 시작했지만, 그 고민은 흄과 루소에 이르러 ‘선한 행동’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관심으로 넘어갔다. ‘인간’이라는 거대한 관심에서 ‘행동’이라는 세분화된 관심으로 이동한 것이다. 루소를 공부한 칸트는 사상사에서 발견되는 관점의 이동을 완성함으로써 ‘근대정신의 입법자’로 자리매김 할 수 있었다.

 이러한 역사적인 흐름 속에 서있는 우리는 갑자기 ‘나쁜 사람’이라는 전근대적인 단어를 뉴스에서 마주하게 되었다. 물론 ‘나쁜 사람’이라는 표현을 곧잘 사용하던 사람들은 지금 진퇴양난에 놓여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이제는 뉴스를 보고 있는 우리가 그 사람들을 ‘나쁜 사람’이라는 시각만으로 바라보고 있지는 않는지 반문 해봐야할 시점이 된 듯싶다.

 그들에게 면죄부를 주자는 말은 아니다. 단지 이 거대한 사건을 해결하는 첫걸음은 인간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그 행위에 초점을 맞출 때 시작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들을 ‘나쁜 사람’으로 규정해놓고 화를 내는 일은, 그 사람들이 저질러 왔던 방식 그대로 전근대적이라 평가할만하다. 지금은 그들이 무슨 잘못을, 왜 했는지 냉철하게 구분해 낼 수 있는 시각을 가진 다수의 감시자가 필요하다.

 역사는 직선으로 흐르지 않는다. 아이도 직선으로 자라지 않는다. 그러나 아이가 아무리 지그재그로 걸어도 교육자의 또 다른 눈은 항상 아이의 성장 가능성을 바라보고 있는 법이다. 분명 대한민국은 이번 사건으로 인해 후퇴했지만, 이 사건을 통해 얻어낸 결론이 ‘탈조선’으로 귀결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교육자의 눈으로 알뜰히 빈자리를 메꾸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학생들이 거리로 뛰쳐나가도 교사는 교실을 지켜야만 한다. 학생들이 돌아왔을 때를 대비해야 되기 때문이다.

 스피노자는『에티카』에서 사과나무를 심자는 말 대신 이런 말을 남겼다. “모든 고귀한 것은 힘들뿐만 아니라 드물다” 너무나도 힘들겠지만, 각자는 각자의 방식대로 시대에 도전해야만 한다. 그것은 물론 교육자의 눈만을 필요로 하는 일은 아닐 것이다. 각자의 눈으로, 각자의 역할대로 우리는 새로운 가치를 맺을 사과나무를 심었으면 한다. 지금도 어디선가 어두운 길을 걷는 이들의 끝에 고귀한 가치가 있으리라는 것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것이 교육자의 눈이며, 나의 신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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