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의 인문학]아무것도 하지 않는 즐거움
[스무 살의 인문학]아무것도 하지 않는 즐거움
  • 하지은 기자
  • 승인 2016.03.28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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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마아트센터에서 함성호 시인·건축가의 특강이 진행됐다. 사진. 지민선 기자

아무것도 하지 않는 즐거움

 지난 15일 ‘스무 살의 인문학’ 수업에서 함성호 연사의 특강이 진행됐다. 건축가이자 시인인 함성호는 1963년 강원도 속초에서 태어나 강원대 건축과를 졸업했다. 1990년 계간『문학과 사회』여름호에 「비와 바람 속에서」 외 3편을 발표하면서 시단에 나왔다. 2001년 제2회 현대시 작품상을 수상했고 1991년 건축 전문지 『공간』에 건축 평론이 당선되어 건축 평론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최근에 만화 비평도 하는 시인은 건축설계 사무소 EON을 운영하고 있다.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다양한 시각을 갈고 닦아온 작가의 삶을 통해 젊은 날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을 짚어봤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즐거움’은 절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성공할 수 있다거나 만족스러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돈을 벌고 남들이 알아주는 지위에 오르는 게 삶의 목표라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느끼는 즐거움 속에서 공부는 그 다음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전제하고 강의를 들어간다.

 나의 존재와 타자의 욕망=프랑스의 심리학자이자 철학자 라캉은 “인간의 모든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라고 했다. 이게 대체 무슨 말일까. 여러분은 처음 보는 사람에게 자기를 소개할 때 “영남대 건축과 몇 학년 아무개입니다”라고 답할 것이다. 또 외국 여행을 가서 자신을 소개할 때도 국가를 말할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학벌, 국가, 미디어가 강요하는 가치에 따라 자신을 규정한다. 그런데 어느 것 하나도 자신을 제대로 나타내지 못한다. 여러분들이 암묵적으로 강요된 것에 따르면 ‘나’의 얼굴이 없어질 것이다.
 
 건축 설계를 하면서 타자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으로 착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많이 본다. 재료와 비용의 문제 등 건축적으로 고려된 것들이 무시된 채 원래 도면처럼 완성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공사 현장에서 콘크리트 덩어리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모습을 보면 여자분들은 불안해한다. 시누이가 왔을 때 “벽이 다 시멘트야? 집을 짓다 말았어?”라는 얘기를 들을까 불안해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몰딩이나 싱크대도 돈을 더 들여서 겉보기에 화려하게 바꿔버린다. 그런데 정작 그 불안의 정체는 타자의 욕망이다. 그 과정에서 집은 괴물로 변해간다. 이는 곧 자기 얼굴이 괴물로 변해가는 것과 같다.

 라캉이 얘기한 문장은 해결되기 어려운 문제다. 그 이전에 욕망하고 욕구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욕구는 용변, 배고픔, 성적 갈망과 같이 해소되면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욕망은 끝이 없다. 돈을 십 원 벌면, 다시 백 원을 벌고 싶어지는 채워지지 않는 상태가 욕망이다. 강의를 듣고 뭔가를 알았을 때 뿌듯함을 느껴도, 알고자 하는 욕망은 무지를 넓힌다. 욕망이 항상 나쁜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가능성을 열어주는 어떤 작용을 하기도 한다.

 identity의 문제=우리나라 부모들은 자녀를 대학에 입학시키려고 갖은 정성을 쏟고 자녀들은 이를 귀찮아한다. 그러면서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점점 멀어지고 소원해지면, 부모는 우울증에 걸린다. 자식이 부모의 병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라캉이 인간의 모든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여기에서 identity라는 문제가 생긴다.

 사전에서는 identity를 정체성이라고 번역한다. 정체성은 ‘변하지 아니하는 존재의 본질을 깨닫는 성질. 또는 그 성질을 가진 독립적 존재’라고 정의돼있다. 하지만 정체성은 동질성이라고 번역해야 한다. 그리고 본질과 성질이 어떻게 다른지 봐야 한다. 정체성은 상당 기간  일관되게 유지되는 고유한 실체로서의 자기에 대한 주관적 경험을 함의한다. 이는 자기 내부에서 일관된 동일성을 유지하는 것과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어떤 본질적인 특성을 지속적으로 공유하는 것 모두를 의미한다. 여기서 골치 아픈 본질의 문제에 관해 얘기해보자.

 “너는 누구냐?” 라고 물으면 “나는 누구일까?” 한 번 생각해보는 것이다. 답은 없다. 그 질문에 흔들리는 게 중요하다. 본질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여러분에게 질문을 던질 때, 대답을 못 하더라도 바보가 아니다. 중요한 건, 당신이 누구냐 물었을 때 떨리는 1초의 시간이다.

 에코 세대의 가치관=지금의 20대를 부모 세대인 베이비붐 세대의 메아리로 존재하는 세대라고 해서 에코 세대라 한다. 에코 세대의 성장 과정은 재벌, 혹은 대기업의 수출 중심 정책의 성공에 의한 열매를 맛본 세대다. 또 급성장기 경제를 겪었고 자라오며 카드대란, 글로벌 금융위기도 같이 겪었다. 가족적으로 보면 베이비붐 세대의 열렬한 지원으로 에코 세대는 거의 대다수가 대학에 입학할 정도로 교육열이 높다.
 
 에코 세대는 부동산보다 금융 자산을 통한 자산 축적 가능성을 상대적으로 높게 보고 있고, 내 집 소유도 좋지만 쾌적하다면 전/월세도 괜찮다는 거주중심의 주거관을 보유하고 있다. 자녀교육에 대한 양상도 달라졌다. 자녀교육 및 지원과 관련한 가치관 측면에서 부모 세대보다 몰입 정도가 극히 낮은 특성을 보인다.

 일하지 않고 일할 의지도 없는 청년 무직자를 뜻하는 신조어 ‘니트족’은 학력 수요와 인력수요의 미스매치로 생겨난 것이다. 이는 대학이 기업화되며 일어나는 현상이다. 대학이 기업화돼 많은 학생을 받아서 공급 과다로 취업난을 겪고 당연히 신용난을 겪게 된다. 그렇게 되다 보니 주거난도 발생한다. 그것을 사회 문제로 바라본다면, 에코 세대의 결혼지연으로 인구 감소 추세가 가속화되면 소비 집단의 소비 부진으로 내수침체가 장기화될 것이고 세대 간 일자리 갈등문제도 심화될 것이다. 여러 상황이 여러분이 이미 당하고 있는 것이지만, 현재의 해결방안으로는 도저히 뚫고 나갈 수 없다.

 에코 세대는 이대로 가다간 모두 망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저항 방식을 부정이 아니라 긍정으로 바꿔 얘기해야 한다. 허먼 멜빌이 쓴『필경사 바틀비』라는 책이 있다. 바틀비는 불러주면 쓰는 필경사다. 변호사가 그 사람에게 일을 시키면 바틀비는 “나는 그것을 안 하는 것을 선호합니다”라고 말한다. “나는 그것을 하는 걸 선호하지 않습니다”라고 부정적 표현을 하는 게 아니라 긍정으로 안 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한다. 떨림에 대한 공부를 하려면 이런 저항이 필요하다.

 카이로스의 시간=그래서 우리가 뭘 위해 그렇게 공부하고 저항해야 하는가? 그리스 철학에서는 카이로스의 시간과 크로노스의 시간이라는 게 있다. '크로노스 시간'은 과거부터 미래로 일정 속도와 방향으로 기계적으로 흐르는 물리적 시간이고, '카이로스 시간'은 일순간이나 인간의 주관적, 논리적인 시간을 말한다.

 『모모』라는 소설에서 모모는 남의 말을 듣는 것이 가장 큰 능력이다. 그런데 어느 날 콜로세움에 갔는데 사람들이 말을 하러 오지 않자 시내에 갔더니 회색도둑이 사람들의 시간을 뺏고 있었다. 그 시간이 ‘크로노스의 시간’이다. 로마 사람들은 더 정신없고 바빠졌다. 그래서 모모는 호라박사를 찾아갔고, 호라박사는 모모에게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전하라”고 한다. 모모는 사람들에게 가서 그 사람이 왜 바쁜지 설명하고, 그 얘기를 들은 사람들은 한순간에 아무 일도 안 하게 된다. 그리고 뺏을 시간이 없어진 회색도둑은 없어진다. 그 후 콜로세움에 평화가 찾아오는 것이 결말이다.

 박사가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한 것은,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는 법이라는 걸 알려준다. 카이로스의 시간은 변하는 시간이다. 3차원적인 평면에서 확장돼 나가서 다차원적인 시간을 이루는 시간이다. 공부하며 살아있음을 느끼고 거기에서 연장해, 세계에 대한 인식으로 사유를 넓혀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시간을 온전히 우리 것으로 하기 위해서이다. 시간 도둑에게 시간을 뺏기며 바삐 사는 것보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변화의 시간을 맞고 살아있음을 느끼며 경험하는 것이 우리가 공부하는 목적이라고 생각한다.

학생들과의 질의응답

 건축 전공을 하며 철학이 어떤 영향을 끼쳤고, 어떻게 문학이랑 철학을 하게 됐는가?
 나는 시도 쓰고 공연 기획도 하고 미술, 전시, 건축설계, 비평도 한다. 하는 게 많은 나에게 어른들은 한 우물을 파라며 타박했다. 나는 그 말에 화부터 났다. 나대로 한 우물을 파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파다 보니, 신석기 지층도 나오고 중생대 지층도 나온 것이다. 적어도 한 우물을 팠으면 당연히, 거기엔 철학이 낄 수밖에 없다. 고딕건축을 하려면 스콜라철학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하고, 현대건축을 설명하려면 민주주의, 실존주의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여러 지층과 만나며 무지는 더 많아지고 읽어야 할 책은 많았다. 하지만 나름대로 행복한 시간이었다.

 강연 중 언급했듯이, 에코 세대는 극심한 취업난을 겪으며 힘든 시대를 살고 있다. 연사님이 살아오며 가장 힘들었던 시간은 언제이고 어떻게 극복했나?
 가장 힘들었던 때는 나의 몸값을 정할 때였다. IMF 때, 다니던 건축회사에서 엎어진 일의 총 책임을 떠맡고 나와 독립해서 사무실을 차렸다. 하지만 설계비를 말하면 너무 비싸다고 사람들이 가버렸다. 그 정도는 충분히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회에서는 내 역량을 알아주지 않았다. 그러나 3년 동안 같은 가격을 불렀고, 그러자 집에는 쌀이 없고 월세가 밀렸다. 낮에는 공간을 대여해주고 밤에는 글을 엄청나게 썼다. 그렇게 버텼는데 예전에 취재했던 모 신문사 기자가 내가 3년 동안 주구장창 불렀던 설계비를 받아들여 줬다. 그때부터 일이 되기 시작했다. 그때가 가장 힘들었고 그렇게 극복했다.

기자와 연사의 만남

 시는 내 맘대로 할 수 있다. 시로 세계를 부술 수도 있고 모든 걸 부정할 수도 있다. 건축은 조건을 손상시키지 않으며 조화롭게 하는 조건의 예술이다. 모든 인문학의 기본적 언어는 시이고 모든 자연과학의 기본적 언어는 수학이라고 생각한다. 시와 수학이 통하는 지점이 있는데 그것은 정확함이다. 놀아도 기본적인 정확함 속에서 놀아야 한다.

 내가 쓰는 사랑에 관한 시는 냉소적인 게 아니라 내가 본 사랑의 정확함을 그대로 쓴 것이다. 사랑 노래에 나오는 것처럼 아름답고 애틋하기만 한 사랑을 나는 본 적이 없다. 사랑은 변한다. 애틋한 순간보다 변하는 순간이 시적으로 나에게 끌린다.

 사람들은 건축의 형태를 보고 예쁘다, 멋있다고 하는데 그렇게 보지 말고 조화로움을 봤으면 좋겠다. 건물을 오브제로 보는 게 아니라 주변 사물들과의 조화, 기후, 자연조건을 생각해보기 바란다.

 내일이 없다고 생각하고 노는 걸 즐겼으면 좋겠다. 목적으로 만나는 게 아니라 자기가 정말 좋아하는 사람들하고. 나는 그렇게 원 없이 놀았다. 가끔 위기의 순간이 있었지만, 내일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놀았기 때문에 내가 누구를 좋아하고 사랑하는지 너무나 정확히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늘 그런 사람들이 위기의 순간에 도와줬다. 내가 도와달라고 하지 않아도 다 안다. 그러니 마음껏 사랑하고 놀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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