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人3色 강따라 사람따라] 고월 이장희의 생애와 작품, 그리고 생가 탐방기
[3人3色 강따라 사람따라] 고월 이장희의 생애와 작품, 그리고 생가 탐방기
  • 하지은 기자
  • 승인 2016.06.07 17: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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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 문학은 누구의 것일까. 인간적 한계를 지닌 학문의 특성상 불가피한 측면이 있지만, 학계나 정치의 일방적 영향으로 문학을 바라보는 안경은 실체 없이 흐려지고 있다. 이렇게 무방비 상태에 있는 문학을 천편일률적인 해석으로 가르치고 있는 요즘, 오로지 개인의 내면에만 집중하여 그 세계 속에서 자유를 누리며 시를 썼던 시인 이장희가 그리워진다. 태양빛을 견뎌내고 맞는 어둠의 달콤한 해방감이 캠퍼스를 감도는 6월, 고월(古月) 이장희의 생애와 작품에 대해 기억해봤다.

 고월(古月) 이장희의 생애=고월(古月) 이장희는 1900년 11월 9일, 대구의 부호 이병학의 세 부인 중 첫 번째 부인한테서 태어나 다섯 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 밑에서 자랐다. 자존심이 강하고 자기 의견이 확실했던 고월(古月)은 중추원 참의를 지내고 일제 식민지 정책에 동조했던 아버지와 늘 갈등을 빚었다. 이런 아버지와의 사상적 대립과 갈등으로 고월은 늘 냉대 받았으며 지병으로 신경쇠약이 있었다.

 백기만이 펴낸 『상화와 고월』에서 양주동은 고월(古月)을 ‘겸손, 침착, 단아, 도회적 신사의 풍모’로 표현했다. 책에서 그는 쓸쓸한 저녁, 혼자 명상을 하는 자신에게 다가와 어깨를 치며 미소 짓던 다정한 고월(古月)의 얼굴을 회상하며 고월(古月)과 예술을 논하던 밤을 그리워했다. 한편 양주동은  여름에 그를 찾을 때마다 그는 언제나 사랑의 딴 방에서 혼자 누워있었던 고독한 생활을 했다고 말했다.

 고월(古月)은 가깝게 지낸 이상화, 오상순, 백기만 등의 소수 문인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을 속물시 했다. 1987년도에 이규동 신경정신과 박사가 이장희 시인을 정신분석학적으로 연구해 한국임상예술학회 학술대회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이 박사는 이장희 시인을 심한 속물혐오증을 가졌다고 진단했다. 이는 일제치하에서 친일적 행동을 보인 아버지에 대한 기피심리에서 기인한다는 것이다. 또한 고월(古月)의 아버지는 12남 9녀의 자녀를 둬 고월은 많은 이복형제들과 자랐는데, 그 과정에서 심한 소외감을 갖게 됐으며 이는 자기방어의 일환으로 자폐적 태도로 변형됐다고 분석했다. 고월(古月)은 정신파탄으로부터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병적 아픔을 예술 탄생의 에너지로 바꿔 발악한 것이다.
 
▲ 고월 이장희가 세상에 남긴 유일한 필적

 어머니를 잃은 상실감으로 비극적 죽음을 맞이한 젊은 시인=시인은 고향으로 내려와 몇 달을 누워만 있다가 2, 3일간은 어두운 방에서 수많은 금붕어를 방바닥에 그려놓았다고 한다. 그리고 1929년 11월 3일에 양잿물을 마시고 자결했다. 시인의 나이 29세였다.

 그는 죽기 며칠 전 평소 친하게 지내던 공초 오상순의 집에 찾아갔다가 외출한 오상순을 만나지 못하자 눈물을 글썽거리며 돌아갔다고 한다. 고월(古月)을 유별나게 아끼고 좋아했던 오상순은 고월의 죽음 후 연인을 잃은 것처럼 처절하게 그를 그리워하는 글들을 써냈다. 오상순뿐 아니라 고월이 주변 문인들과 맺은 관계는 지극히 아름다워서 동성애적 기질보다는 남성의 감각적 아름다움을 낯설지 않은 것으로 느끼게 해준다.

 그는 평소에 유서란 것은 현세에 미련을 가진 자가 쓰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죽기 전 죽음에 대한 글 한 자 남기지 않고 홀연히 떠나버렸다. 김문주 교수(국어국문학과)는 “책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그 책을 본 사람들에게 괴이한 열정을 품게 해, 그 시대 많은 청년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것처럼 한국의 20년대에도 기이한 분위기가 있었다”고 했다. 지적 감수성을 가진 지식인 청년들은 시대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고 정서적으로 우울을 견디기 힘들어 자살하는 사람이 많았던 것이다.

 백기만은 당시 대구 지역 애국청년들의 집합장소였던 조양회관에서 그의 유작전을 연다. 오상순은 1935년, 동아일보 기사에 이와 관련된 내용을 쓰며 후에 유고작이 분실된 것을 안타까워한다. 고월(古月)의 작고 후 서울에서는 그의 지인들이 시집의 용지부터 활자형까지 고인의 기호에 맞게 유작전 출판을 준비 중이었는데 대구에서 돌연 그 유작들이 분실됐다는 소식을 받았다는 것이다.

 고월(古月)의 유작전 후 이상화가 대표로 그의 작품 자료들을 모두 갖고 갔다. 그런데 1939년 이상화는 교남학교(대구 수성구 대륜고의 전신) 교가 가사 문제로 가택수색을 당해 자신의 원고와 고월(古月) 이장희의 유고까지 압수당해버렸다. 일본이 아니었다면 고월이 작품 전체를 연대별, 성격별로 손수 가철 편집하고 만들었다던 유고작 초판본이 현재까지 실제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친일적 모습으로 인한 갈등과 유고작을 일본으로부터 빼앗긴 것은 그가 역사와 무관한 시인이 아님을 보여준다. 그의 시를 단순히 개인적인 의미만으로 볼 수 없으며 시대적 현실은 이미 선천적, 후천적으로 그의 삶에 큰 영향을 줬다.
 
▲ 목우 백기만이 펴낸?상화와 고월』표지


 유약함에서 피어난 아름다운 감각성의 극치=지금까지 발굴된 고월(古月)의 시작품은 총 34편이다. 여기에 유고 8편은 상화의 사랑방 천장에 숨겨뒀지만 몰수돼 사라졌다. 감각의 날카로운 촉수, 탐미와 우울이 어우러진 그의 시는 짙은 우수에 차 있다.

 양주동의 회고에 따르면 고월(古月)은 기품, 운치, 음영을 좋아하는 동양예술적 예술관을 가진 예술지상주의적 면모를 보였다. 서양문예사조의 영향 역시 많이 받았던 고월은 예술을 위한 예술을 했던 유미주의의 극치였다. 또 고월(古月)은 프랑스 근대시에 정통했다. 베를레느와 말라르메부터 구르몽, 끌로델 등 여러 시인의 영향을 받았다. 고월(古月)은 시 뿐만 아니라 음악과 미술에도 관심이 많았다. 드보르작의 환상곡 유모레스크를 가장 좋아했다. 그의 쓸쓸한 심상과 달리 이 곡은 자유롭고 명랑한 곡이며 중반부터는 서정적인 선율이 흐른다.

 고월(古月)의 <봄은 고양이로다>는 그를 대표하는 ‘모던’, ‘감각’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 은은하고 따뜻한 봄의 정경에서 고양이의 호동그란 눈길을 포착해낸 시인의 다정한 시선이 돋보인다. 시인이자 대구문학관 도슨트인 이해리 씨는 “이상화의 시는 일본에 대해 저항한 내용을 담아 현재 문학사에서 높이 사고 있지만, 점점 시대가 흘러 평화시대가 도래하면 오히려 모던하고 감각적인 이장희의 시를 더 높이 살 수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

 고월(古月) 이장희의 문학성은 이미 문학계 안에서는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런데 왜 일반인들에게 그는 잘 알려지지 못했을까? 김문주 교수는 “우리나라 문학에서는 교과서에 수록되는 작품이 중요한데, 국민을 양성하는데 쓰이는 정책교과서 국어의 범주에 이상화는 필요하고 이장희는 배제된 것이다”고 했다.

 고월(古月) 이장희가 살았던 고택의 흔적, 그의 작품을 펴낸 책들 등 그와 관련된 실물적인 것은 모두 낡아 있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낡지 않았다. 시대가 흐를수록 더 빛나고 만발할 것이다. 우리 대학교 고문헌실에서 백기만이 펴낸 1950년대의 『상화와 고월』을 살펴보며 부스러진 고서의 끝부분을 어루만져봤다. 부스러진 책의 일부가 곧 고월 이장희 시인 같았다. 관심을 갖고 보존하지 않으니 그는 사라져간다.
 
 저항이나 독립에 관해 특출한 시를 썼던 시인들의 이야기도 중요하지만 한국 문학사를 미래지향적 관점에서 보면 이장희 같은 시인이 세계문학에서도 선구자적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를 연구에서 일반 국민에게로 끌고 나올 필요가 있어 보인다. 취업도 안 되고 연애, 결혼, 출산 3포를 넘어서 포기할 것이 너무 많은 N포세대가 됐다는 한탄이 이어지는 시대에 어딘지 쓸쓸하고 고독한 유별난 사람의 이야기는 공감의 따스운 힘을 준다.

그대에게 드리는 고월의 詩

 <봉선화> 시인은 집에만 있었으면서도 집이 그리 좋진 않았나보다. 어두컴컴한 집에서 시인은 얼마나 외로웠을까. 밝은 봉선화 한 떨기로 미소 지으며 어둡고 외로운 마음을 달랬을 시인을 생각하면 가여워 눈물이 핑돈다.

 <여름밤>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않았다던 고월(古月), 여름밤에는 곧잘 나왔나보다. 밤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에서는 숨통이 트이는 것 같다.

 <새 한 마리> 날마다 가슴에 품겨서 아프다고 발버둥치는 가엾은 새 한 마리는 분명 시인 자신일 것이다. 자장가로 잠재우려 하지만 새는 그저 아프다고 울기만 한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었던 시인은 자장가를 듣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들어본 적 없는 자장가는 그의 아픔을 달래기엔 너무도 생경한 것이다. 그래서 시에서 그는 비감에 젖어있다. 

 <달밤 모래 위에서> “자빠진 청개구리의 불룩하고 하이얀 배를 보고 야릇하고 은은한 죽음의 비린내를 맡는다” 그는 어쩌면 죽음을 향해 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삶 전체가 죽음으로의 여정이었던 그가, 힘겨운 시간들에서 발산해낸 아름다운 시의 근저엔 죽음의 향기가 도사리고 있다.

 <벌레우는 소리> 그의 작품들에는 밤의 소리에 귀 기울여 쓴 시들이 여럿 보인다. 시인은 연약하고 예민한 심성 탓에 잠도 잘 자지 못했을 것이다. 불면의 밤에 개구리, 벌레들의 소리에 의식을 두었다가 그 소리에 가만히 자신의 애달픈 마음을 대보곤 했을 고월(古月). 사람들을 마주하는 것을 불편해 했던 시인은 어두운 밤에 저 밖에서 울고 있는 벌레 소리에 마음이 한없이 가곤 했나보다. 시인의 적막하고 쓸쓸한 마음에 새초롬한 벌레 초롱 소리가 아름답게 닿을 것 같은 그런 여름의 밤을 우리들도 지나고 있다.
▲ ① 대구시 중구 서성로 1가 44번지에서 105번지 일대 ②보일러 가게 할아버지와 고택을 지키고 있는 할머니와 얘기를 나누고 있는 이태수 시인 ③이일우 고택 앞에 선 기자 ④붉은 벽돌 건물 옆 골목으로 들어가면 나오는 고택의 문과 지붕 ⑤고택의 기본 틀이 되는 일본의 삼나무와 고급건축부재였던 ‘회’가 하얗게 칠해진 모습 ⑥이일우 고택 오른 편에 있는 일본식 정원, 이 부근이 이장희 시인의 생가터 였을 것으로 추정

 늘 어두운 방에서 한참을 누워 있곤 했다던 시인 이장희, 그가 살았던 곳의 흔적이 대구시 중구 서성로 일대에 있다는 것을 알고 이태수 시인과 함께 그의 생가를 찾아 나섰다. 고개를 푹 숙이고 언어의 세계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던 시인이 걸었던 그곳은 어떻게 변해있을까. 그곳에 가면 금붕어의 뻐끔거리는 잔상들을 그릴 수 있을까.

 이장희 시인의 주소라고 알려진 ‘서성로 1가 105번지’, 이 주소만을 갖고 대구시 중구로 출발했다. 주소의 근처에는 철물점이 쭉 있었다. 서문로에는 일제강점기부터 철물점이 많았는데, 그래서 오늘날 자연스레 철물, 함석, 배관, 공구를 취급하는 가게들이 모여서 상권을 형성하고 있다.

 시인은 현재 공업상사들이 많은 어떤 지점쯤이 이장희의 생가 주소일 것이라고 말했다. 시인도 고월(古月) 이장희의 집을 찾은 지가 30년은 넘었다며 어렴풋한 기억만을 갖고 있었다. 골목 안으로도 들어가 살폈지만, 옛날에 그 화려하고 넓은 저택의 흔적은 없었다. 골목에는 투박한 풀들이 제멋대로 자라있고 늘어진 빨랫줄의 풍경은 낡고 지저분했다. 

 근처에 즐비한 철물점 상가에 들어가 이장희 시인의 생가에 대해 물었지만 알지 못한다고 답했다. 그렇게 한참 헤매다가 한 보일러 가게 할아버지께 고월(古月) 이장희의 아버지 이병학의 딸이 이 근처에서 병원을 운영했는데 알고 있는지 물었다. 이 동네에서 40여 년을 살았다는 보일러 가게 주인 이종윤 씨는 예전에 이 부근에 병원이 있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 자손들이 이 일대의 건물을 소유하고 있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가게에서 왼쪽으로 가면 ‘서성로 다방’ 팻말이 붙어 있는 건물 있는데 그 쪽으로  가보라고 했다. 그러면서 물 한잔을 건네 주셨다. 30도를 웃도는 5월의 날씨, 밖에서 골목을 헤매다가 들어와 얻어 마시는 시원한 보리차 한 잔은 꿀맛 같았다. 보일러 가게 할아버지가 말씀해주신 건물 쪽으로 가보니 붉은 벽돌 건물 옆으로 골목이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고택의 지붕과 대문이 보였다! 대문의 문패에는 ‘이석희’라는 이름이 있었다.

 오래된 나무 대문 옆의 초인종을 눌렀는데 한참이 지나도 인기척이 없었다. 문 틈 사이로 들여다보니 사람 사는 흔적이 보였다. 안에는 흙이 묻은 작은 칼이 보이고, 최근에도 신은 것 같은 신발도 보였다. 초인종을 여러 번 눌렀고, 이윽고 안에서 얇은 목소리의 여자가 누구냐고 물었다. 우리는 취재를 왔다고 잠깐 문을 열어 달라고 했다. 그러자 왼쪽의 철제문을 열고 할머니 한 분이 나오셨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어디서 본 듯한 모습이 생각났다. 1980년도 8월, 매일신문에 실린 이장희의 집이라고 찍어놓은 사진의 구도와 모습이 똑같았다. 처음엔 긴가민가하며 굳게 닫힌 문밖에서 별 기대 없이 살폈는데 막상 들어오니 고월(古月) 이장희의 생가를 찾았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을 정도로 벅차고 흥분됐다. 40년 전의 신문에서 본 것을 직접 눈으로 보다니! ‘금붕어를 그렇게 그리던 방이 이곳이구나’라고 생각하니 신기했다.

 시인도 몇 십 년 전에 왔던 곳이 그대로 있었다는 것에 놀라며 할머니의 손을 붙잡고 “이곳이 굉장히 중요한 곳이에요. 감사합니다!”라며 고마워했다. 또한 그는 “외국은 문화재의 중요성에 대해 인식이 높고 그 보존 또한 잘 돼 있는데, 한국은 그런 것이 너무나 열악하다”고 했다. 실제로 기본 뼈대의 나무들은 아직 튼튼했지만, 그것을 이어주는 나무들은 헤지고 삭아 있었다. 1920년도에는 큰 저택이라고 들었던 집들이 지금은 그 일부만 남은 현실이 비통하고 아쉬웠다.

 할머니의 집이 있는 곳 뒤편으로 가보았다. 그곳에는 정원과 분수의 흔적이 있었다. 사자상과 작은 연못, 분수, 일본식 석조건물까지 완벽한 일본식 정원이었다. 그 당시 이런 규모와 형식의 정원이 있었다는 것은 이장희의 집안이 보통 부자가 아니었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공간에 있는 작은 요소들 하나하나가 고월(古月) 이장희가 태어난 1920년대의 흔적을 일부분 증명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길 건너에 이상화 시인의 생가를 찾으러 갔다. 책에서 두 시인의 집이 100미터 근방에 있는 것을 봤는데 정말 짧은 횡단보도 하나 건너 지척에 있었다. 하지만 곳곳엔 고택의 흔적만 있을 뿐 시멘트 건물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서성로 13길이라고 붙여진 팻말 옆에는 연두색 표지판에 ‘이상화 생가터’라고 작게 적혀 있었다. 이상화가 말년에 잠시 머물렀던 공간을 이상화의 생가라고 해서 크게 선전하고 있으면서도, 이상화가 실제로 나고 자랐던 공간은 이토록 초라하게, 골목 안에 작은 표지판으로만 그 흔적을 알 수 있어 씁쓸했다.

 이상화가 이장희와 같이 문학을 논하며 거닐던 그 동네에는, 시멘트나 벽돌로 쌓아올린 현대 건물들 사이에 어울리지 않게 솟아있는 낡은 기와지붕이나 오래된 나무 대문만이 그들의 흔적을 대신하고 있었다. 그 주변 상가의 상인들은 저마다의 삶을 살기에 바빴고 노년의 시인과 카메라를 들고 두리번거리며 다니는 젊은 여자를 힐끔 힐끔 볼 뿐이었다.
▲ 1980년 매일신문 古月 기사 中

 고월(古月) 이장희의 생가 주소인 서성로를 갔다와 그 내용을 정리하던 중 기자는 큰 오류가 있었음을 발견했다. 1980년의 매일신문 기사에서 고월(古月)의 집이라고 돼 있는 사진이 잘못돼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갔던 공간은 이장희 시인의 생가와 관련된 곳이 맞았지만 기사 사진에 나와 있는 고택은 이상화의 백부 소남 이일우의 고택이었고, 그 맞은편 안으로 들어가면 있던 일본식 정원이 이장희 시인의 생가 터였다. 이에 권상구 거리문화시민연대 사무국장의 도움을 받아 이장희 시인의 실제 생가에 대해 알아봤다. 또 찍어온 사진들을 토대로 정인성 교수(문화인류학과)의 자문을 얻어 문화인류학적 고증을 해봤다.

 이일우의 고택과 이장희의 고택=소남 이일우의 집은 소남의 두 손자가 나눠살았다. 대문의 문패에 있는 ‘이석희’는 이일우의 장손이었다. 들어가는 입구 왼쪽 편에 있는 고택은 서성1가 46번지로 차남 이탁희 씨, 그 오른편의 서성1가 44-3번지에는 장남 이석희 씨가 살았다. 44번지에는 고택의 문을 열어줬던 할머니가 살고 계셨던 것이다. 그 분은 이탁희 씨의 안사람이자 이상화 시인의 질녀인 분이었다.

 이일우의 고택 바로 오른 편에는 서성로 103, 105번지로 이장희 시인이 태어났던 곳이다. 1935년 소남 이일우의 장남 이상악이 일부를 소유하게 되면서 44번지 소남 이일우 고택의 집으로 안채의 일부가 편입됐다. 이장희 고택은 이일우 고택과 다른 번지수였는데 해방 후 일부 병합됐다. 이병학의 저택은 구 조흥은행(현 삼정사우나)까지였다고 하며 이일우의 고택보다 더 넓은 저택이었다. 그런데 현재 이병학의 고택은 대부분 터만 남아 있다.

 지금의 서일빌딩자리에는 이장희 고택의 바깥채와 대문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의 44번지 남쪽의 행랑채에서 고월은 음독자살했다. 우리가 살펴봤던 일본식 정원이 있던 부근이 고월(古月)이 지냈던 행랑채의 터 일부라고 유추할 수 있는 것이다.

 문화인류학적 고증, 상가 속에 있었던 역사적 판도라의 상자=왼쪽 고택을 제외하고 나머지 고택은 지붕의 끝 쪽 위에 세모 모양으로 솟아 있는 망와만 조선 기와이고 나머지 기와는 전부 일본식 기와이다.

 정인성 교수(문화인류학과)는 “대구시 중구는 건축 양식을 일본식으로 바꿔서 일본인 거주 공간으로 바꾸려 했으며 조선 사람도 일부 건축 양식을 바꿔서 살았다”고 했다. 그런 사람들은 곧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다는 것이기에 이는 이병학의 집안이 부자였다는 것을 잘 뒷받침해주고 있다.
이장희 시인의 생가 터에 있는 정원의 석등은 일본식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작은 대나무 등 정원수들도 일본 나무들이었다. 연못에 물을 채우고 여러 정원수를 심어 마당 앞에 정원을 크게 조성했을 것이다. 화려한 저택에 살았던 고월(古月)은 왜 처마 밑으로만 고개를 푹 숙이고 다녔는지, 고독의 병에 걸렸던 그가 더 안타깝기도 하다.

 일본식 정원의 옆에 있는 곳간은 기초시설부터 일본 형식이었다. 또 하얗게 칠해진 것은 ‘회’라고 패류로부터 얻은 자연 상태의 가루에 첨가물을 섞어 지금의 시멘트처럼 사용한 것이다. 이것 또한 고급건축부재였다. 마당의 조명은 일본식 청동조명이며 김광균의 시 ‘와사등’의 바로 그 와사등이었다. 들어가는 입구의 왼쪽 편에는 일본 멧돌도 있었다.
 
 정 교수는 “문학적으로 의미가 있는 인물의 생가를 현장 자료를 통해 실증할 필요가 있으며, 주택구조와 부속시설, 우물 등 역사적으로 복원가치가 있는 것이 많기 때문에 이 일대를 제대로 검토해 복원해야한다”고 했다. 이는 실제에 입각한 스토리텔링이 가능할 것이며 국립한국문학관 유치에 신청한 대구시에게도 중요한 자산이 될 것이다. 이번 탐방을 통해 우리는 철제 물건들이 즐비한 상가 속에서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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