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빈 시간
[시론] 빈 시간
  • 정재완 교수(시각디자인학과)
  • 승인 2016.09.19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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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오리오니의 그림책 <프레드릭>은 수다쟁이 들쥐 가족의 이야기이다. 들쥐들은 겨울을 대비해 열매와 밀과 짚을 모으며 열심히 일을 한다. 단 프레드릭만 빼고. ‘프레드릭, 넌 왜 일을 안 하니?’ 들쥐들의 물음에 프레드릭은 대답한다. ‘나도 일하고 있어. 햇살을 모으는 중이야’ ‘색깔을 모으고 있어’ ‘난 지금 이야기를 모으고 있어’ 일하기 싫어 노는 것처럼 보이던 프레드릭의 진가는 추위와 어둠의 땅속 생활을 오래 하는 한 겨울, 식량이 거의 떨어질 즈음 비로소 발휘된다. 모두가 기나긴 겨울의 무료함에 지쳐갈 때, 프레드릭은 다른 들쥐들에게 그동안 모아둔 햇살을 느끼도록 해주고, 색깔을 볼 수 있도록 해줬다. 프레드릭이 이야기를 들려주자 들쥐들은 박수치며 감탄을 한다. ‘프레드릭, 넌 시인이야!’

 해마다 ‘멍 때리기 대회’가 열린다. 휴대전화를 확인하거나, 시간을 보는 것, 웃거나 몸을 과하게 움직이면 탈락되는 이색 경기이다. 진행 요원들이 지속적으로 심박수를 체크한다고 하니, 마음이 복잡해도 탈락되고 마는 것이다. 정신과 전문의와 학자들은 쉬는 시간에도 스마트폰으로 혹사당하는 뇌의 스트레스를 덜어주는 방법으로, 인간의 사회적 학습의 한 방법으로 멍 때리기의 효과를 강조하기도 한다. 이쯤 되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상태를 불안하게 여길 필요는 없어 보인다. 오히려 정신 건강을 위해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연습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마음의 상태뿐만 아니라, 공간과 사물에서도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좋은 경우가 있다. ‘Less is more 적을 수록 더 좋다’, 이 말은 건축가 루드비히 미스 반 데 로에(Ludwig Mies van der Rohe)로 부터 비롯된 것이다. 디자인은 더하는 것이 아닌 빼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토를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애플apple, 이케아IKEA, 무지MUJI 등의 제품을 일상에서 접하며 단순한 디자인이 어떤 힘을 갖는 지를 우리는 직접 체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자의 <도덕경>에 ‘수레의 쓸모는 빈 구멍에서, 그릇의 쓸모는 빈 공간에서, 방의 쓸모는 비어있음으로 생겨난다. 있음의 유용함은 없음에 달려있다.’고 쓰여 있다. 음표와 음표 사이의 빈 공간(시간)이 음악을 만들고, 글자와 글자 사이의 빈 공간이 의미와 기능을 만든다는 타이포그래피의 원리 또한 그렇다.
막스 피카르트는 <침묵의 세계>에 ‘말은 침묵으로부터 그리고 침묵의 충만함으로부터 나온다’고 썼다. 침묵은 그저 말없음이 아니라, 말을 잉태하는 시간이다. 불교에서는 24절기 중 하나인 동지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한다. 겨울-봄-여름-가을의 순환이라는 생각에는 겨울이 봄을 잉태한다고 보는 관점이다. 봄꽃의 화려함은 한 겨울 추위에 땅 속에서 뿌리가 준비한 시간일 것이다. 아기가 엄마의 뱃속에서 열 달 동안 세상에 나와 살아가야 할 건강한 몸을 만드는 것도 이런 준비의 시간이다. 빈 시간 동안 우리는 상상을 한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 하얀 종이를 펼쳐 놓으면, 잠시 주춤하게 된다. 얼마 동안 붓을 들고 아무 선도 긋지 못하고 만다. 그런데 이 시간은 그저 버리고 마는 아까운 시간이 결코 아니다. 이 시간을 피하거나 두려워하면 그림을 그릴 수가 없다. 이런 빈 시간은 눈과 머리와 마음과 손이 현실에서 어떤 세계로 진입하기 위해 필요한 장치이다. 비어있음의 미학을 따로 강조하지 않아도 비어있음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잉태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충분히 알고 있다.

 대학생의 삶에서 빈 시간이란 어떤 의미일까. 심심해야 놀이를 궁리하고, 놀이를 궁리하는 것이 새로운 실험을 이끈다. 창조, 창의라는 거창한 수사를 붙이지 않더라도 실험한다는 것은 정말 멋진 일이다. 대학생에게, 취업준비생에게 이런 ‘빈 시간’ 타령은 어쩌면 사치스러움일지 모른다. 이런 말은 적어도 그림을 그릴 종이나, 글자를 입력할 빈 화면이라도 있는 사람에게 그 의미가 있을 것이니까. 그래서인지, 학생들과 진로 취업 상담을 하다 보면, 당사자의 절박함은 무겁고 엄숙하게 다가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잉태'의 시간이다. 당장의 화려한 성과에 연연하지 않고, 나만의 빈 시간을 갖는 것은 중요하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게으름은 아니다. 나는 좀 더 심심해져야겠다. 그리고 다가오는 가을, 철학자의 길, 사색의 길을 걸어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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