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 탄생 100주년, 난세의 천재 화가를 그리다
이중섭 탄생 100주년, 난세의 천재 화가를 그리다
  • 이남영 기자, 조규민 기자, 하지은 기자
  • 승인 2016.08.29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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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완의 거장, 이중섭을 그리다

 민족의 상징과 내면을 강렬하게 표현한 화가 이중섭은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서양화가다. 힘든 시대를 거친 그의 삶은 결코 녹록치 않았지만, 우리에게 깊은 역사의식과 높은 예술적 성취를 전해주고 있다.

 시대의 특수성을 그림으로 승화하다=평안남도 평원에서 태어난 이중섭은 부농의 자손으로 윤택한 생활을 했지만, 예술가로서 표현의 자유를 찾길 원했다. 소련군과 공산당의 지배하의 북한은 자유로운 창작 활동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이에  이중섭은 자유로운 예술 활동을 위해 가족들과 월남했다. 그러나 더 나은 환경을 꿈꾸며 내려온 남한에서의 삶은 매우 빈곤했다. 그는 궁핍한 생활을 해결하기 위해 부두노동자, 날품팔이 등의 잡일을 하며 그림을 그렸다. 여러 시대적 상황이 합쳐진 상황에서 나온 이중섭의 작품에서 그가 지녔던 역사 의식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이중섭의 역사 의식을 대표하는 작품 소재는 ‘소’이다. 이중섭에 의해 민족의 상징으로 발화된 소는 단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동물을 그린 것이 아니라 이중섭 자신과 민족이 처한 상황들을 격정적으로 표현한 그림이다. 특히 그가 그린 소 중 ‘칡소’는 한우 품종 중 하나로 적갈색 바탕 털에 세로로 그어진 호반무늬 털을 가졌다. 일제강점기 동안 우리나라 소를 황갈색으로 통일시키는 ‘조선우 심사표준’을 실행하였고, 이에 황소를 제외한 150만 마리의 한우는 강제로 살육되거나 일본으로 반출되고 말았다. 이 시기에 이중섭은 칡소를 그려냄으로써 한없이 암울한 우리나라를 표현했다. 박영택 미술평론가는 “일제 강점기에 이중섭에게 소는 한국인의 상징이자 순박한 한국인의 고귀한 존엄성을 가진 자아의 분신이었다”고 전했다.

 물론 이중섭이 매 작품마다 역사를 인식하며 그림을 그렸다곤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미술평론가들은 ‘싸우는 소’, ‘투계’ 등을 통해 그의 역사 의식을 확인할 수 있다고 말한다. 김영동 교수(회화과)는 “이중섭은 역사 의식이 투철한 사람이었다고 표현할 순 없지만, 작품을 통해 역사에 대한 그 만의 인식을 보였다”고 말했다.

 아고리와 아스파라거스의 사랑=“내가 좋아하는 당신의 귀여운 발과 발가락은 먼지 한 톨 가까이 오지 못하게 소중하게 간수해야 하오.” 이중섭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가족’, 그중에서도 ‘아내’였다. 특히 이중섭 부부에게는 서로를 부르는 애칭이 있었다. 일본 유학 시절, 학생들은 턱이 긴 이중섭에게 턱을 뜻하는 일본어 ‘아고’와 성 ‘리’를 붙였고, 부인인 마사코 역시 그를 ‘아고리’라고 불렀다. 이중섭은 그의 부인인 야마모토 마사코(이남덕)의 발가락이 아스파라거스를 닮아 아스파라거스라는 애칭으로 불러 애정을 표현했다.

 “아빠가 오늘 엄마랑 태성, 태현이가 소달구지에 타고, 아빠는 앞에서 소를 끌고, 따뜻한 남쪽나라를 향해 떠나는 그림을 그렸단다.” 마사코는 이중섭을 만나기 위해 일본을 떠나 우리나라로 겨우 도착해 북한 원산에서 이중섭과 혼례를 올렸다. 신혼 생활을 하던 중, 한국전쟁이 터져 이중섭과 그의 가족은 월남하여 전국을 떠도는 생활을 하게 된다.

 월남한 후, 그의 인생에서 가장 힘들면서도 행복한 시절을 보낸 장소는 제주도였다. 육지에 비해 전쟁이 없던 제주도에서의 삶은 비록 좁은 방 한 칸에서 부인, 두 아들과 가난하게 산 짧은 시절이었지만, 이중섭이 당시에 행복했던 것을 증명하듯 많은 작품을 남길 수 있었다. 아침이면 부부가 다정하게 손을 잡고 바닷가에 나가 두 아이들과 함께 게를 잡고 놀다 들어와 게를 삶아 먹는 것이 일상이었다. 이를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 ‘군동 시리즈’다. 현실을 매우 유쾌하고 밝은 모습으로 그렸으며, 특히 이중섭 아들들의 영향이 크게 미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에 김유정 미술평론가는 “제주도에서 부인과 두 아들이 같이 산 때가 이중섭에게 가장 소중한 시기였다. 그에게 두 아들을 포함한 부인은 삶 자체였다”고 말했다.

 “나의 소중하고 귀여운 사람이여, 건강 조심하고 3일에 한 통씩 꼭 편지를 써 보내 주기 바라오.” 하지만 이들의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마사코의 아버지가 사망해 그녀와 아들들이 일본으로 가게 됨으로써 이중섭은 가족과 헤어지게 된다. 가족과 헤어지고 난 후, 이중섭은 부인에 대한 사랑 역시 예술로 표현했다. 그가 마사코에게 손수 써서 보낸 편지는 그의 사랑을 가장 잘 보여주는 유품이다. 그는 몇 백통이 넘는 편지에 가족들의 그림을 담았다. 그 중 새 두 마리가 상하로 마주 보며 대칭을 이룬 채 날고 있는 ‘부부’라는 작품은 남한과 북한이란 역사적인 관점에서도 볼 수 있지만 사랑의 관점에서 부부애를 진하게 느낄 수 있다. 이렇듯 이중섭에게 가족이란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용기이자 희망이며 악착같이 그림을 그리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이후 이중섭은 가족을 만나기 위해 계속해서 전시회를 열었다. 전시회를 통해 돈을 벌어 가족을 만나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으로 인해 전시회에서 좋은 실적을 거두지 못했고 심지어 돈을 떼이기도 했다. 게다가 한일 국교 단절로 가족과 생이별을 하게 된 상황에서 그는 일본으로 가는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 후, 그는 거식증을 동반한 정신적 질환으로 괴로워하다 40세의 나이로 짧은 생을 마감했다. 일본에서 이 소식을 접한 마사코는 이중섭의 친한 친구인 구상 시인을 통해 받은 그의 분골을 끌어안으며 한없이 흐느꼈다. 이후 그녀는 평생 재혼하지 않고 두 아들을 키우며 살아왔다. 마사코가 이중섭을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은 한 언론매체가 그녀를 취재한 내용을 통해 느낄 수 있다. “사람들이 종종 물어요. 당신과의 결혼, 후회하지 않느냐고. 하지만 아고리, 나는 우리의 사랑을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어요.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당신과 함께할 거예요. 우리는 운명이니까.”

푸른눈의 성자, 맥 타카트

 우리 대학교 문과대 건물 앞에는 한 노인의 흉상이 있다. 흉상의 주인은 우리 대학교 영문학과 교수였던 맥 타카트 교수이다. 그는  무명이었던 이중섭을 유명해지도록 만들고 이중섭이 가진 그림을 팔아 장학금을 만드는 데 일조하기도 했다. 이중섭과 맥 타카트 교수의 관계를 그의 제자인 신승훈 교수(영어영문학과)를 통해 알아봤다.

 맥 교수는 그의 월급과 연금을 모아 제자들에게 ‘우정장학금’을 지원했습니다. 특히 이중섭의 그림을 팔아 장학금을 마련하기도 했는데 이에 대해 알고 있나요?
 맥 교수님은 무명 시절의 이중섭과 친분이 있었어요. 이중섭은 담배 속에 들어있던 은종이에 그림을 그린 후, 그림을 버렸다고 해요. 하지만 교수님은 이중섭이 버리려고 하는 그림을 받아 뉴욕 현대 미술관 MoMA로 보냈어요. 이후 이중섭이 유명해져 맥 쌤이 갖고 계시던 그림의 가치가 높아졌어요. 맥 교수님은 MoMA에 보낸 이중섭의 그림 외에도 다른 그림을 더 가지고 있었어요. 훗날 이 그림들을 판 종잣돈과 교수님의 월급을 더해서 매년 선발한 두세 명의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했죠.

 맥 교수께서 수업과 평소 대화 중 이중섭과 관련한 이야기를 많이 하셨나요?
 평소 이중섭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신 건 아니에요. 하지만 이중섭과 친하게 지내셨다고 말씀해 주셨어요. 가끔 제자들이 이중섭에 대해 물어보면 “담배를 많이 폈다”, “그림을 참 빠르고 멋있게 그렸다” 정도의 소소한 이야기만 하셨을 뿐 거창히 말씀하시진 않으셨어요.

 맥 교수와 이중섭의 관계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우리는 ‘이중섭’이 소 그림으로 유명해진 것으로 알지만 그 뒤에는 맥 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어요. 당시 맥 쌤은 이중섭의 예술성을 파악해, 버려진 담배 속 은종이 그림을 가지고 있었어요. 이렇게 맥 교수님은 훌륭한 예술품을 적극적으로 알리려고 노력했고, 예술을 진정으로 사랑하신 분이었어요.

‘흰 소’ 1954년 경 作

 이중섭 시인과 각별한 관계였던 시인 구상은 1958년 9월 한 신문에서 “그를 살게 하고 죽게 한 것은 오로지 고립이었다. 중섭은 너무나 그림밖에 몰랐다. 그의 생존의 무기란 유일 그림뿐이었다”고 했다. 이에 고립의 삶 속에서 살기 위해 그림을 그렸던 그의 작품 세계와 미학에 대해 알아봤다.

 이중섭의 작품 세계; 자유성과 소의 의미에 대하여=이중섭의 작품에는 소재를 특정한 법칙에 가두지 않고 자유롭고 유연하게 표현하는 대담함이 돋보인다. 이중섭이 “그림은 내게 있어 나를 말하는 수단밖에 다른 것이 못된다”고 말했던 것처럼, 그는 그림 안에서 자신의 감정, 생각을 표현했다. 이중섭의 그림은 본질적으로 상상력에 의해 그려진 그림들이며, 자연주의적인 관찰과 묘사 능력 훈련이 동반되어 있다. 그 결과, 같은 소재를 반복적으로 사용해도 소재의 한계를 느낄 수 없게끔 했다. 

 이중섭은 일본 도쿄제국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했다가 다시 분카가쿠엔(文化学園) 미술과로 옮겨가는데, 당시 분카가쿠엔은 전위적인 미술운동에 관심을 두었던 곳이다. 따라서 이러한 그의 교육 배경에서 이중섭에게 보이는 자유성과 재료 사용 유연성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소’ 시리즈는 그의 개인적 삶을 그렸던 여타의 작품과 대조적으로 강력한 힘과 기상을 뿜어내고 있다. 무엇보다 이중섭은 민족의 기상을 숫소의 강렬한 동세나 이를 표현한 빠르고 힘찬 붓놀림으로 보여 주고 있다. 그의 ‘소’시리즈에 나타나는 소들은 묘사적이라기보다는 표현적인 것들이다. 당시 한국의 서양화단에서 이처럼 자유분방한 표현과 기운은 찾아보기 드문 것인데, 이는 당시 주류의 흐름에 휘몰리지 않고 이중섭 스스로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룩해 나간 결과이다.
 

‘벚꽃 위의 새’ 1954년 경 作


 이중섭의 향토성과 전통 기법=이중섭의 작품에서 향토성이 많이 언급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 박연숙 씨(미학 박사과정·졸)는 “이중섭의 작품에는 벌거벗은 아이들이 자연과 더불어 놀고 있는 장면이 많고, 농경 사회에서 중요한 일꾼이자 동반자인 ‘소’를 소재로 삼아 향토적 분위기를 형성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또 최석태 미술평론가는 “이중섭은 향토적인 소재를 우리 조상들이 다룬 전통 기법으로 재구성했다”고 말한다. 이처럼 이중섭은 소재를 단순히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미술사에 등장하는 기법을 동원하고 익혀서 내보였던 것이다. 

 특히 은지화에서 그 기법들의 극치를 볼 수 있다. 작은 그림이 거대한 구도와 같은 인상을 주는 것은 이중섭의 그림이 벽화적인 공간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이중섭 그림에서 인물의 발과 손 그리고 얼굴들은 어떤 그림에서나 동일한 도식화된 단순화 도형을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단순화 기법은 김홍도의 풍속화 등의 한국 회화에서도 볼 수 있다.

 그리운 당신을 그리다=이중섭에게 고독과 빈곤, 그 중에서도 가장 고통스러웠을 가족에 대한 그리움은 ‘그린다’는 행위에 그가 몰입하도록 일조했다. 이중섭이 가족에게 보낸 엽서에 그려진 삽화에는 인물들을 감싸 안은 따뜻한 푸른빛과 복숭아 빛의 대조가 다정하고 즐거운 환상의 색조를 보인다. 박연숙 씨는 “이중섭에게 회화는 가족과 재회해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꿈의 장소이기 때문에 그가 사용한 색상들은 모두 담백하면서도 소탈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미소를 짓도록 만든다”고 했다.

 그의 가난과 외로움은 날이 갈수록 극심해졌지만 작품 속에는 늘 가족을 향한 애정과 재회에 대한 희망이 있었다. 평생의 뮤즈인 아내와 그토록 사랑했던 두 아들을 못 보고 산 시간이 그렇지 않은 시간보다 더 많았던 이중섭의 삶은 다소 비극적이지만, 그의 작품은 늘 희망을 이야기했다. 때문에 그의 그림에서는 낙관주의적 세계관이 극단적인 비관주의적 세계관과 교차해 나타난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오늘날의 사람들이 그의 작품을 좋아하는 것은 아닐까. 인간은 비극에 끌리기는 하지만 결국 누구나 희극으로 끝나기를 바라기에. 
 

‘서귀포의 환상’ 1951년 경 作


 이중섭; 질서의 미학=이중섭의 미학에서 주목할 점은 해학미와 소박미 그리고 개성적인 표현미다. 그는 전통적인 미술 교육을 받았으면서도 전위적인 분위기를 경험했기 때문에 고전적 취향에서 좀 더 쉽게 벗어나 자유로운 작품 활동을 할 수 있었다. 그는 그의 감정과 그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잘 전달될 수 있는가에 집중했다. ‘전달’에 집중한 덕분에 이중섭 그림에 나타나는 해학미와 소박미는 우리가 친근감을 갖고 다가서도록 만들어 주는 요인이 된다. 이중섭을 가장 한국적인 화가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최석태 미술평론가는 “근·현대시기를 통틀어 소재주의라고 할 태도를 넘어선 화가는 이중섭 한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다”고 했다. 민족적인 소재와 조형 해석을 실천한 점에서 그는 지금까지도 거의 유일한 인물로 여겨진다.

 이중섭의 아내는 처음 그를 봤을 때, “따뜻한 사람이었으며 천한 느낌을 주는 데가 하나도 없었다. 무절제한 것 같지만 그 가운데에 분명한 질서가 있었다”고 했다. 이중섭의 중심에는 어떤 타고난 질서 같은 것이 있었다. 무절제 속의 분명한 질서는 때론 사람들의 혼을 사로잡을 만큼 큰 힘을 갖고 있다. 최석태 평론가는 그의 미학을 한 마디로 정의해 “추사체처럼 금석 기운이 나고, 혹독한 겨울을 견디고 봄이 되어 바야흐로 꽃을 피우는, 그래서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일희일비하지 않는 북방족 미학”이라고 했다. 역동의 시대에서도 타고난 질서의 미학으로 예술성을 꽃 피웠던 이중섭의 작품은 드라마틱한 삶의 이야기나 콘텐츠보다는 오로지 그의 감정과 표현으로만 봐야하지 않을까.

그들의 그림을 대하는 우리

 현재 우리나라의 미술품들은 개인이 소유하고 있는 작품이 많아 보존 가치가 있는 작품들을 정부 차원에서 관리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위작 논란도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데, 최근에는 천경자 화백의 ‘미인도’ 위작 논란도 있었다. 이중섭의 그림 역시 2005년에 논란이 된 바 있다.

 우리나라의 미술품 관리의 문제=현재 예술가들의 작품들은 뿔뿔이 흩어져 개인이 소유하는 경우가 많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과 같은 시대적 배경으로 인해 미술품들을 수집하고 정리하는 과정이 늦어졌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나라의 미술품에 대한 평가와 그에 대한 관심이 늦어진 것도 이유로 지목될 수 있다. 특히 서양 미술에 관한 관심이 늦어져 근대 미술 작품들은 더욱 관리가 되지 않는 상황이다.

 작품 관리를 위해선 무엇보다 작가 스스로나 연구자들이 작품이 누구에게 팔렸는지, 규모는 어떤지 등 작품 정보를 정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이에 대해 김유정 미술평론가는 “작가의 성향, 연구 비용 등의 문제가 있어 현실적으로 힘들다”고 말했다.

 한편 미술품의 위작도 문제가 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의 미술품 위작은 일제강점기 이후로 급격히 증가했다. 위작의 풍토가 잡혀진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수집가들이 미술품을 은밀히 소장하는 풍토가 위작을 쉽게 할 수 있게 만들었고, 작품을 금전적 가치로만 환산하는 풍토 역시 위작 작품이 계속해서 나올 수밖에 없는 토대를 만들었다. 이에 김영동 교수(회화과)는 “예술 작품을 상품의 대상으로 삼는 것을 삼가고, 개인의 작품을 존중해야 한다. 위작을 했을 경우 용납해선 안 된다”고 전했다.

 이중섭 화백의 위작 논란=이중섭 화백 또한 위작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사건의 발단은 2005년, ‘한국 근 현대미술품 경매’를 앞두고 일어났다. 이중섭 화백의 차남 이태성 씨(67)가 이중섭 화백의 작품 ‘물고기와 아이’를 서울옥션에 판매 의뢰했고, 서울옥션이 이 작품의 감정을 한국미술감정협회(이하 한미협)에 의뢰했다. 그러나 한미협이 작품에 대해 위작 판정을 내리면서 위작논란 사건은 시작됐다. 결국 이태성 씨는 한미협을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고, 한미협 측도 이 씨와 서울옥션 등을 상대로 고발하겠다고 맞대응을 했다. 현재 그는 일본으로 건너갔고, 귀국을 거부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중섭 50주기 기념 미발표작 전시준비위원회’를 준비하고 있던 김용수 씨(77)는 이중섭 화백의 위작 작품으로 전시회를 하려고 한 혐의로 논란이 됐다. 많은 양의 작품이 모두 위작이라는 것이 밝혀졌으며 결국 김용수 씨는 구속됐다. 그러나 많은 양의 위작들을 누가 제작했는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앞서 말한 이중섭 화백의 위작 논란 사건들은 미술계의 큰 이슈가 됐다.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최근 정부에선 이중섭, 박수근, 김환기 등 3명을 중심으로 ‘레조네 사업’을 진행중이다. 레조네 사업이란, 한 화가의 전 작품을 정리하기 위해 ▲작품 규모  ▲작품 소장 이력  ▲감정 여부  ▲위작 판정 등 ‘전자 도록집’을 완성시키기 위한 연구다. 이는 위작을 막기 위한 제도적 장치로, 이중섭 등의 화가를 중심으로 이뤄지며 이후에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

 한편 이런 상황 속에서도 이중섭 화백의 작품을 알리기 위한 노력은 이뤄지고 있다. 올해 10월까지 덕수궁에선 ‘이중섭 백년의 신화’ 전시회가 열린다. 이곳에서는 뿔뿔이 흩어져 있던 이중섭의 작품을 모아 한 곳에 전시하고 있다. 전시회 담당자는 “각 개인으로부터 허락을 받아 처음으로 이중섭의 작품들을 한 곳에 모아 전시회를 진행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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