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눈] 대구 국제 오페라 페스티발을 통해 바라 본
[세상의 눈] 대구 국제 오페라 페스티발을 통해 바라 본
  • 이현 교수(성악과)
  • 승인 2016.09.26 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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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국제 오페라페스티벌 포스터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지만 나에게는 오페라의 계절이다. 10월6일부터 11월5일까지 지방 유일의 오페라 극장인 대구 오페라 하우스(재단)에서 “고난을 넘어 환희”로 라는 주제로 제 14회 대구 국제 오페라 축제가 막을 올린다. 새로 출범한 광주시 오페라단과 공동 제작한 푸치니의 라보엠을 개막작으로 독일 본 오페라단이 베토벤의 유일한 오페라인 피델리오를, 오페라의 개혁자 글룩의 대표작인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를 오스트리아 린츠극장이 제작하여 대구를 방문한다. 그리고 우리나라 국립 오페라단은 푸치니의 대표작인 토스카로, 페막 작품인 비제 작곡의 카르멘은 대구 오페라 하우스와 성남 문화 제단이 공동 제작했다. 이 외에도 조수미 콘서트, 살롱 오페라, 수성못 수상무대를 이용한 미리 보는 오페라도 볼거리다.

 오페라는 원래 작품을 뜻하는 그리스어 OPUS에서 나왔다. 우리나라 임진왜란이 끝나갈 무렵인 1598년, 이탈리아 피렌체의 죠반니 바르디 백작이 후원한 CAMERATA(카메라타:작은 방)라는 그리스 서사시에 사용된 음악을 연구하던 모임에서 시작된다. 시를 낭독할 때 음악이 어떤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가정 하에 연구를 거듭한 결과물이다. 지중해 무역으로 부를 형성한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은 신을 인간의 삶과 동일시하던 그리스의 인본주의 문화에 관심을 갖게 되고 그것의 부활을 꿈꾸는 문예운동인 르네상스의 중심에 서게 된다. 그중에서도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은 오늘날 메세나 운동의 전형을 예기할 때 예외 없이 등장한다. 이 가문의 축제는 이러한 새로운 문화 사조의 시험장이 되었고 넉넉한 후원자였다. 메디치가의 결혼식에 페스티발 형식으로 처음 소개된 오페라 작품은 그리스 신화를 주제로 한 Dafe(월계수 나무가 된 여자)였고 오늘 날 문헌상으로 남아있는 최초의 오페라가 된다. 이후 오페라는 전 유럽으로 퍼져나가게 된다.

 우리나라는 세브란스병원 내과 의사였던 이인선이 이탈리아로 유학을 가서 당시 세계 최고의 테너 페루초 탈리아비니에게 사사를 받고 귀국하여 국제 오페라사를 설립한다. 그는 1948년 1월 우리나라 최초로 베르디 오페라 La Traviata(라 트라비아타: 방황하는 여인)을 명동 한복판인 시공관, 지금의 서울시 의회건물에서 올린다. 시공관은 일제 치하에서 일본인들을 위해 지어진 영화 상설극장이었다. 일본인들의 나막신 소리가 요란하던 이곳에 한국의 성악가들이 한국의 오케스트라와 함께 우리말로 공연된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는 진정한 문화 광복이었다. 한 때 라 트라비아타의 한자 표현이 일본식 표현인 椿姬(츠바키 히메)를 쓴 것 때문에 설왕설래가 있긴 하지만 이 오페라의 원작인 뒤마의 희곡이 La dame aux Camelias (동백꽃 아가씨) 이니 충분히 이해가 간다. 참고로 라 트라비아타의 중국식 표현은 茶花女란다. 그런데 또 하나, 오페라 단이 아니 오페라사라고 쓴 것은 당시 대중 유랑극단과 차별화하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하니 우리 근대사의 또 하나의 모습이다. 여기서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당시 비올레타역에 우리나라 오페라계의 대모인 김자경 선생과 더블 캐스팅된 마금희 선생이 연습 때 마다 좋은 목소리를 내겠다고 계란을 판 채로 가지고와서 연신 먹었는데 결국 배탈이 나서 무대에 서지 못했다는 웃지 못 할 이야기도 있다. 그리고 2년 뒤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 오페라인 현제명 선생의 춘향전이 1950년 5월에 당시 국립극장에서 초연된다. 이 오페라는 서울대학에서 주최한 것인데 이후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1951년 피난지 대구에서 지방 최초로 춘향전이 재 공연된다. 그곳이 바로 키메라 극장인데 지금의 한일극장 자리라고 한다. 아무튼 이 오페라는 우리나라 창작 오페라 중 가장 대중성 있고 가장 많이 공연된 작품이다. 나 역시 이 오페라의 이도령 역을 수없이 했는데 공연을 위해 오페라에 등장하는 모든 장소를 낱낱이 살피기 위해 홀로 남원 전역을 여행했던 추억이 있다.

 우리 지역 오페라의 역사는 이와 더불어 최초라는 수식어가 많다. 우리보다 앞서 음악대학이 설립된 계명대학교는 1967년 지방대학 최초로 오페라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를 올렸고 대구가톨릭대(효성여대)는 1968년에 오페라를 올린다. 우리 영남대학교는 1974년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를 올린 뒤 5년 주기로 오페라 공연을 하고 있으니 내년 개교70주년을 맞아 공연될 작품 준비에 벌써부터 부산하다. 1982년에는 지방 최초로 대구시립 오페라단이 창단되고 역시 창단 공연으로 라 트라비아타가 공연되었다. 1984년에는 우리 학교 김금환 교수께서 영남 오페라단을 만들어 대구사립 오페라단의 초석이 되었는데 지금은 김귀자 선생님이 그 맥을 든든히 이어가고 있다. 2003년에는 북구 칠성동에 제일모직이 지역문화예술발전을 위해 기증한 오페라 전용극장이 지방 최초로 세워진다. 1500석의 전형적인 말발굽 형 오페라하우스로 단순히 대구를 넘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오페라 하우스가 되었고 완공이후 우리나라 유일의 국제 오페라 페스티발을 통해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 지역의 훌륭한 인재들을 양성하고 있는 음악대학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우리 지역의 주요 4개 대학은 우리나라의 문화의 핵심 art factory인 셈이다. 그런 대구 오페라 하우스도 몇 년 전 까지만 해도 한 지붕 세 가족이었다. 대구 시립오페라단 ,오페라 하우스, 국제오페라 페스티발 조직위가 한 지붕에서 동거했고 지금의 공식 명칭은  재단법인 대구 오페라 하우스로 통합 되었다. 그러나 오페라 하우스 임에도 아직 전속 오케스트라나 합창단이 없고 전용 의상실이나 무대 제작 보관소조차 없다. 그나마 DOFO라고 하는 사단법인 대구 오페라 페스티벌 오케스트라가 있어 페스티벌 기간 동안 큰 힘이 되고 있다.

 이제 곧 오페라 축제가 시작되면서 앞서 열거한 축제 참가작들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70여년의 역사를 가진 한국의 오페라 현실은 여전히 외국의 유명 작품을 공연하거나 유명 단체를 초청 하는 데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수많은 창작 작품이 지원 사업이라는 명목으로 만들어지고 공연되고 있지만 거의가 실적 쌓기 위주의 단발성 공연이 적지 않다. 그나마도 올해에는 페스티발에 초청된 창작 작품이 전무하다. 이미 두 차례의 페스티벌에 참가하여 대구 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작품성을 인정받은 작품인 동무생각의 작곡가 박태준 선생의 일대기를 그린 청라언덕조차도 외면당했다. 참으로 아쉽다.

 피렌체에서 그리스의 서사시를 아름답게 표현하기 위해 시작된 오페라가 프랑스로 가서는 발레가 첨가된 그랜드 오페라로 발전되었다. 독일에서는 오늘날 뮤지컬 형식처럼 대사가 들어간 징쉬필이라는 독창적인 오페라 형식을 확립하였고 바그너는 오케스트라 피트를 땅 아래로 내려 목소리와 시각을 확보함으로 극과 음악이 하나가 되는 종합 예술로 발전 시켰다. 셰익스피어를 사랑한 영국은 그 인문학적 바탕위에 대중들과 함께 극을 완성시켜 나갔고 러시아는 민족적 모티브를 중요시 하여 대규모 합창과 베이스 위주의 웅장함 그리고 화려한 무대 장치로 그 무게를 더했다. 그 각각의 나라들은 그들의 독창적인 문화와 접목하여 완전히 새로우면서도 전 세계가 공감하는 글로벌 문화 콘텐츠로 발전시켰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오페라의 현 주소는 어떤가? 70년의 역사로는 아직 오페라라는 장르는 우리사회의 공감대를 형성하기 부족한 것일까? 아니면 우리 문화와 전통에 막혀 더 이상 대중화 하지 못하는 클래식 자체의 어떤 문화적 정체성일까? 그 물음에 대한 답은 끝이 없는 핑계로 이어질 것이다. 이제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우리 지역 대학이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최초의 수식어를 수없이 달고 온 우리 지역이 아닌가? 지금 우리는 컴퓨터 시대를 지나 융합의 시대에 살고 있다.

 영국의 시인이요 사상가요 장식 예술 공예의 대중화를 연 산업 디자이너였던 윌리암 모리스는 기계화된 산업혁명에 반대하여 순수 手 작업을  주창하였지만 그의 영향으로 아르누보라는 새로운 문화 사조가 탄생하지 않았던가. 올곧게 순수 예술을 추구하며 걸어온 우리 대학이기에 새로운 시각으로 서로의 전공을 받아들일 때 우리 대한민국의 오페라 역사뿐만 아니라 세계 오페라사에  획을 긋는 그 어떤 것을 새롭게 만들어 내지 못하리라 그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작고하신 목련화의 김동진 선생님이 돌아가시기 몇 해 전 판소리를 접목하신 창악으로 오페라를 쓰신 적이 있다. 그러나 그 판소리의 벽을 성악가들이 넘지 못해 실패한 적이 있다. 우리의 전통 성악인 판소리를 서양음악에 익숙해진 성악가들이 부를 수 없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판소리와 성악가들이 융합한다면? 우리 학교에는 걸출한 한국음악 연주자들과 교수들 그리고 오페라와 작곡의 전문가들이 있다. 이제 한국음악이 민속음악 전통음악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대중화하고 글로벌화 하자는 것이다. 누구도 완성해 보지 못한 일! 그 변화를 우리 대학이 주도해 보자는 것이다. 단순한 호기심이나 취미를 넘어 전 세계인이 보편적 예술로서 공감하고 향유하고 누릴 수 있는 한국의 클래식 음악을 함께 만들어 보자는 것이다. 나 역시 성악가로서 한국의 판소리에 관심을 가지고 성악적인 테크닉을 유지하면서도 판소리의 빛을 더 발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고 연구하고 협력하고 싶다. 여기서 한국오페라의 세계화, 한국오페라의 정형화에 대한 답을 얻고자 한다.

 예술은 산업이 될 수 있고 그 문화를 만들어 낸 구성원과 그 지역의 격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대구 오페라 축제가 시작된다는 설레임과 함께 내 마음은 400년 전 피렌체의 CAMERATA 주위를 서성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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