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의 인문학] 삼라만상은 다 논다. 야성의 회복과 놀이하는 청춘
[스무 살의 인문학] 삼라만상은 다 논다. 야성의 회복과 놀이하는 청춘
  • 최무진 기자
  • 승인 2016.05.23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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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7일 천마아트센터 챔버홀에서 최진덕 연사의 특강이 진행됐다. 사진 하지은 기자

 지난 17일 ‘스무 살의 인문학’ 수업에서는 최진덕 연사의 강의가 진행됐다. 서강대학교 철학과 박사 과정을 수료한 최진덕 연사는 한국문화에 대한 심층적 연구를 진행하고 있으며,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교수로 재직 중이다. 대표 저서로는『인문학, 철학, 그리고 유학』,『주자학을 위한 변명』등이 있다. 이번 강연에서는 ‘야성의 회복’이라는 색다른 주제를 선정했다. 강연 내용을 통해 그의 철학을 들여다봤다.

삼라만상은 다 논다. 야성의 회복과 놀이하는 청춘

 야성은 인간의 근원적인 생명과 연관=일반적으로 야성은 본성에 가깝다 보니 부도덕한 것으로 여길 수 있다. 그러나 어느 사회에나 통용되는 보편적 법칙은 없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이 있다. 근데 이웃 중에는 도둑도 있고 나쁜 사람도 있다. 어떻게 다 사랑할 것인가?

 야성은 인간의 근원적인 생명과 관련 있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야성은 우주의 기원과 관련 있다. 대한민국은 야성으로 성공을 거뒀다. 내가 어렸을 때인 1960년대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였다. 또한 땅이 좁고 인구도 적은 희망이 없는 나라였다.  하지만 현재 대한민국은 선진국으로 공업 생산국 세계 5위를 달성했다.

 이처럼 희망이 없던 나라에서 현재의 선진국으로 거듭난 원동력은 거칠 것 없는 야성이다. 일본의 메이지유신은 최초로 황인종이 거둔 근대화의 산물이다. 한국의 근대화 성공은 일본의 메이지유신보다 월등히 놀라운 기적을 발휘했다.

 한국에 불법체류자가 많다. 그 이유는 자기 나라보다 월등히 잘 살기 때문이다. 여기가 좋으니까 떠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런데 한국 청소년은 우리나라를 헬조선이라 비꼰다. 또한 은수저, 금수저하면서 힘들다는 핑계를 댄다.

 우리가 어릴 때는 중동이나 아프리카로 가서 고생을 많이 했다. 하지만 요즘 젊은이에게 외국 가서 일하라 하면 ‘너나 가라’는 식으로 대답한다. 이게 말이 되는가? N포 세대라는 말이 있다. 무한 포기세대를 말한다. 그런 학생들이 늘어나고 있다. 젊은이들 사이에서 허무주의가 광범위하게 퍼져나가고 있다. 이대로 이어진다면 한국의 미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근본적인 문제는 야성의 상실=한국의 최대 문제는 청년 실업, 경제 위기가 아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야성의 상실이다. 이것이 한국이 당면하고 있는 최대의 문제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청년실업, 경제위기 등의 문제 또한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그럼 젊은이가 야성을 상실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 책임이 여러분의 부모님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부모님은 여러분을 너무 잘 키우려다가 오히려 엉망으로 만들었다. 여러분은 과잉보호 속에서 자랐다. 과잉보호는 심리적으로 큰 부담을 준다. 부모님에게 너무 많은 사랑을 받으면 그것을 갚아야 한다는 부담감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스스로 사유하는 것은 사춘기 이후에 해도 된다. 어릴 때는 어른이 시키는 대로 하면 된다. 그런데 어렸을 때부터 ‘나는 나고 잘났다’는 식으로 생각하며 과잉 지적 훈련을 받았다. 그러면 자아의식이 강화된다. 강력한 자아의식이 조기에 과잉 발달하면 본인에게 부담이 된다.

 인간은 자아의식이 있어야 한다. 자아의식을 키워 능동적으로 커야 한다. 이 자아의식 때문에 모든 문명이 생긴다. ‘내가 잘났다’는 생각이 없다면 세상에 어떤 문명도 생겨나지 않는다. 바로 자아의식 때문에 인간이 만들어낸 문명은 끊임없는 갈등을 초래한 것이다.

 자아의식이 부모님의 과잉보호 속에서 일찌감치 성숙해버리면 근원적인 생각으로부터 시들어간다. 그것이 문명의 말기에 나타나는 퇴폐현상이다. 예를 들어 마약, 동성애, 정신병과 같은 것들이다.

 우주의 삼라만상이 각기 다르지만 하나로 흘러가고 있다는 것은 근본적인 사실이다. 이는 모든 인간이 가진 운명이다. 자아의식이 생기고 도덕 판단을 스스로 하게 되면 우주의 근원적인 사실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다. 우주의 근원적인 생명이 나로부터 떠나는 것은 문명의 말기에 발생하는 퇴폐현상이다. 나는 젊은이들을 보면 ‘이 현상이 너무 빨리 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한다. 부모님이 뭘 하셨기에 여러분이 벌써 이렇게 됐나 싶다. 나는 여러분이 다시 우주의 근원으로 돌아갈 수 있게 회복시켜 주고 싶다.

 야성을 회복하려면 놀아야 한다=이것은 여러분들이 공부를 열심히 하거나, 교수님한테 잘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다. 우주의 근원인 야성을 회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는 놀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주의 삼라만상이 전부 놀고 있다. 인간처럼 힘들게 일하는 존재가 우주에는 전혀 없다. 우주는 그 자체를 위해서 움직인다.

 자기 목적의 행위를 플레이라고 한다. 그런데 일은 행위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우주는 목적이 따로 없다. 기독교 신자는 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 ‘하느님을 향해서 가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그 사람들 생각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우주가 그 자체 목적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한다. 우주적 놀이를 본받기 위해서 놀이가 필요하다.

 술을 많이 먹고 만취하는 순간 나는 우주와 하나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음주·가무, 마약은 계속하면 몸과 마음을 병들게 할 수 있다. 음주·가무보다 더 강한 것은 마약이다. 하지만 마약은 하면 안 된다. 마약만큼 빠르게 인간을 우주의 근원으로 돌려주는 것은 없다. 마약을 하는 사람은 어떻게 보면 상당히 종교적인 사람이다. 그렇다면 여러분과 우주가 하나 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놀이가 뭔가? 명상이다.

 우주와 하나가 될 수 있게 하는 것은 명상=명상은 여러분들의 날카로운 자아의식과 도덕적 판단능력을 누그러뜨리고 우주와 여러분을 하나로 만들어 준다. 명상은 넓게 보면 음주·가무, 마약과 본질에서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다만 마약 등은 효과가 일시적이며 몸과 마음을 망가뜨릴 수 있으므로 경계해야 한다. 기도하는 것도 명상처럼 중요하다.

 명상은 무조건 혼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말하면 안 된다. 어떠한 생각도 하면 안 되고 앉아있어야 한다. 명상은 앉아서 홀로 말없이 해야 한다. 이 세상일을 하려면 서는 것뿐만 아니라 뛰어야 한다. 그래서 명상은 세상의 일과는 정반대되는 행위다. 명상은 사회적으로 자기를 죽이는 것이다. 세상만사를 완전히 면도칼로 도려내 버리는 행위다. 그것이 무심, 허심이라 하는 마음 비우기다. 명상은 사회적인 죽음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이미 소유한 것이 너무 많다. 소유는 전부 인간 세상에서 오는 것이다. 세상 사람이 인정해줘야 내가 소유한 것이 인정된다.

 명예욕을 뿌리 뽑는 것은 죽는 것보다 힘들다.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 분신자살, 할복자살하는 사람들도 많다. 명예욕을 뿌리 뽑아내기 쉬울 것 같은가? 정말 어렵다. 여러분의 건강을 위해 절에 가서 명상할 수 있다.

 죽을 각오로 명상에 힘써야=생명력이 무엇인가? 바로 야성의 원천이다. 산에 가는 사람들에게 왜 산에 가느냐고 물어보면 아무도 대답을 하지 못한다. 산에 가면 돈이 나오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엄홍길씨는 항상 산에 간다. 그 사람에게 산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바로 명상이다. 내가 보기엔 그렇다. 히말라야는 무엇인가? 우주의 근원이다. 거기서 무슨 재미를 느꼈는가? 목숨을 거는 재미다. 만약 히말라야가 안전하다면 그 사람들에게 히말라야는 건강을 위해 가는 산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는 못할 것이다. 그 사람들은 결사의 각오를 하며 목숨을 거는 재미로 산에 오른다. 이렇게 목숨을 거는 행위는 명상을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이처럼 명상도 죽을 각오로 해야 한다.

 어떤 일은 하든지 목숨을 걸면 자기가 하는 그 모든 행위가 바로 명상이 되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일상행위의 전체가 명상이 될 수 있다. 명상의 조건은 목숨을 거느냐, 걸지 않느냐이다.

 여러분이 여기까지 오기 전까지 수많은 좌절을 했을 것이다. 한편으로 세상에 대한 불만도 많이 쌓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일이든 자기가 목숨을 걸 일을 만든 다음 명상에 몰두해라. 영어공부를 하든 노래연습을 하든 어떤 것도 좋다. 목숨을 걸면 어떤 일이든 신성한 일이 된다.

 나는 여러분이 아는 것이 많다고 생각한다. 컴퓨터, 영어 세상만사에 대해 나보다 아는 것이 많다. 그러나 나는 걱정스럽다. 이렇게 많이 알아서 뭐 하느냐? 다 버려야 한다. 여러분 부모님 및 스승의 가르침은 필요 없다. 자기가 원하는 일에 모든 것을 바쳐야 한다.

 인간은 소통이 힘들다. 모두 자아의식을 갖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소통이 되려면 결사의 각오를 해야 한다. 인간은 어릴 때부터 상처받고 살기 때문에 치유를 받기도 힘들다.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여러분이 어릴 때부터 받았던 상처를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스스로 치유하기 위해서 상처받은 사실을 명확히 인식하고 인정해야 한다.

 현대 인문학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낯간지러운 인문학을 가르친다. 그런 것은 여러분들의 인생에 도움 되지 않는다. 정말 여러분이 도움을 받고 싶다면 결사의 각오로 달라붙어 원하는 일을 끝까지 해야 한다.

학생들과의 질의응답

 결사의 각오로 영어공부를 하든, 노래연습을 하라고 했는데 그러면 내 삶이 행복해지는가?
 목숨을 걸고 어떤 일에 몰두하다 보면 행복해 질 수 있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해라’ 는 말을 믿지 마라.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싶은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보다 남이 하고 싶어 하는 것을 하는 것이 더 좋을 수도 있다.

 그러나 뭘 하든 상관없다. 결사의 각오로 목숨을 걸어야 한다. 모든 것은 다 섞여 있다. 우리가 느끼는 행복은 불행 속에서 느끼는 행복이다. 단 한 점의 불행도 없는 행복은 존재하지 않는다. 목숨을 걸고 어떤 것에 매진할 때 수많은 고통이 나를 엄습한다. 그 고통 속에서 기쁨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이 행복해지는 길이다.

기자와 연사의 만남

 ‘삼라만상은 다 논다. 야성의 회복과 놀이하는 청춘’이라는 주제로 강의했다. 하지만 모순적으로 나는 야성적인 사람이 아니며 잘 놀아보지 않았다.

 나는 얌전한 학자 타입이다. 학자다 보니 학문에 힘쓴다. 학문에 힘쓰며 사는 것은 야성적인 성향을 가지기 어렵다. 글을 한번 쓰려면 문법, 쉼표에 신경 쓰다 보니 사람이 쪼잔해지듯 말이다. 술을 먹고 만취하면 우주와 하나 될 수 있는데 내가 음주·가무를 잘하지 못한다. 그래서 잘 놀지도 못한다고 생각한다.

 야성을 가진 사람이 큰일 하는 것을 보면 존경스럽다. 그런 사람이 많아진다면 우리 사회가 발전할 것이다. 정치인, 사업가, 군인이 야성적인 성향을 가지기 쉽다. 학자가 세상 전면에 나서기는 힘들다.

 학생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사회를 현실적으로 바라봤으면 한다. 실학이 필요하다. 조선 시대 실학은 실학이 아니다. 자연과학을 하는 사람은 이상주의에 빠져있다. 이상주의에 빠지면 좋지 못한 결과를 가져온다. 그러므로 학자와 교수를 포함해 우리나라 사람이 현실을 직시했으면 한다. 현실을 바탕으로 이상을 얘기해야 한다. 이런 부분이 고쳐져야 우리나라는 발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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