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주 교수의 따뜻한 시 읽기]
[김문주 교수의 따뜻한 시 읽기]
  • 김문주 교수(국어국문학과)
  • 승인 2016.09.19 10: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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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내게 말했어야 했다
내가 그 책들을 읽으려 할 때
그 산을 오르기 위해 먼 길을 떠날 때
그 사람들과 어울릴 때
곁에서 당신들은 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 삶은 결국 내가 그 책을 읽은 후 어두워졌고
그 산을 오르내리며 용렬해졌으며
그 사람들을 만나며 비루해졌다
그때 덜 자란 나는 누구에겐가 기대야 했고
그런 내게 당신들은 도리 없는 범례였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내게 그 말을 해야 했다면,
누구한테선가 내가 그 말을 들어야 했다면
그 누구는 필경 당신들 중 하나였다 그러나 당신들은 늘
말을 아꼈고 지혜를 아꼈고 사랑과 겸허의 눈빛조차 아꼈고
당신들의 행동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들한테도
사과(謝過)와 사죄(謝罪)의 말 없이 침묵하였다
당신들에게 듣지 못한 말 때문에 내 몸속에서는 불이 자랐다
이제 말하라, 수많은 그때 당신들이 내게 해야 했던,
그때 하지 않음으로써 그 순간들을 흑백의 풍경으로 얼어붙게 한
그 하찮은 일상의 말들을 더 늦기 전에 내게 하라
아직도 내 잠자리를 평온하게 할 것은,
내가 간절히 듣고 싶었으나 당신들이 한사코 하지 않은 그 말뿐

「말빚」 전문  이희중

 위의 시가 표면적으로 문제 삼고 있는 것은 내 삶에 영향을 준 ‘과거의 당신들’이다. 시는 “그때”와 “그 책” “그 산” “그 사람들”에 대한 나의 행위에 어떠한 개입도 하지 않은 “당신들”의 “침묵”을 겨냥하고 있다. ‘당신들의 침묵’으로 인해 나는 “어두워졌고” “용렬해졌으며” “비루해졌다”. 개입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삶에 부정적인 영향을 준 “당신들”의 인색함과 무책임을 시인은 하나하나 열거한다. 이 열거의 수사야말로 ‘침묵과 무심의 연대’ 속에 자란 한 존재의 내면을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시의 화자가 ‘당신들의 행태’에 관해 말하는 동안, 시의 언술은 “당신들에게 듣지 못한 말 때문에” “몸속에서는 불이 자랐”던, 그러나 그 고통을 그대로 표출하지 못하도록 “범례”화된, 그래서 자신 속의 “불”을 정연하게 배치해가는 한 존재의 내면을 생각하게 한다.

 이 시는 한 존재의 삶이 구조와 체계 속에서 구성되는 것임을 시의 언술을 통해 보여준다. 삶이란 주체의 의지보다 관계에 의해 만들어지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관계의 구조를 집으로 삼아 살아간다. 시의 화자가 “그 하찮은 일상의 말들을 더 늦기 전에 내게 하라”고 간곡하게 명령하는 것은, 듣지 못했던 그 과거의 말들이 화자의 현재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당신들”의 침묵과 인색 속에서 ‘어두워지고’ ‘용렬해지고’ ‘비루해진’ 영혼이, 설령 ‘침묵과 인색의 전통’을 스스로 청산하고자 각별한 주의를 기울인다 하더라도, 과연 “덜 자란” 누군가를 위해 적극적으로 발언하고 행동하며 “사랑과 겸허의 눈빛”을 보낼 수 있겠는가? 청산하지 않은 것은 결코 청산되지 않는다. 이 시의 청산되지 않은 ‘말 빚’은, 그리하여 “당신들”의 것이면서 동시에 ‘나’의 채무가 되는 것이다.

 점점 많아지는 말들이 웅변하는 「말빚」의 화자의 분노 앞에서 나 역시 “당신들”의 “사과(謝過)와 사죄(謝罪)의 말”을 듣고 싶다. 나 또한 “당신들에게 듣지 못한 말 때문에” 때때로 잠들지 못하고 “몸 속에서 불이” 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니 더 무겁고 심각하게, 이 시의 언술이 귀결되는 ‘말 빚’ 앞에서 타인의 얼굴에 응답하지 않은 ‘나’의 “그때”를 생각한다. 내가 하지 않은 말들로 평온하지 못했을 ‘당신’의 “잠자리”를, 그래서 이 시는 불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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