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암살’보다 극적인 삶을 살았던 박희광 독립투사
영화 ‘암살’보다 극적인 삶을 살았던 박희광 독립투사
  • 영대신문 기자
  • 승인 2016.02.29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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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7주년 3.1절 박희광 선생 항일독립운동사
▲ 1984년 12월 28일 제막한 구미금오산 도립공원경내 박희광 선생 동상

 2015년 최고의 영화로 평가되는 최동훈 감독의 ‘암살’이 1,200만 관객 돌파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웠다. 영화를 통해 1933년 당시 상하이와 경성을 배경으로 친일파 암살 작전을 둘러싼 독립군들과 임시정부 대원들의 활약상이 국민들에게 애국심을 불러일으키며 가슴 뜨거운 감동을 자아냈다. 영화 암살은 허구이긴 하지만 실제로 존재했던 독립군 양성소 신흥무관학교 출신 독립투사들의 활약상과 실존 인물이었던 의열단을 이끌던 약산 김원봉의 존재를 세상에 알렸다. ‘암살’은 마음속 감동으로만 끝내기에는 너무 아쉽고, 조국을 위해 바친 독립투사들의 불꽃같은 삶과 죽음이 가슴 깊숙이 여운을 남기는 영화이기도 하다.

 하지만 영화보다 더욱 감동적인 구미 출신의 독립투사 박희광 애국지사의 실화가 엄연히 실재하고 있다. “정갑주, 조국을 배신한 첩자! 우리는 조선독립을 위해 싸우는 투사다. 너를 조국의 이름으로 처단한다.” 이는 박희광 독립투사가 친일파 처단 당시 내린 사형 선고문의 일부분이다.
1924년 7월 22일 만주 봉천성 일본총영사관에 폭탄이 날아들었다. 아쉽게도 불발이었지만 일본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폭탄을 투척한 장본인들은 대한통의부 5중대 소속의 독립투사인 김광추, 김병현, 박희광 3인으로 특수훈련을 받은 암살 특공대였다.

 이들은 당시 독립신문에 삼장사(三壯士)라고 알려졌고 봉천성 일대의 일제 앞잡이 단체였던 보민회와 일민단 사람들을 숙청하는 임무를 맡았다. 친일 앞잡이들에게 ‘3인조 암살단’ 은 공포의 존재가 되었다. 그들 3인은 이미 일본경찰의 지명 수배자로 거금의 현상금이 붙은 수배자였다. 정갑주는 여순경찰서 고등계 첩자로 악명이 높았던 인물이며, 1924년 6월에 삼장사의 사형선고문을 들은 뒤 총살됐다. 이후 봉천성 총영사관 폭탄 의거일까지 보민회 최정규 회장, 일진회 친일파의 거두 이용구 회장 일당 처단 등 맹활약을 했다. 

 대낮에 벌어졌던 일본총영사관 폭탄의거 실패에도 불구하고 1924년 7월 22일 저녁, 삼장사(三壯士)는 거액의 군자금 탈취를 위해 일본 요정 금정관에 침입했다. 당시 잠복해 있던 일본 경찰들과의 치열한 총격전 끝에 김광추 의사는 현장에서 적의 총탄에 피탄되어 순국했고, 김병현 의사와 박희광 의사는 체포(피체)됐다.

 여순형무소에서 김병현 의사는 1심, 2심 사형선고를 언도받아 형 집행으로 순국했다. 박희광 의사는 1심 사형 언도를 받았고 2심에서는 호적상 나이가 미성년자로 기재돼 있어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박희광 선생은 감형돼 1924년~1943년(20년)의 최장기 복역 후 출옥, 환국하여 서울 경교장 백범 김구 선생을 보호하는 경호책임자로 임무를 수행했다. 

 박희광 선생은 백범의 서거 뒤 보호하지 못한 무거운 책임감으로 모든 것을 접고 대구와 구미 왜관으로 내려와 은둔 생활을 하며, 감옥에서 익힌 재봉기술로 양복수선업에 종사하면서 생계를 이어가다 1970년 서울보훈병원에서 타계하셨다.

 박희광 선생은 김구 선생을 끝까지 보필하지 못한 안타까움에 자신의 독립운동 사실을 주변에 알리지 않았다. 그러나 뜻있는 지인들의 도움으로 1924년 당시 동아일보와 독립신문 등에 실린 8회의 재판(공판)과정 보도 자료가 발견돼, 박희광 선생의 독립운동 활약상이 세상에 알려져 1968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 받게 되었다.

 박희광 선생 기념관 건립은 언제나 가능할까?=구미시청 관계자는 박희광 선생 기념관 건립 문제는 주변 상황과 여건이 맞아 떨어지게 된다면 그다지 불가능한 일만은 아닐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국가보훈처로부터 생가복원, 기념관 건립을 위해 2013년 본예산 7억 원의 국비를 확보했지만, 구미시비와 경상북도비의 지방비지원이 없어 국비를 반납해야만 했다. 또한 박희광선생의 기념관이 들어설 구미시 봉곡동 173-1 토지를 문중으로부터 기증받았지만, 사업이 5년 이내에 이뤄지지 않으면 반납해야 한다는 약조가 되어있는지라 안타깝게도 금년 2015년 7월 문중에 귀속됐다고 한다.

 독립 운동가를 위한 기념관 설립은 현실적으로 재정적인 문제와 사후 관리에 따른 여러 가지 복합적인 문제가 뒤따른다. 하지만 국가를 위해 헌신한 보훈단체 및 국가유공자에게는 적극적인 예우와 지원으로 사기진작과 자긍심을 고취할 필요가 있다.

 2014년 11월 11일에 열린 제191회 제5차 구미시 의회에서 기획행정위원회 박세진 의원은 ‘호국보훈단체 및 회원 예우개선’에 관해 화두를 꺼내며, 박희광 선생 생가 복원과 관련해 배정미 주민생활지원과장에게 질의를 했다. 박 의원은 생가 복원이 안 되는 이유에 대해 구미시의 구체적인 답변을 요구했다. 담당 과장은  도비가 세워지지 않아 시비도 세워지지 않았다며 건립에 차질을 빚은 이유를 답했다. 앞으로 보훈처로부터 국비가 내려오게 되면 도비가 세워지게 되고 그에 따라 시비도 세울 수 있다며 앞으로 경상북도와 긴밀히 협조하겠다고 한다.

 박희광 선생 기념관과 관련해 지역사회의 분위기가 형성되면 건립이 가능하다는 논리다. 구미시 주민복지과에 따르면 박희광 선생 기념관 건립 문제도 다시 한 번 추진해 볼 수 있다고 한다. 그 이전에 지역사회의 동조를 얻게 된다면 예산을 세우는 과정에 있어 순탄할 것으로 예상된다.

 영화 ‘암살’을 통해 역사적인 사실이 바탕이 된 이야기가 얼마나 국민들에게 감동을 주는지 실감나게 체험했다. 영화 ‘암살’보다 더 극적인 삶을 살아온 박희광 독립투사의 이야기가 더욱 널리 알려져  구미시의 보다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기념관 설립에 대한 의지가 굳어지기를 바란다. 박희광 선생 기념 사업회는 수십 년간 박희광 독립투사의 불굴의 정신을 세상에 널리 알리는 데 노력을 해왔고, 이제는 그의 용맹했던 과거가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알려져 귀감이 되고 있다.

 박희광 선생의 기념관은 단순한 전시관이 아닌, 친일파 처단을 위해 훈련한 대한통의부 5중대 시절의 시대상황을 반영한 체험관과 적과 맞서 싸웠던 현장을 재현함으로써 실질적인 산 교육적 효과를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가=올해는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로부터 106주년이 되는 해이다. 역사를 망각한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고 한다. 특히 고난의 역사를 망각한 민족의 미래는 희망이 없을 것이다. 경술국치 이후 우리 민족이 당한 정치적 박해와 경제적 수탈 문화적 피해는 말로 다할 수 없다. 하지만 1919년 3월 1일 독립운동을 일으켜 전국적이며 거족적인 항일 독립운동으로 승화시켰다. 독립운동을 통해 발휘된 민족의 역동성이 광복 이후 한국의 경제성장과 민주발전의 원동력이 됐다고 본다.

 이제 과거 역사에 대한 뼈아픈 성찰을 통해 미래에 대해 새로운 신념을 다지는 계기를 마련했으면 한다. 독립운동가들은조국광복의 열망을 안고 고국을 떠나 풍찬노숙하면서 늘 고단한 삶을 살았으며 고국을 등지고 중국 상해, 만주, 연해주, 하와이로 이주 망명하여 망국노의 한을 면하지 못했다.

 고난과 시련의 역사는 오늘의 뿌리이고, 미래를 여는 희망의 역사다. 경술국치를 되새겨 다시는 수치스러운 그와 같은 비극적인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청년들은 물론 국민 모두가 마음을 다져야 한다.

▲ 대한민국 건국훈장 국민장(현, 독립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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