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논단] 난쟁이 식물
[천마논단] 난쟁이 식물
  • 박의호 교수(생명응용과학대 생명공학과)
  • 승인 2016.05.23 16: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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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때 어느 방송사 프로그램 출연자가 “키 180cm 안 되는 남자는 루저”라는 말을 했다가 전국을 좀 시끄럽게 한 적이 있었다. 특히 키 작은 많은 남성들에게 좌절감을 더해 주면서 크게 분노를 사기도 했다. 덩달아 아직 성장이 덜 된 청소년들까지도 ‘루저’ 불안감을 표시하기도 했었다. 사실 여자 친구나 남자 친구들의 외형을 얘기할 때 “키가 크거나 얼굴이 잘 생기면 모든 걸 다 용서할 수 있다”는 농담들도 흔히 한다. 물론 키 큰 사람들은 대부분 그냥 웃기만 한다.

 생물학적으로 키는 어떤 의미일까? 모든 생물들에 있어서 키는 아주 중요한 1차적 특성이며 생장 판단 기준이자 생존전략이다. 비옥한 토양에서는 잘 자라며 척박한 조건에서는 자람이 더디다. 그런데 환경조건과 관계없이 선천적으로 키가 작은 식물들도 있는데 이들을 난쟁이 식물(왜성 식물)이라고 한다. 이들은 비료를 충분히 주고 좋은 환경을 조성해 주더라도 일정한 길이 이상 자라지 않는다. 난쟁이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난 식물들이다. 자연 상태에서는 정상개체의 유전자에 이상(돌연변이)이 생기거나 극단적 불량 환경, 바이러스 감염 등의 환경조건이 원인이 되어 생긴다. 단순히 키 외에도 잎, 열매, 가지 등 기관별로 크기가 아주 작은 것들도 있는데 이에 관여하는 유전자들은 대체로 열성이며 그 발생빈도도 낮다.

 일반적으로 식물들도 키가 작으면 모양도 기형이지만 여러 가지 불리한 경우가 많으며 그래서 난쟁이 식물들은 대부분 도태된다. 그런데 이러한 난쟁이 식물을 본 인간이 그 특유의 보호본능을 발동시켜 별도로 관리 및 이용하기 시작했다. 키 작은 식물은 비바람에 잘 쓰러지지 않는 특성이 있으며 식물을 키우고 관리하는 작업 면에서 유리한데, 이 사실에 착안한 것이다. 특히 과일나무 개량에 이 난쟁이 특성을 많이 이용해 왔다. 키가 작더라도 열매만 충분히 맺으면 면적당 생산량은 늘어나기 때문이다. 또한 농약 치기 등 각종 관리와 수확할 때도 매우 편리하다. 그래서 사과를 비롯한 대부분의 과일나무들은 난쟁이들로 교체되어가고 있다.

 식량식물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 재래종이었던 ‘앉은뱅이 밀’이 일본을 거쳐 멕시코의 국제옥수수밀연구소로 가서, 키 작고 비바람에 잘 견디는 “소노라”라는 우수한 밀로 탄생되었고 이들이 파키스탄과 인근 지역에 보급되어 식량문제 해결에 큰 기여를 하였다. 이 밀의 개발자인 보로그박사는 노벨평화상을 받게 되었고 가히 혁명이라 할 만한 이 결과를 그때부터 “녹색혁명(green revolution)”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이러한 난쟁이 유전자를 “녹색혁명 유전자”라고 불렀다. 우리나라에서도 키가 작고 잘 쓰러지지 않는 다수확성 통일벼가 개발되면서 식량자급 문제 해결의 기점이 되었다.

 난쟁이 식물은 자연 상태에서도 생긴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방사선, 화학약품, 중성자 등 여러 가지 방법들을 동원하여 이보다 훨씬 더 많은 난쟁이 식물을 만들고 있다. 남들에게 보이기 곤란한 기형의 체구, 선천적 루저지만 난쟁이 식물들은 그 덩치에 비해 너무나도 많은 열매들을 매달고 오직 인간을 위해 인내하며 헌신하고 있다. 그 덕택에 인류는 더 많은 음식을 제공받고 좋은 경관도 즐기고 있다. 난쟁이 특성을 잘 활용한 과학자들의 잔인성에는 큰 상이 주어진다. 그러나 그들과 그 생산물을 즐기는 인류의 웃음 뒤에는 난쟁이로 평생을 살아가야 하는 식물들의 아픔도 있다. 한번쯤 그들 앞에서 난쟁이 식물 파이팅을 외치고 싶다. 나를 비롯한 키 작은 생물들도 모두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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