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과 시각교차에 대한 우리의 역할
디자인과 시각교차에 대한 우리의 역할
  • 이남영 기자
  • 승인 2016.09.26 2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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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일 상경관210호에서 정병규 북디자이너의 강연이 진행됐다.

  지난 20일 ‘융합인문학’ 수업에서 정병규 연사의 강의가 진행됐다. ‘대한민국 북 디자이너 1세대’라는 명성을 가진 정병규 연사는 이번 강연에서 ‘삶은 디자인이다’라는 주제로 강의를 진행했다. 이에 강연 내용을 통해 그의 생각을 들여다봤다.

디자인과 시각교차에 대한 우리의 역할

 디자인을 통해 얻은 삶의 깨달음=삶은 디자인이다. 평범한 말처럼 보이지만 디자인 작업을 오랫동안 하다 보니 근래 새삼 느끼는 사실이다. 평소에 삶과 디자인에 대해 생각했던 것은 아니지만 언제부턴가 ‘디자인을 그냥 하는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요즘 말하고 있는 명제 중 하나가 ‘삶은 디자인이다’는 문장이다.

 디자인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 인간이 만들어 내는 것은 크게 문명과 문화로 얘기할 수 있다. 이를 포괄적으로 말하는 것이 디자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디자인을 너무 좁게 그리고 도구적으로 생각하곤 한다. 특히 한국 대학에서는 디자인을 삶과 분리하고, 그것을 기업가들과 거래하는 도구로 정의해 가르치고 있다. 물론 강연을 위해서 ‘디자인’이라는 단어 대신 우리말 혹은 한자로 된 멋있는 대용어가 있으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아직까진 그러한 단어는 없는 것 같다. 이를 바꾼다면 오히려 동양 위주의 편협한 생각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보통 디자인을 인공물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디자인은 기본적으로 인공적인 것이며 인공 외에는 디자인을 대체할 말이 없는 것도 현실이다. 이 말은 사람이 살기 위해선 부모로부터 주어진 몸을 제외하고는 거의 인공적인 상황이나, 질서 속에서 살아가고 그 속에서 규정된다는 것을 뜻한다. 즉 인간은 ‘디자인된 세계 속으로 태어났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막상 현실에서 이렇게 디자인된 세계를 바꾸려고 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이때까지 한국은 건축을 공학이라고 말하고 있다. 한국은 공과대학 출신의 건축가를 배출해 내지만 다른 나라에 에서는 건축학과가 공과대학이 아닌 디자인 대학에 소속돼 있기도 하다. 건축이라는 것은 세계를 만들고 건설하는 모델이다. 앞서 디자인은 인공적이라 언급했고, 이번 강의에서 만큼은 이를 디자인이라고 말할 것이다. 우리가 ‘집에 산다’, ‘강당 속에서 강의를 듣고 있다’는 것은 곧 디자인 속에 들어와 있다는 의미가 된다. 매 순간 우리는 디자인에 대한 생각을 넓혀야한다.

 서양의 사상과 디자인의 관계=디자인은 서양 제국주의의 핵심 키워드로 볼 수 있다. 이것의 출발은 일종의 서양 식민지 전략, 제국주의 형 전략의 비판이고 그 속에 일제 식민 사관 역시 존재했다. 우리는 서양식 제국주의 디자인 관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는 현재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핵심이 디자인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디자인과 삶을 정확하게 보는 상호 핵심적인 서양의 조작에 놀아나고 있다. 이는 제국주의적인 동시에 일제 식민지 사관과 표리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사실 디자인은 장식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한국 사회는 디자인을 장식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디자인은 우리가 만드는 모든 것의 핵심이다. 세상이라는 것은 ‘주어진 것’과 ‘만든 것’으로 구성돼있고, 이것들이 갈등을 일으킨다. 한편 20세기 구조주의에 들어와서는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한 디자인이 알고 보니 만들어진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는데, 이 자체가 엄청난 변화라 할 수 있다. 우리는 디자인이 태어날 때부터 존재하는 것인 줄 알고 있었지만, 사실은 만들어진 개념이라는 점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깨달음은 이후 프로이트의 무의식 발견과 다윈의 진화론 주장 등을 발견할 수 있도록 했다.
 
 대부분의 디자인 교과서를 살펴보면, 1851년 영국은 당시 세계 최강의 국가로써 해당 년도부터 신자유주의적인 모델을 실천했다. 영국은 식민지를 관리하는 도구로 디자인을 중요하게 사용했는데, 당시 쓰인 ‘디자인’의 의미로부터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디자인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지금 여기에서 우리는 디자인과 삶을 얘기하고 있다. 누차 말하지만 디자인은 장식이 아니다. 그렇기에 디자인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한번 적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디자인에 대한 생각을 바꿔야 한다. ‘design’은 세상의 기호와 물건들을 바꾸고 새로 만든다는 의미다. 이것은 디자인을 통해 세상과 만나고 있던 것을 변화시킨다는 것을 뜻한다. 인간관계와 인간의 만남 모두 디자인이다. 지금까지 머리에 있는 지식과 정보로 세상을 보다가 이것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는다면 기존의 ‘디자인’을 생각해보라. 특히 근대 디자인 연구에서는 은폐와 탈 은폐의 원조 중 하나가 서양에서 만든 개념이며 이는 제국주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시각교차, 이데올로기에 대해 말하다=디자인이란 단어가 한국에 처음 쓰였을 때, 일부 사람들이 해당 단어에 대한 번역을 ‘장식’이라 했다. 이에 여태껏 인테리어 디자인은 ‘실내 장식’으로 이해됐다. 혹시 기회가 있으면 건축 책을 읽어보라. 건축은 인간의 삶과 다 연결돼있다. 모든 건축 책에서, 가장 중요하지만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집을 지을 때 무너지지 않게 지어라’는 것이다. 한국 건축에서 놓치고 있는 것은 디자인에 대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결론적으로 디자인의 정의는 힘들고 아직까지 이에 대한 적절한 번역이 없다고 생각한다.
 
 위에서 삶은 디자인이고, 디자인은 삶이라는 것에 대해 간단히 설명했다. 하지만 디자인에서 이야기하지 않은 한 가지가 있다. 우리는 디자인을 떠나서 한시라도 살 수 없다는 것이다. 앉아 있는 의자, 공간 등 우리를 구성하는 모든 것이 디자인이다. 디자인은 문화다. 문화는 사람의 생각을 변화시킨다. 디자인은 삶의 환경이며 도구이자 그 자체이다. 사전에서 디자인이란 단어를 찾아보면 ‘설계하다’로 의미가 표기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중국에서도 디자인이 아닌 ‘설계’란 단어를 더 많이 쓰고 있다. 결국 우리가 알고 있는 단순 개념이 아닌 디자인의 범위를 넓히고 깊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에 주목했으면 한다. 디자인은 장식이 아니라는, 대단히 중요한 증거를 보여주려 한다. 바로 ‘시각격차’ 현상이다. 이는 디자인대학이 아닌 의과대학에서 쓰는 용어로, 인간의 무의식을 관리하는 방법이다. 디자인은 ‘장식’인 척 하는 것이지, 장식이 아니다. 게다가 장식이란 단어 아래에서 의미가 은폐·전도돼 사회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를 설명하기도 한다. 이에 대한 예시로 박정희 대통령이 우리나라에서 디자인포장센터를 만들어 당시 남긴 기호에 대해 미술 수출이라는 말을 쓴 사례가 있다. 이때 말한 미술이 디자인이다. 상업 미술, 응용 미술 등 여러 예술을 다양한 언어로 부른다. 그때부터 디자인으로 통일해 불렀다. 이것이 바로 디자인이 본질이 아니며, 삶과 나와 무관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데올로기가 한국현대사에 자리 잡게 된 대표적인 예시다.

 언어적인 차원이 아니라 문화와 삶의 차원을 다루는 것 역시 디자인이다. 디자인 교과서에 나오지 않기 때문에 이 사실을 아는 디자이너는 거의 없다. 디자인은 장식이 아니라 삶이다. 디자인이 개성적이기 위해서는 ‘이렇게 디자인하겠다’고 말해야 할 때도 있지만, 이것은 사실 말이 되지 않는다. 우리가 본다는 것은 눈이 보이는 대로 보는 것이 절대 아니다. 우리가 전혀 모르는 것도 받아들여야 할 수도 있다. 이것은 우리의 뇌를 통해 들어가 마음속에서 움직인다. 물리학적으로 사실이 아닌 것을 알지만 마음속으로는 정보가 들어가 시각심리학적인 것이 반영되기 때문이다. 움직이는 것과 움직이지 않는 것을 기반으로 보지만 이것이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다. 따라서 시각 속에는 모든 것이 융합돼 있다. 그래서 행위에 대해서 좀 더 넓게 생각해야 한다. 이것이 내가 관련한 시각 디자인의 표리이자 핵심이다.

 앞으로 이 강연 이후로는 안과용 눈만 갖고 살지 말자. 눈을 신체에 달려 있는 하나의 기관으로만 생각하지 않고 ‘시각’에 대한 생각 자체를 바꿔야 한다. 이미지나 사진과 같은 콘텐츠를 자신에게 보이는대로 믿어서는 절대 안 된다. ‘시각 무의식’이라는 말이 있다.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우리의 마음에 들어와 우리를 지배하고, 생각을 바꾸고, 신체의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 바로 ‘시각’이다. 이미지에서 문자가 나오면 반드시 의심을 해봐야 한다. 관심 있는 것만 나한테 보이고 필요할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 주변에 위치한 관심 없는 사물들까지도 눈에 들어오게 된다. 이런 것들이 쌓여 ‘나’를 흔드는데, 이를 ‘시각 무의식’이라고 한다. 결국 하고 싶은 말은 처음 얘기한 것이 가장 중요한 것 같다. 디자인은 상식이다.

학생들과의 질의응답
 

 인터넷이 보급되어 디지털 시대가 도래하면 책의 종말이 온다는 말이 있다. 실제로 지하철만 봐도 사람들이 신문보다 현재 스마트폰을 보는 등 모습이 많이 변했는데, 책의 종말에 대한 의견도 듣고 싶다.
 내가 디자인을 하겠다고 선언을 하고 디자인에 들어와서 부딪힌 질문이 바로 그거였다. 책을 만들고 싶어 디자인을 시작했는데 책이 끝난다니, ‘앞으로 무얼 해야 하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인간이 언어와 문자를 가지고 있는 한 책은 없어지지 않는다고 확신한다. 인간이 만든 세 가지중에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것이 첫째는 숟가락이다. 숟가락은 아무리 기술이 발전해도 대체할 것이 없다. 두 번째는 바퀴, 그리고 세 번째가 책이다. 책, 숟가락, 바퀴 이것은 절대 없어지지 않는다. 그러니 속지 마라.

기자와 연사의 만남

 디자인이라는 단어를 가장 자기 나라 식으로 표현하려고 노력한 나라가 프랑스다. 디자인을 표현하려고 옛날에는 데생 그래피라는 말을 쓰며 많은 노력을 했지만, 결국은 ‘디자인’이라고 불렀다. 프랑스인들이 지독한 사람들인데 디자인만큼은 그냥 디자인이라고 부른다.

 예를 들면 먼저 디자인은 de하고 sign으로 되어있다. 라틴어로 de라는 말은 sign을 de한다는 뜻이다. 20세기는 d와e라는 단어 해석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처음에 쓰는 de는 ‘a를 b로 바꾼다’는 의미가 있다. 바꾼다는 것은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또한 흩뜨려서 다시 만들고 해체한다는 뜻이다. 이 두 가지가 20세기를 가로지르는 키워드였다.

 이때 중요한 것은 de다음에 오는 sign 기호다. 인간은 살면서 사용하는 모든 것을 기호로 본다. 인간의 눈에는 사물, 제품 모두가 기호다. 과거 많은 국가들이 식민지 국가 지배를 위해 디자인 기구를 만들었다. 자기 나라의 국민들 삶을 위해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식민지를 지배하기 위함이었다. 서양 제국 혹은 제국주의가 식민 정책을 편 채 무기와 대포 등을 가지고 갔다는 얘기를 들었다. 밝지만은 않은 예지만 이 시간을 통해 디자인이 여러 분야에 영향을 미쳤다고 얘기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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