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봉] 확신과 배려사이
[영봉] 확신과 배려사이
  • 장보민 편집국장
  • 승인 2016.09.26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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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통해야 산다’, ‘소통을 하면 문제가 해결 된다’ 등. 많은 사람들이 ‘소통’을 말한다. 우리는 소통의 중요성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현 사회를 살아가며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 여러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사회에 있어 어쩌면 ‘소통’은 우리의 한 의무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렇게 소통을 강조하면서도 자신만의 방법으로, 자신이 편한 방식을 고집하며 ‘소통’이라는 단어 뒤에 숨어 그 의미를 무기력하게 만들기도 한다. 여기에서 우리가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은 ‘확신’이다. 소통은 말 그대로 뜻이 서로 통해 오해가 없음을 의미하는데, 이 과정에서 우리의 ‘확신’은 끊임없는 오해를 낳고 만다.

 ‘다 너를 위해서야’라는 말 다들 한 번 쯤은 들어봤을 것 같다. 올해 초 개봉된 한 영화에서도 딸을 끔찍이도 사랑하는 아버지는 ‘너를 위해서’라는 말로 ‘딸을 위한 보호’를 한다. 하지만 성인이 되어가고 있는 딸에게 아버지의 보호는 간섭으로 다가오고, 결국 이런 갈등으로 차를 타고 집에 가던 길에 아버지는 딸에게 내리라고 소리를 친다. 그렇게 딸은 아버지의 차에 내려 지하철을 탔고 화재사고로 실종된다. 그러다가 소리를 통해 위치를 찾아내는 로봇과 함께 딸을 찾아 나선다. 로봇은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성찰하고, 부당한 명령에는 복종하지 않는다. 그런데 “딸을 보호하고 싶었다”는 아버지의 말에, 로봇은 “보호는 고마운 것입니까?”라고 되묻는다. 그리고 영화의 끝에서야 아버지는 딸의 죽음을 확인하고 깨닫는다. 자신이 딸을 위해서 라고 말하던 보호는 딸에게 있어서 구속이었고, 우리는 여태 ‘소통’하지 못했음을.

 영화 속 아버지는 자신의 모든 언행이 딸을 위해서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이런 확신에 갇혀 일방적인 소통 속에 이를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는 딸을 보지 못했다. 이는 대학사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더 나은 대학사회를 위해 ‘소통’은 중요하고 필요로 하지만, 우리는 자신들만의 소통방식을 고집하기도 한다. 또 때로는 서로 배려없는 ‘소통’에 소통한다는 느낌을 받지 못해 소통이 필요하다 외친다. 얼마 전 열린 교수정기총회에 참가한 교수들은 총장에 ‘소통’할 것을 요구했다. 총장은 학기 초 ‘소통’과 관련해 강의를 하기도 하며 소통을 위한 많은 시도를 하고 있음을 말해왔지만, 그 시도와 의도가 모두에게 닿지는 않은 듯 하다. 그리고 얼마전 폐쇄된 융합섬유공학과의 전산실 또한 가장 논란이 되었던 것은 ‘소통’이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소통’없는 일방적인 폐쇄에 뿔이 났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봐야 할 것은 일부 구성원은 ‘소통’하고 있다고 외치고 있지만, 반면 나머지 구성원은 우리는 ‘소통’이 없었다며 해야 한다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그 일부 구성원들은 ‘소통’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고 나름 애써왔기에, 스스로는 다른 구성원들과 ‘소통’하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다만 그 ‘확신’에 갇혀 그 이상을 보지 못한 것 뿐이다.

 소통은 우리에게 있어서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다. 소통을 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기에, 이는 곧 상생이기도 하다. 혼자 걸어가는 길이 되어서는 안 된다. 같은 사회에서 궁극적으로는 같은 목표를 바라보고 가는 만큼 모두가 함께 걷는 큰 한 길이 되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소통과 화합이 필수임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sns의 홍수 속에 살면서도 우리는 소통의 부재를 호소하고 있다. 어쩌면 우린 단순한 ‘소통’이 아니라, 확신 가득한 일방적인 소통에 지쳐 배려 가득한 함께하는 소통을 바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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